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만남에 전기에라도 감전된 듯 휘몰아치는 강렬한 감정의 폭풍, 이것만이 사랑의 전부는 아니다. 때로는 너무 가까이 있어 사랑이라는 것조차 깨닫지 못하고 그렇게 헤어져 세월이 흘러도 마음 속 깊이 은은한 그리움으로 남는 사랑.
서서히 물드는 단풍이 어느새 온 산을 붉게 물들이는 가을날의 풍광처럼 영화 <가을날의 동화>에 담긴 사랑 역시 서서히 젖어와 마음 속 깊이 오랜 흔적으로 남는 그런 사랑 이야기다. 어느 날 불쑥 찾아와 삼판(주윤발)의 ‘챠블(trouble)'이 되어버린 ’젠퍼(jeniffer)'(종초홍), 그리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 ‘챠블’을 사랑하게 되어 버린 삼판. 어쩌면 사랑이란 그렇게 헤어지면 그립고 있으면 힘겨운 ‘골칫거리’ 같은 것은 아닐까?
뉴욕의 아름다운 풍광과 서정적인 재즈의 선율과 더불어 영화에서 가장 매력적인 부분은 아마도 주윤발과 종초홍의 풋풋한 모습일 것이다. 청순함 가득한 종초홍의 모습과 대조적으로 거친 말투와 행동 속에 묻어나는 그녀에 대한 애정, 세련되지는 않았지만 쑥스러운 듯 불쑥 내미는 손길 속에 속 깊은 배려가 묻어나는 주윤발의 모습은 ‘홍콩 느와르’ 속 큰형님과는 또 다른 매력을 선사한다.
1980년대 후반 <영웅본색> <천녀유혼> 등과 함께 변두리 삼류극장을 순례하며 몰두하던 홍콩영화 중 한편이었던 영화는 의리와 우정, 강호의 도를 논하는 남자영화들이 전성기를 누리던 한 켠에서 조용히 등장해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당시로서는 매우 예외적인 영화였다. 하지만 사실 이 영화는 당시 홍콩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다는 점에서 ‘홍콩 느와르’와 다르면서도 닮아있었다.
홍콩 느와르가 불안한 홍콩의 미래를 도심의 뒷골목 속에 담았던 것처럼, <가을날의 동화> 역시 애인을 찾아 뉴욕에 온 홍콩 여성과 ‘아메리칸 드림’을 쫓아 미국에 왔지만 초라한 빈민가에 사는 홍콩 남성의 사랑을 통해 앞 다퉈 미국으로, 캐나다로 이주했던 당시 홍콩의 모습과 불안감을 그려내고 있다. 영화는 물론 행복한 결말을 통해 ‘아메리칸 드림’의 실현과 낙관적인 미래를 이야기한다. 하지만 두 사람의 재회하는 곳이 홍콩이 아닌 이국의 바닷가 어딘가 꿈처럼 느껴지는 곳이라는 점에서 그들이 꿈꿨던 낙관적인 미래는 그저 ‘꿈’ 혹은 제목처럼 ‘동화’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DVD의 전체적인 화질은 제작년도를 감안하면 만족스러운 편이다. DTS와 DD 5.1 사운드를 지원하지만 그 효과를 체험할 만한 장면들은 그다지 많지 않다. 담담한 부록 역시 예고편 모음과 스틸 갤러리 등으로 단출한 편이다. 하지만 영화 내내 나지막하게 울리는 재즈 선율과 함께 한 폭의 수채화 같은 영화의 감성과 추억을 즐기기에는 부족함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