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의 풍경은 큰 변화가 없다. 번화가엔 높은 굽의 구두에 카우보이 모자, 헐렁한 루즈삭스를 신은 여고생들이 여전히 거리를 누빈다. 번잡한 시내를 벗어나 호텔 회견장에 들어서니 연애만화 같은 한쌍이 기다리고 있었다.
<4월 이야기>의 이와이 순지 (38) 감독과 배우 마쓰 다카코(松たか子, 22). 배우, 감독이 아니라 오누이 같기도 하고, 진짜 ‘연인’처럼 꼭 어울리는 분위기라 해야 할까. 이와이 순지 감독은 약간 몽롱한 눈동자에 느린 말투로 인터뷰에 응했다. 질문을 던지는 상대방의 시선을 물끄러미 응시하면서. 최근엔 극장용 영화보다 뮤직비디오에 치중하는 느낌이다. 일본을 방문하고 있을 당시 공중파 TV에선 감독이 인기 그룹 Glay의 뮤직비디오를 작업하게 되었다는 소식이 연예계 뉴스로 다뤄지고 있었다. 마쓰 다카코 역시 승승장구. 지난해에 <선보고 결혼하기>라는 드라마에 출연했는데 방송사에서 연기상을 받는 등 부산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짧은 시간에 이루어진 인터뷰는 일반적인 질문들로 채워질 수밖에 없었지만, 그들의 ‘예쁜’ 인상은 뇌리에 깊이 각인되었다. 하늘에 벚꽃이 흩날리는 4월, 도쿄서 만난 베스트 커플.
-감독의 <러브레터>는 한국에서 이제까지 개봉한 일본영화 중 가장 흥행성적이 좋다. 소감이 어떤가.
이와이 | 기쁜 일이다. 영화를 개봉하기 전엔 과연 한국에서 어떤 반응을 얻을지 은근히 걱정했다. 기대보다 좋은 성적을 거둬서 다행이라고 여긴다. 우연히 이런 프로그램을 본 적 있다. 일본 공중파 텔레비전에서 방송한 것인데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이 내 영화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있었다. ‘<러브레터> 같은 영화를 우리가 못 만들 리 없다.’ 정도의 내용이었던 것 같다. 대통령마저 내 영화를 알고 있다는 사실이 감동스러웠다. 기분좋은 일이다.
-한국엔 이와이 감독 팬이 많다. <4월 이야기>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부탁한다.
이와이 | <4월 이야기>는 <러브레터>보다 몇년 뒤에 만들었는데, 새롭게 해보자는 기분으로 만든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대단한 의미는 없다. 방에 걸어두고 싶은 한폭의 그림 같은 영화 정도로 생각해달라. 요즘 한국과 일본은 점차 하나의 문화권이 되어간다는 인상이 짙다. 일본에서 만든 영화지만 한국 젊은이들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영화일 것이다.
-배우 입장에서 <4월 이야기>를 말한다면.
마쓰 | 나 자신이 10대를 마감할 무렵에 찍은 영화다. 최소한의 스탭으로 만든 영화라 촬영장에선 늘 힘든 부분이 있었다. 하지만 따뜻한 분위기에서 만든 영화라는 자부심이 있다. 이와이 감독과는 <4월 이야기>로 처음 만났지만 신뢰할 수 있는 연출자였다. 뭐라고 할까. 영화를 시작하기도 전에 감독은 이미 <4월 이야기>의 모든 것을 머릿속에 지니고 있는 듯했다. 그래서 믿고 일할 수 있었다. 감독이 말했듯,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동세대 젊은이들이 공감할 수 있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감독이 <4월 이야기>에서 특별히 의도한 게 있다면 무엇일까.
이와이 | 난 영화에서처럼 고향을 떠나 다른 곳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요코하마라는 곳에서. 그리 많지 않은 나이에 혼자서 생활 전부를 책임졌던 거다. 멋진 일이었다. 그런 기분을 영화에 고스란히 담고 싶었다. 마치 인생이 처음 출발하는 순간을 화면에 담고 싶었다고 할까.
-마쓰 다카코를 주연배우로 캐스팅한 이유가 궁금하다.
이와이 | 음, 다른 이유보다 평소 좋아했던 배우니까. <4월 이야기>는 실제 도쿄에서 4월에 촬영한 영화다. 평소 마쓰 다카코의 이미지를 좋아했고 이런 배우라면 꼭 한번 같이 일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다.
-감독은 평소 순정만화 같은 영화를 많이 만드는 편인데.
