4월29일 싱가포르, 역사박물관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선 신선한 맥주 향이 난다. 1층 반짝이는 스틸 맥주 양조 통에서 제조되는 냄새다. 창 밖으론 화려하게 채색된 집들이 강가에 늘어서 있다. 박물관은 뜻밖의 손님을 맞을 채비를 하고 있다. 곧 허우샤오시엔이 도착해 “아시아의 허우샤오시엔: 영화, 역사 그리고 문화”라는 자신의 작품을 기리는 학술 심포지엄에서 기조연설을 할 것이다. 대만, 홍콩, 호주, 중국, 영국, 일본, 인도의 영화학자들과 싱가포르 국립대 교수들이 그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다. 가벼운 티셔츠 차림의 허우샤오시엔이 들어선다. 이 학술회의를 조직한 천광싱 교수의 소개로 그는 참석자들과 인사를 나눈다. 내겐 “안녕하세요?”라고 한국말로 정겹게 인사한다. 웃음이 장난스럽고 진솔하다.
허우샤오시엔 “난 제멋대로 살았다”
허우샤오시엔은 자신의 삶의 여정을 들려준다. <펑꾸이에서 온 소년>(1983)처럼 그는 동네 건달이어서 이런저런 일로 패싸움을 일삼았고, <동년왕사>(1985)의 가족 배경과 유사하게 아버지가 친구의 호의를 받아들여 중국에서 대만으로 이주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허우 감독에게 특별한 권위를 행사하는 분이 아니어서 그는 극장과 거리에서 시간을 보내며 비교적 제멋대로 살았다. 이러한 성장기 회고담에서 천수이볜의 민주진보당을 지지했으나 현재는 비판적이라는 정치적 이야기까지 허우샤오시엔 감독은 나는 “아시아의 허우샤오시엔”이라며 이번 학술회의 제목을 유쾌하게 자기 희화적으로 인용하면서 일대기를 이야기했다. 그리고 자신이 친구들의 청을 절대 거절하지 못하는 성격이라 곤경에 빠진 적이 많다고 웃으며 푸념한다. 천광싱 교수와는 정치집회 등을 통해 알게 된 친구이기 때문에 현재 영화 편집 중임에도 불구하고 이번 초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정치적 야심이 없는 허우 감독은 여러 정치단체에서 상징적 역할을 하고 있기도 하다.
이어 일본 도쿄대 하스미 시게히코 교수가 “과묵의 유려함”이라는 제목으로 허우 감독의 전작을 ‘기차의 도착’이라는 주제로 살펴보는 에세이를 발표했다. 그는 <연연풍진>(1985)을 고고학적 영화적 황홀경이라고 부르면서 거기서 기차가 터널을 지나 나무가 드리워진 기찻길을 지나는 장면이 뤼미에르 형제가 1898년 찍은 “기차 앞에서 철도 터널을 지나는 여정”을 연상시킨다고 말한다. 그의 영화들이 거리감, 지속성 그리고 부동성을 사용함으로써 드라마적 요소들을 삭제하는 것, 사건에 개입하는 것을 회피하는 것을 동아시아적 태도로 볼 수도 있겠지만, 이런 장치들은 관객을 영화라는 매체가 새롭고 신선했던 시대로 이끌고 간다고 지적한다. 그런 의미에서 허우샤오시엔은 당대의 프랑스 감독보다 더 시네마토그래프의 계승자로 볼 만하다.
과연 대만영화를 죽인 것이 허우샤오시엔인가?
이어 오후 패널에서 베이징대학의 다이진후아 교수는 “고향의 흙: 가-국-세계”라는 제목의 발표문에서 허우샤오시엔 감독의 영화를 작가주의나 스타일상으로 읽는 방식도 매력적이지만 냉전과 세계화라는 구도 속에서 읽자고 제안한다. 한편 웬티엔칭 대만 평론가는 “과연 대만영화를 죽인 것이 허우샤오시엔인가?”라는 도발적인 질문을 던진 뒤 물론 대답은 아니다, 로 끝나지만 허우샤오시엔 영화가 대만영화를 측정하는 잣대인 것만은 틀림없다고 진단한다.
