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군 전쟁을 소재로 다룬 <킹덤 오브 헤븐>은 영화 외적 이유로 무척 궁금한 영화였다. 얼마 전 교황 서거에 대한 세계적인 추모의 고성이 입증했듯, 서양인을 하나로 묶는 건 피부색 이전에 기독교라는 종교였다. 종파에 관계없이 교황은 서양인들을 비서양인과 구분케 하는 종교적 정체성의 상징이다. 유럽 공동체가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실현되고 있는 것이나, 이슬람국가인 터키가 애타게 유럽연합 편입을 호소하고 있지만 계속 보류되고 있는 것도 그것과 무관하지 않다.
소재는 십자군 전쟁, 그러나 종교 이야기는 아닌
<블랙 호크 다운>에서 서양 문명의 위기를 분석적 이성이 아니라 시청각적 감각으로 전한 리들리 스콧이, 서방 종교가 동방 종교를 정벌한 역사적 사건을 어떻게 다룰지가 그래서 궁금했다. 그러나 막상 보고 나니 영화는 지나칠 만큼 모범적이었고 정치적, 윤리적으로 너무 착했다. 십자군 지도자인 제레미 아이언스의 “신은 핑계였고, 우리가 원한 건 영토와 재물이었다”라는 친절한 한마디가 웅변하듯, 여기서 종교 그 자체는 탐구 대상이 아니다.
동방의 종교 지도자의 인간적, 영웅적 풍모를 존중하는데다 이라크 전쟁 비판이라는 동시대적인 함축까지 담고 있으니 이 영화의 소박한 휴머니즘과 인민주의는 그것만으로도 훌륭하다. 그러나 영화는 다소 싱겁게 느껴졌다. CG보다 실물에 의존한 스펙터클은 <트로이>에 비할 수 없이 육중했지만 <블랙 호크 다운>의 초인간적 스펙터클에는 미치지 못했으며, 인민주의 영웅을 부각시키기 위해 종교적 신념을 모두 허위로 치부하는 이야기 방식도 너무 단순했다. 영화의 세부를 따지고 들어가는 것보다 이 영화를 빌미로 다른 생각을 한번 해보고 싶다. 그것은 흔히 영웅서사물 혹은 대하서사물로 번역되는 에픽이라는 장르에 관한 것이다.
왜 한국인들은 에픽영화를 좋아하는가
한국은 에픽영화를 유난히 좋아하는 나라로 이름 높다. 전세계에서 죽쑨 <알렉산더>도 한국에선 웬만큼 성공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에픽영화를 좋아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이 장르의 대중적 무기인 시각적 요소 때문일 것이다. 중세 혹은 고대의 성, 광대한 들판, 거대한 군중신 같은 에픽의 공통적 요소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대형 스크린을 찾는 관객에게 깊은 시각적 쾌감을 선사한다. 그런데 이 장르가 한국에서 더 많이 소비되는 건 언뜻 생각하기에 이상한 일이다. 왜냐하면 할리우드 에픽에서 묘사되는 이야기는 대부분 한국의 역사적 체험과 무관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관여하지 않은 것에 매혹된다면, 혹시 그것은 우리의 어떤 결여 때문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결여하고 있는 걸까. 그것은 서양 자체일 수 있다. 서양인이 동양적인 것을 신비화하고 물신화하는 방식과는 정반대로 우리가 서양적인 것을 신비화하고 물신화하는 일종의 옥시덴탈리즘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건 별로 수긍할 만한 답은 아니다. 에픽의 매혹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등장하는 고대 혹은 중세의 구경거리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의 문화적 상황을 말할 때, 동서양의 구분은 종종 유용하지 않다. 동양적인 것으로 알려진 것 중에서도 우리에겐 신기한 구경거리가 더 많기 때문이다. 예컨대 만리장성과 앙코르와트는 우리에겐 콜로세움만큼 낯설고 진귀한 구경거리다. 고대문화라는 간판이 붙은 현대의 진열장에서 동양과 서양은 단순한 분류 표지에 지나지 않는다. 포스트모던 문화의 특징인 문화수집벽은 미니어처 공원처럼 갖가지 문화를 횡단하며 온갖 구경거리들을 수집하고 진열하는 데 몰두한다. 영화감독은 때로 유능한 문화수집가이며 영화는 그것들의 진열장이 된다.
