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1> 4월16일(일) 밤 11시20분
‘욕망의 에로틱한 대상’ 마릴린 먼로가 수많은 추종자들, 또는 모방자들을 낳았다는 건 스타로서 그녀의 지위를 감안해 보건대 당연한 것이다. 떠오르는 대로 한 장면만 예를 들어보자. 장현수 감독의 <본 투 킬>(1996). 변변찮은 노래 실력을 가진 가수 지망생이자 룸 살롱 호스티스인 수하(심은하)가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있다. 다소 어색한 면이 없지 않기에 처음엔 못 알아들을 수도 있겠지만 조금 있으면 분명 들어본 기억이 있는 노래라는 걸 알아차릴 것이다. “사랑은 돌아오지 않는 강의 여행자… 노 리턴, 노 리턴….” 노랫소리는 이제 마릴린 먼로의 탁한 목소리와 오버랩된다. <돌아오지 않는 강>은 무엇보다도 먼로가 부르는 동명의 이 노래만으로도 뇌리에 오래 남아 있는 그런 영화다. 그건 아마 페기 리가 부르는 <자니 기타>와 함께 여성이 부르는 가장 유명한 서부극 주제곡이라고 꼽아도 무방할 것이다.
골드 러시가 한창인 19세기의 캐나다 근처가 <돌아오지 않는 강>의 배경(따라서 지리적인 면에서 엄밀히 말하자면 이 영화는 서부극이 아닌 것일까?). 살인죄로 옥살이를 하고 나온 콜더는 잃어버린 아들 마크를 찾아 함께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려 한다. 하지만 도박사인 웨스턴이 콜더의 총과 말을 빼앗아가자 이 부자는 인디언의 위협에 대응할 수 없는 딱한 처지에 처하고 만다. 결국 콜더 부자는 웨스턴의 애인인 댄스홀 가수 케이와 함께 웨스턴을 찾아나선다. 뗏목에 오른 콜더 부자와 케이. 문제는 이들이 지나가야 할 곳이 ‘돌아오지 않는 강’이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로 격류가 심한 강이라는 점. 게다가 이들은 인디언들의 습격이라는 커다란 위험과도 마주해야 한다.
<돌아오지 않는 강>은 험프리 보가트와 캐서린 헵번이 주연한 <아프리카의 여왕>(1951)의 서부극 버전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한 영화다. 이 두편의 영화 모두 가파른 급류타기를 서로 가치관이 다른 남녀의 로맨스가 싹트는 ‘촉매’로 이용하니까 말이다. 거칠게 말해 자연의 가치와 문명의 가치로 대별되는 콜더와 케이가 끝내는 융화를 이루리라는 것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결말. <돌아오지 않는 강>은 그 둘을 잇는 또다른 매개로 마크라는 소년을, 그리고 부자 사이의 이해를 돈독하게 하는 요소로 ‘진정한 사나이의 가치’(뒤에서 총을 쏘는 것은 정당한가, 라는)를 설정한다. 하지만 영화의 다소 성긴 플롯은 그런 장치들을 별로 잘 활용하는 편이 못된다. 그건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는데, 어차피 <돌아오지 않는 강>은 광활한 대자연, 그리고 마릴린 먼로의 섹시한 매력에 철저히 의존하는 ‘스펙터클’ 지향의 영화이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돌아오지 않는 강>이 아직까지 꽤 유명한 것은 이 영화가 먼로를 앞세운 스타 영화(star vehicle)인 동시에 시네마스코프의 ‘잠재력’을 발견한 최초의 영화들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앙드레 바쟁은 이 영화를 가리켜 와이드 스크린이 연출에 무언가 중요한 것을 추가했다고 할 만한 시네마스코프 영화라고 언급한 적이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것 또한 옛날이야기일 뿐이다. 레터 박스 처리가 되어 있지 않은 지금의 비디오나 TV 버전을 통해 이 영화를 본다면, ‘왜 이리 오프 스크린(off-screen) 사운드가 많지?’라는 생각만 들지 않을까?
감독 오토 플레밍거
객관성의 사나이
<돌아오지 않는 강>에 대한 평가에서 이미 알 수 있는 것처럼 오토 플레밍거 감독(1906∼1986)은 특히 와이드 스크린 형태에 걸맞은 시각 스타일을 만들어내는 데 일가견이 있는 ‘테크니션’ 또는 ‘작가’(auteur)로 알려져 있다. 또한 어떤 평자들은 플레밍거의 많은 영화들이 캐릭터와 도덕적 이슈들에 대해 다소 거리를 둔 객관성을 유지한다는 점에 주목하기도 한다. 바로 그런 관찰자적인 객관적 톤으로 인해 그의 영화들은 논쟁을 유발할 만한 주제들을 다룸에도 불구하고 멜로드라마적인 경향에 여간해서는 잘 빠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60년대 들어 영국의 영화평론가들로부터 뛰어난 ‘작가’ 대접을 받게 되는 플레밍거는 대학 때 법학을 전공한 학생이었다. 오스트리아 태생인 그는 독일의 연극연출가인 막스 라인하르트의 조수를 지내면서 연기와 연출에 대해 배웠다. 35년에 브로드웨이에서 첫 무대극을 연출한 그는 20세기 폭스사에 취직해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비록 30년대 후반에 영화사에서 해고당해 브로드웨이로 돌아가기도 했지만, 40년대 초에 할리우드로 돌아와 다시 영화를 만들었다. 당시 플레밍거의 최고작으로 평가받는 작품은 <로라>(1944). 원래는 루벤 마물리언이 연출을 맡기로 된 작품이었지만 그가 물러나면서 플레밍거가 대신 들어와 필름 누아르의 걸작을 만들어냈다. 플레밍거는 특히 논쟁적인 이슈들과 빅 이슈들을 영화로 다룬 것으로 유명한데, 예컨대 프랭크 시내트라가 주연한 <황금팔을 가진 사나이>(1955)는 마약 중독이라는 주제를 다룬 최초의 메이저 할리우드영화로 언급된다. <살인의 해부>(1959) <영광의 탈출>(1960) <충고와 동의>(1962) <버니 레이크의 실종>(1965) 등이 플레밍거의 대표작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