싱가포르 국립대학 주최로 열린 이번 행사에서 진행상의 묘로 돋보인 것은 청중의 질문 시간. 한국이건 어디든 간에 내가 가본 대부분의 학술회의에선 막상 청중의 질문 시간이 되면 시간이 없다고 형식적으로 한두개의 질문을 받고 끝내는데 비해 이곳에선 발표자들이 시간을 정확하게 지키게 하고, 청중의 질문을 30분에서 1시간가량 받았다. 싱가포르 학계의 관행인가, 하고 묻자 그렇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청중 친화적 진행이 마음에 들었다. 청중은 허우샤오시엔 영화의 대만에서의 수용 상황을 묻기도 하고, 이 학술회의와 함께 진행 중인 회고전에서 본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하면서, 조용한 가운데 진지한 참여 태도를 보였다.
첫날 마지막 패널에선 홍콩 필름아카이브의 웡아인링이 허우샤오시엔 감독의 영화에 나타나는 꿈의 서사와 중국 전통 서사와의 관계에 대해 분석하고 대만 국립중앙대의 린웬치 교수가 허우샤오시엔 영화의 알레고리적 요소를 지적했다. 다소 짐작, 예측가능한 분석틀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에이드리언 마틴은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허우샤오시엔의 내러티브, 미장센, 그리고 사운드디자인에 대한 접근”을 발표했다. 호주의 저명한 평론가이자 시네필인 에이드리언 마틴은 허우 감독의 영화에서 발견되는 생산적 혼란에 주목하며, 그의 영화를 보는 대부분의 관객이 부딪히는 질문,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를 비평적 딜레마이자 돌파구로 사용하고 있다.
모호함이야말로 영화의 핵심
<호남호녀>(1995), <남국재견>(1996), <밀레니엄 맘보>(2001) 등에서 특히 서구 관객은 다음과 같이 생각하게 마련이다. “내가 뭔가 중요한 서사 정보를 놓쳤나보지. 자막이 좀 부실하니까.” “집중을 못해 캐릭터들을 분간 못한 거야.” 그 결과 사람들은 예를 들면 <호남호녀>의 경우 미국판 DVD 해설판을 읽고, 영화 속에서 개인이 자신의 주관적인 시점으로 모든 것을 기억하고, 투사하고 연결하는 것으로 생각하려 한다. 그러나 허우샤오시엔 감독의 영화는 꿈인지, 현실인지, 플래시백인지 플래시포워드인지를 분간하기 어렵게 처리하고 이 모호함이 바로 영화의 핵심이 된다. 이런 점을 이해하기 위해 에이드리언 마틴은 뒷이야기(back story)라는 시나리오 구성에 꼭 필요한 요소를 끌고 오는데, 뒷이야기란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 일어났던 이야기를 지칭한다. 허우 감독의 영화에서 이 뒷이야기는 개인사, 가족사에 한정되지 않는다. 대만의 현대사 전체가 하나의 뒷이야기로 작용한다. 그래서 로베르 브레송이나 칼 드라이어의 영화들처럼 허우샤오시엔 영화의 질문은 하나의 이야기가 어떻게 변화와 전환의 순간을 끌어안을 것인가 하는 곳으로 향하게 된다. 이때 그 변화와 전환의 순간은 개인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세계와 역사 속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또한 어떻게 영화라는 장치가 그 변화의 순간, 조건들을 생성하고 탐구할 것인가를 포함한다. 예컨대 브레송의 <소매치기>(1959)는 궁극적 ‘구원’의 순간에 도착하는데, 소매치기와 같은 비밀스런 범죄 행동을 통해 어떻게 그런 순간에 도달했는지는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는다. 반면, 반복 충동이 지속되는 <밀레니엄 맘보>와 <남국재견>의 마지막인 길에서 벗어난 자동차 장면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변화와 전환의 어려움이다. 또한 허우 감독의 장면은 마치 ‘흰개미 예술’처럼 일련의 매혹적이고 중요한 세부사항들이 재현되어나가면서 그것이 주플롯을 흰개미처럼 갉아먹는 양태를 띠게 된다(이것은 아마도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도 해당될 것이다).
오후 패널이 끝난 뒤 감독이 동참한 가운데 우리는 중국 음식점에서 함께 저녁을 먹었다.
중국, 홍콩, 대만 그리고 싱가포르의 중국어권 참여자들은 한 테이블에 둘러앉아 감독과 중국어로 담소를 주고받고, 비중국어권 사람들은 또 다른 테이블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화의 주제는 어떤 술을 마실 것인가? 녹색 장식이 수상하게 보이는 팥빙수 디저트를 먹을 것인가 말 것인가, 오늘 패널에 대한 평가 등이었다. 여하간 우리는 맥주와 포도주를 나눠먹고 나는 꺼림칙하게 녹색 팥빙수를 바라보는 유럽 참가자들에게 맛있으니 먹으라고 강요하면서 첫날 저녁을 끝냈다.