우리에게 결여된 게 있다면 그건 문화 기성품으로서의 고대 혹은 레디메이드 고대다. 그것은 역사적 연대기로서의 고대가 아니라 역사가 엔터테인먼트에 포섭된 문화 횡단의 시대에 고대적인 것(혹은 중세적인 것)으로 인지되어 분류된 브랜드로서의 고대이며, 문화 진열장에 한방을 차지하고 있는 고대다. 주로 서양인들이 큐레이터로 있는 이 진열장에는 서양은 말할 것도 없고, 중국과 인도, 아랍과 일본은 있지만 한국은 없거나 보이지 않을 만큼 왜소하다. 진열은 오랜 시간에 걸친 역사적 파워게임의 결과이므로 지금 억지로 밀어넣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기성품 고대는 특히 영화 같은 시각예술에서 중요하다. 왜냐하면 대중영화가 종종 시각적 기표를 통해 정체성의 재구성을 시도하기 때문이며, 영화관에 가는 행위는 “마음속의 고향을 향한 이주민들의 소망을 만족시키는 행위”(폴 비릴리오)이기 때문이다. 에픽은 고대의 시각적 기표들을 즐겨 전시하는 작은 진열장이다. 서양인들은 주로 고대 그리스, 로마와 기독교 시대의 문명을 동원함으로써 세계 문화전시장에서 그들의 코너를 확대 재생산한다. 이 기획은 기성품 고대를 결여한 우리 스스로는 산출 불가능해 보이는 종류의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새로운 고대는 그것이 전시되기 위해선 다시 말해 외국의 관객에게 수용되기 위해선 우리 속에서가 아니라 이 전시장 안에 있는 것으로부터 만들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때 선택 가능한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레이 초우가 중국의 5세대 감독들의 영화를 논하면서 지적한 것처럼 불가해한 고대를 발명하는 것이다. <황토지> <붉은 수수밭>의 황량하고 아름다운 평원은 그것의 말없음과 여백을 통해 직접적 해석을 방해함으로써 중국을 신비화한다. 그러나 이 기획 역시 중국 철학과 회화의 어떤 전통이 사전에 진열돼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두 번째는 다국적인 문화수집 자체를 기획 전략으로 삼는 것이다. 임권택을 제외한 대부분의 한국 감독들은 이 방식을 택한다. 그러나 이 기획은 독자적이고 안정적인 전시공간을 보장받지 못한다.
기성품 고대, 영원한 매혹의 대상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거나 보는 사람이거나 우리는 모두 고대의 결여로 인한 불안에 빠진다. 할리우드 에픽을 관람하는 나는, 지아장커의 <세계>에 나오는 미니어처 공원의 관객처럼, 우리가 결여한 그들의 고대 혹은 그 모조를 불안과 동경의 시선으로 엿보는 자다. 중국인들에게 그 매혹의 대상은 서양 문명이겠지만, 우리에게는 기성품 고대 전체다. 그곳은 우리가 결코 얻을 수 없는 영원한 매혹의 대상인 것이다.
<킹덤 오브 헤븐>에서 막강한 시리아 군대로부터 예루살렘성을 필사적으로 막아내고 마침내 협상에 성공한 올랜도 블룸이 떠나기 전에 시리아의 왕에게 묻는다. “예루살렘은 어떤 곳인가요.” 왕이 대답한다. “아무것도 아니야. 모든 것이기도 하고.” 이 훌륭한 대답은 중의적으로 들린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심오한 결론이 아니라, 아무것도 아닌 그 장대한 공간과 그를 위한 해일 같은 군무야말로 이 에픽의 매혹적인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