이와이 | 순정만화를 좋아하는 편이다. 물론 다른 방식의 영화를 만든 적도 있다. <러브레터>나 <4월 이야기>가 내 영화세계의 전부라고 여기진 않는다.
-배우로서 영화에 특별히 담고 싶었던 게 있었나.
마쓰 | 글쎄. 영화를 보면서 관객 역시 ‘아, 나 역시 이런 기분 느낀 적 있어’라는 반응을 보였으면 좋겠다. 누구나 나이를 불문하고 사람을 만나 가슴이 두근거렸던 체험이 있을 터다. 그런 추억을 조금이라도 되살리면서 극장에서 나올 수 있다면 만족한다. 관객 역시 영화를 보면서 마음이 슬며시 움직이고 무언가 느낄 수 있다면 나로서도 흡족할 것이다. (웃음)
솔직히 말하겠다. 두 사람을 한꺼번에 인터뷰했지만, 이와이 순지에겐 무심한 편이었다. 마쓰 다카코에게로 자꾸만 시선이 향했으니까. 단아한 인상에 곧은 태도, 사람을 ‘기분좋게’ 만드는 미소를 지을줄 아는 여배우였다, 그녀는. 마쓰 다카코의 부친 마쓰모토 고시로는 일본에서 이름난 가부키 배우. 대대로 가부키를 연기하는 집안인데 그녀의 오빠 역시 일본에서 가부키 배우 겸 영화배우로 활동중이다. 마쓰 다카코가 연예계에 데뷔했을 적부터 일본에선 꽤 화젯거리가 되기도 했다. 집안 내력이 좋은 홍보수단이 된 셈이다. 마쓰 다카코는 신세대의 발랄함과 청순한 이미지를 겸비했다. 트렌디 드라마 <러브 제너레이션>에서 독립심 강한 ‘리코’라는 여성을 연기해 신드롬을 일으켰다. CF모델과 가수로도 활약중이다. 발라드 계열의 노래를 주로 부르는데 작사, 작곡을 겸하면서 남다른 재능을 과시하고 있기도 하다. 최근 발매된 싱글은 <언제나, 벚꽃의 비(雨)>. 마쓰 다카코는 이와이 순지의 <4월 이야기>에서 첫사랑을 찾아 용감하게 도쿄로 상경한 여학생을 연기했다. ‘사랑의 기적’ 운운하면서 말이다. 실제로 사랑의 기적을 믿느냐는 우문에, 그녀는 “네!”라고 크게 대답해 대기하던 매니지먼트 스탭들이 함빡 웃음을 짓게 만들었다.
-영화에서 특별히 좋아하는 장면이 있다면.
마쓰 | <4월 이야기>의 거의 끝장면이다. 평소 짝사랑하던 학교 선배와 만난 뒤 비를 맞는 장면이다. 선배가 여러 가지 우산을 가져와 일일이 펴가면서 골라주는 대목이다. (웃음) 빨간색도 있고, 여러 색이 섞인 우산도 있고. 한 사람의 여자로서 가장 행복한 기분을 느끼는 순간이 그런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그래서 제일 좋아하는 장면이다.
- 영화 속 캐릭터가 실제 성격과 흡사한가.
마쓰 | <4월 이야기>를 작업하면서 감독이나 다른 스탭들이 참 자상하게 대해줬다. 영화를 찍기 전엔 과연 이 영화가 나에게 꼭 맞는 영화일지 의심스럽기도 했는데 스탭들의 정성에 깊이 감동했다. 지금와서 보면, 영화를 찍을 당시 난 잠시 우즈키라는 인물이 되어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영화를 찍은 배경도 실제 4월이었기 때문에 영화에 동화될 수 있었다.
-영화 출연은 두 번째인데 자신의 연기를 자평한다면.
마쓰 | 영화는 텔레비전 드라마처럼 그때그때 모니터를 하기 힘들다. 완성본만 갖고 사후적으로 평가할 수 있기 때문에 나중에 후회해도 별 소용없다. 그래서 촬영할 때마다 순간순간 최선을 다한다는 생각으로 임했다. 여유가 없는 작업이긴 했지만 참 신선한 체험이기도 했다. 어쩌면 내 짧은 연기인생에서 최고의 순간에 찍은 영화일지도 모른다는 자격지심이 들기도 한다.
-이와이 순지 감독 영화에 대해 평소 좋은 느낌을 갖고 있었나.
마쓰 | 감독의 작품은 사실 <4월 이야기>를 찍기 전엔 본 영화가 없었다. 처음 본 것이 CF였는데 그랜드피아노가 등장하는 CF였다. 평소 피아노를 좋아하기 때문에 특별히 기억에 남았다. 보면서 화면이 참 아름답다고 생각했었다.
