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배우는 하루 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혈의 누>의 박용우
2005-05-19
글 : 박은영
사진 : 이혜정

박용우는 기본이 삼세번이다. 대학도 삼수해서 들어갔고, 탤런트 시험도 세 번째 붙었다. 운이 잘 따라주는 편은 아니었다. 그래도 지난 몇년은 좀 심했다. 1년 가까이 참여한 <무사>에서 그가 맡은 역관의 캐릭터는 시간문제로 상당 부분이 편집됐고, 그뒤 2년 반 동안 찍고 기다리기를 반복한 영화 <스턴트맨>은 85% 촬영이 진행된 상태에서 제작이 중단됐다. 실은 아직도 공식적으로 ‘중단됐다. 미안하다’는 통보가 없는 채다. 그는 “<다이 하드>풍의 코믹 액션”이라는 이 작품에 쏟아부은 시간과 열정에 속이 많이 상해 있다. “마냥 기다렸죠. 연기 아니면 할 게 없다고, 최면을 걸었어요. 그래도 감사한 건 생활이 어려울 정도로 일이 끊기진 않았다는 거예요. 남보다 고생했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무미건조한 삶이 지겨워서, 영화로 꿈을 꾸기 시작한 거고, 탤런트 시험 붙을 때까지 친 거고, 중요한 역할 맡을 때까지 기다린 거고, 인정받을 때까지 노력하다보니 여기까지 오게 된 것 같아요.”

요즘 인터넷에서 <혈의 누> 관련 정보를 검색해보면, 가장 많이 딸려 올라오는 기사가 박용우에 관한 것이다. 박용우의 재발견, 늦깎이 스타 탄생, 뭐, 이런 얘기들이다. 하긴, 그가 97년 <올가미>로 데뷔한 이래로 <씨네21>에서 인터뷰를 청한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박용우는 밀려드는 인터뷰 요청이 어리둥절하면서도 서운한 눈치다. “섭섭한 마음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죠. 전에도 열심히 했거든요. 열심히 안 했던 작품이 없었어요. 그런데 역시 센 역할, 돋보이는 역할을 해야 알아주더라고요. 다른 모습을 보여주려는 노력은 전에도 했거든요. <무사> <무인시대> <애정의 조건> 역할들이 매번 달랐고요, 그 연장선상에 <혈의 누>가 있는 거죠. 제가 은둔해 있다가 나타난 건 아니잖아요. 상대를 죽여야 내가 산다, 이런 단편적인 기준으로 작품을 고르고 싶진 않은데, 이번에 인정받은 것도 역할의 임팩트 때문인 것 같아서, 씁쓸한 기분이 들기도 해요.” 어쨌거나 <쉬리> 이후 서로 소원했던 송강호 선배나 <올가미>의 인연으로 <스턴트맨>을 함께했던 김성홍 감독의 축하 전화에 ‘정말 반응이 좋긴 하구나’ 실감하는 이즈음이다.

<혈의 누>에서 박용우는 연쇄살인사건의 중심인 제지소의 실권자 김인권이 되어, 사건 해결을 위해 섬으로 흘러들어온 수사관 원규 역의 차승원과 팽팽한 전선을 이뤘다. 온화하고 지적인가 하면, 냉정하고 날카로운 일면을 드러내는 등 극이 끝나는 순간까지 여러 번의 껍질을 벗는 복잡다단한 인물이 되어, 그는 정교한 연기와 날선 카리스마를 선보였다. “원래 인권은 사연이 많아요. 초기 시나리오에는 서자 출신이고, 원규와 친구 관계라는 설정도 있었거든요. 연기하는 입장에선 역할에 대한 설명이 좀더 많았으면 하는 욕심이 있지만, 극을 빠르게 끌어가려면 포기해야 하는 부분이죠. 감독님이나 저나 역할에 대한 부담이 컸기 때문에 합의점을 찾기까지 언쟁을 벌이기도 했어요. 한컷한컷 디테일에 신경을 쓰면서 했고요.” 그가 김인권이 될 수 있었던 건 드라마 <무인시대>에서 경대승 역을 맡아 보여준 호연 덕이었다. 평소 TV를 잘 보지 않던 김대승 감독은 우연히 “어이, 대승” 하는 대사를 듣고 <무인시대>를 보기 시작하면서, 박용우를 염두에 두었고, 마침 이 드라마의 팬이었던 강우석 감독의 찬성표를 받았다. “이 친구라면, 이런 에너지를 가진 배우라면, 김인권을 맡길 수 있겠다 하셨대요.”