아시아 사람끼리 텍스트를 읽고 토론한 드문 경우
오늘 있을 내 발표 때문에 걱정이 되어 일찍 일어났다. 싱가포르 차이나타운에 위치한 푸라마호텔 창 밖 오른쪽으로 바다가 보이고, 푸른 새벽빛에 잠긴 시내에선 어떤 소요도 감정도 묻어나오지 않았다. 하이테크 싱가포르시의 비감성적 과묵함이다. 대만, 타이베이의 시적 과묵함과는 상당히 다르다. 이튿날, 역시 감독이 심포지엄에 참석한 가운데 대만 국립예술대의 첸루슈 로버트가 최근작 <카페 뤼미에르>(2003)와 <비정성시>(1989)를 “사이”(In/between)라는 개념으로 사유하는 글을 발표했다. <카페 뤼미에르)에서 기차가 교차되는 장면은 일본과 대만 사이의 문화적 차이, 번역과 협상, 세대적, 젠더적 차이들, 시간과 공간, 기억과 회상의 사이 공간, 그 교차와 연관된다는 것이다. 이어, 유럽에서의 허우 감독의 수용 상황과 그가 대만영화를 어떻게 바꿔냈는가라는 대만 관계자의 발표가 있었다.
점심. 주최쪽에서 예약한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는데, 싱가포르의 유명 음식이 치킨라이스라며, 싱가포르대 추아벵후아 교수가 포장된 치킨라이스 2개를 사들고 왔다. 고소한 닭기름에 볶은 밥을 먹은 뒤 오후 내 발표는 “ 마치 삶과 같이: 탈식민 역사기술”이라는 제목으로 <희몽인생>을 탈식민역사기술 방식으로 읽는 것이었다. 대만에서 온 학자 중 한 사람이 내 발표 내용을 비판하다가 역비판을 받았다. 그러고나서 새삼 생각해보니 이제까지 아시아의 내셔널 시네마를 그 로컬에서 읽거나 서구 비평가가 읽은 관행은 많지만, 아시아 사람들끼리 서로의 텍스트를 읽은 경우는 그 지역학 전공자를 제외하곤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복합적으로 교차하는 기차, 영화의 변화 예고
이어 홍콩과 대만의 학자가 공동으로 <호남호녀>와 안후이의 <보통영웅>을 비교하면서, 대만영화가 억압된 것의 귀환과 기억과의 화해를 다루고 있다면 홍콩영화는 기억상실증과 잃어버린 기억의 회복을 다루며, 특히 왕가위 영화는 기억의 지속을 다룬다고 설명했다. 특히 젠더 정치학에서 보자면 허우 감독의 영화에서 여성이 내레이션을 할 때 그것은 공식 역사기술의 단일성을 수정하는 대안이 된다는 중요한 지적이 따랐다. 이어 인도 영화학자인 아쉬쉬 라자디약사는 올리비에 아사야스가 1997년 만든 허우 감독에 대한 다큐에서 허우 감독이 인터뷰 도중 잊어버린 것- 그 다큐에서 허우 감독이 말하기를 <동동의 여름방학>에는 세개의 시점이 있어요. 감독의 시선 그리고 배우들의 시선이 있지요. 어, 근데 이렇게 두개뿐이네. 세개가 아니고(웃음)”- 즉, 제3의 관객 시선이 어떻게 그의 영화에 등장하는지를 분석했고, 마지막으로 영화학자 폴 윌먼 교수는 <카페 뤼미에르>에서 이제까지 허우 감독의 영화에서 등장하는 선형적 레일을 따라 달리는 기차가 아닌 복합적으로 교차하는 기차가 나오는 것을 지적한 다음 그의 영화의 전환, 변화를 예고했다.
학술회의가 끝난 뒤 우리는 추아벵후아 교수 집에 가 저녁을 먹고 아내와 함께 그 자리에 온 허우 감독과 간간이 대화를 나누며 이튿날 밤을 보냈다. 싱가포르의 이상기후는 밤까지 이어져, 늦은 밤도 무더웠다. 자신이 만든 영화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세계 각지에서 날아와 차와 술을 마시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허우 감독은 또 다른 영화를 상상했을까? 예컨대 <카페 싱가포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