-영화에서 직접 피아노를 연주하기도 했는데.
마쓰 | 유치원 때부터 연주했다. 중간에 쉰 경험도 있지만 아직도 피아노 치는 걸 즐기는 편이다.
이와이 순지 감독은 전형적인 미소년형이다. 30대 후반의 나이인데도 얼굴 표정이나 헤어스타일은 청년의 그것이다. 상대편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태도도 호기심어린 소년의 얼굴이다. 이와이 순지 감독의 프로필은 더이상의 설명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뮤직비디오와 텔레비전 드라마, 극영화를 오가며 바쁘게 활동중이다. 영화에 관한 글도 틈틈이 쓰는데 에세이를 단행본으로 낸 적도 있다. 음악에도 소질이 있어 작업하는 영화음악에 많은 부분 관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래서인지 이와이 감독의 영화에 입혀지는 음악은 늘 같은 빛깔의, 화사한 선율일 경우가 많다. 이와이 감독은 <4월 이야기>에 나오는, 벚꽃이 눈송이가 날리듯 떨어져내리는 장면을 “다른 효과없이 자연풍경 그대로 찍은 것”이라고 한다. 그의 영화는 늘 기억의 여린 부분을 건드린다. 첫사랑, 누군가를 만나는 들뜸, 그리고 상실의 아픔까지. 만화에서 음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지닌 ‘감성파’ 감독인 탓에, 이와이 순지와의 문답과정은 유쾌한 시간이었다.
-감독의 영화를 보면 재미난 주변 캐릭터가 많은 편이다. <러브레터>에서도 학창 시절의 주변 캐릭터가 그렇고, <4월 이야기>도 비슷하다.
이와이 | 평소에 주변 사람들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하는 편이다. 재미난 캐릭터가 있으면 잘 봐뒀다가 영화에 반영하곤 한다. 사람들을 관찰하는 게 버릇이라고 할까.
-시나리오에서 영화 편집까지 도맡아 하는 편인데.
이와이 | 학창 시절부터 이런저런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뮤직비디오 스타일로 음악을 깔고 거기에 화면을 입히는 일부터 시작했다. 그때 직접 콘티에서 편집까지 도맡아 했던 버릇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것 아닌가 싶다. 스스로 영화를 만드는 데 있어 하나의 스타일로 굳어버린 느낌이다.
-<4월 이야기>를 보면 영화 속 영화로 사무라이들이 나오는 시대극이 있다. 직접 찍은 영화로 안다.
이와이 | 이 영화를 위해 직접 만든 것이다. 의미는 없는데. (웃음) 다른 감독들은 영화 속 영화를 다른 감독들의 작품으로 대충 집어넣곤 한다. 난 좀 다르게 해봤다. 낯선 화면이 갑자기 나올 때 관객의 반응이 궁금했다고 할까. 관객이 꽤 지루해 하는 것 같았다. 의미는 없다. (웃음) 하지만 나름대로 애착이 가는 장면이긴 하다. 다음 영화는 시대극을 만들기로 잠정적으로 예상하고 있는데 아직 확정된 건 없다.
-영화에서 굳이 무사시노라는 지명을 택한 이유는.
이와이 | 일본인들에게 무사시노라는 지명은, 특히 도쿄에 사는 사람들에겐 특정한 지명보다 일반적인 의미가 있다. 그냥 시의 외곽을 뜻한다. 그러면서 어떤 그리움의 대상이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감독은 평소 만화도 즐겨볼 것 같은데. 추천작을 꼽아 달라.
이와이 | (한참 생각하다가) 글쎄…, 뭐가 있나. <슬램덩크>가 있고 <미야모토 무사시> 정도? 특별하게 큰 애착을 갖는 만화가 많은 편은 아니다.
마쓰 | 만화보다는 영화를 좋아한다. 어려서부터 영화를 즐겨본 편이다. 좋아했던 영화를 꼽으라면 펠리니 감독의 <길> 정도 아닐까. 여배우 줄리에타 마시나의 연기가 좋았다. 몸짓만으로 삶의 고통과 안타까움을 관객에게 전했기 때문이다.
- 배우로서 드라마와 영화, 어느 쪽이 매력있나.
마쓰 | 글쎄. 그저 좋은 기회가 있을 때 일을 하자는 주의다. 눈앞의 일을 하나하나 해결해가는 게 제일 좋은 방법 아닐까. 감독이 생각하는 나의 이미지가 배우로서 도움이 된다면 언제든 영화를 할 용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