이전 영화에서 박용우의 주된 이미지는 ‘뺀질이’였다. <올가미>에서 고부 갈등을 부추기는 마마보이로 조짐을 보이긴 했지만, <쉬리>에서 ‘낙하산’으로 불리는 신참 요원에서 그 뺀질함의 활개를 펴는가 싶더니, <무사>에서 잔머리 굴리는 역관으로 절정을 이뤘다. 그런데 <혈의 누>가 개봉되기 전에, 홍보차 거쳐간 오락 프로에서 박용우는 ‘다른’ 모습을 보여줬다. 방송 경험이 많고 넉살이 좋은 선배 차승원 옆이어서 그랬을까. 유난히 수줍음을 타 보이는 그에게 방송 내내 ‘순수 청년’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좀 헷갈린다. 박용우는 대체 어떤 사람일까? “오락 프로에선 낯선 사람들에 둘러싸이다보니 완전히 날 버리고 임해요. 인터뷰는 중간 단계인데, 많이 진지해지죠. 연기로 들어가면, 피곤해질 정도로 예민해져요. 평소엔 누구랑 함께 있느냐에 따라 달라지는데, 친한 사람하고 있을 땐 애같이 굴지만, 예를 갖춰야 하는 자리에선 나이보다 어른스럽게 행동해요. 강호 형이랑 승원이 형요? 제가 술자리에서 도망을 잘 안 가요. 그래서 예뻐하는 거겠죠. 제가 보는 전, 좀 엉뚱하고, 바보 같아요. 여자 쳐다보다가 앞차 들이받은 적도 있고요, 자살골 넣고 혼자 좋아하고요. 농구에서 자살골 넣는 사람 보셨어요?”

방송과 영화쪽에서 심심찮게 섭외가 들어오고 있지만, “지금은 최대한 신중하고 싶다”면서 선택을 유보하는 중이다. 말끔한 외모 때문에 한동안 멜로 이미지에 갇혔던 박용우는, “다른 역할이 절박해서” <무인시대>를, <애정의 조건>을, <혈의 누>를 택했다고 전한다. “이번 작품을 하면서 확실히 느낀 게 있어요. 연기를 떠나 인간관계를 원활히 해야겠다는 거죠. 제가 말을 잘 안 하거든요. 자기를 이해시키고 남을 설득하는 능력이 중요하더라고요. 사람들은 인기있는 배우에겐 마음을 먼저 열고 다가가지만, 그렇지 않은 배우에게까지 그러진 않거든요. 먼저 마음을 열고, 남에게 나를 알리는 건, 연기의 영역을 벗어나는 일이 아니었어요.” 박용우는 조금도 들뜬 기색없이 공약을 내걸듯 앞으로 자신이 해결해야 할 과제가 이런 것이다, 알리는 걸 잊지 않았다. 바라는 건 많지 않았다. 선택의 폭이 조금 넓어지길, 꾸준히 작품을 할 수 있길 기대할 뿐이다. “좋은 작품에 대한 굶주림이 워낙 심했거든요.” 좋은 작품으로 더 자주 만나자며, 껄껄 웃던 그의 웃음이 잔향처럼 오래 스튜디오를 떠돌았다.

스타일리스트 이현정·의상협찬 GENGY HOMME, 페리 엘리스, Calvin Klein Jea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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