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티(룻거 하우어)는 전투용 리플리컨트(복제인간)이다. 자신이 한낱 한시적 소모품임을 깨달은 배티는 자신을 만들어낸 타이렐사의 회장을 찾아가 생명의 연장을 요구한다. 이때 그들이 서로를 부르는 말이 인상적이다. 배티는 회장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회장은 그를 ‘돌아온 탕아’(the prodigal son)라고 표현한다. 아버지가 불가능한 요구라고 일축하자 탕아는 그에게 절망적인 키스를 퍼붓고는 그를 살해한다. 성서적 함의가 풍부하고 부친살해의 모티브를 절정까지 밀어붙인 명장면이다. 이 장면의 의미를 좀더 확장시켜 볼 수는 없을까? 가령 배티가 인간이고 타이렐사의 회장이 조물주인 신이라면?
데커드(해리슨 포드)는 통제에서 벗어난 리플리컨트들을 제거하는 특수경찰(블레이드 러너)이다. 그는 자신의 임무에 충실하지만 시시각각 회의에 휩싸인다. 리플리컨트와 인간 사이의 차별성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오욕칠정을 모두 갖춘 존재라면 도대체 리플리컨트와 인간은 어떻게 다른가? 기억조차 이식시키는 것이 가능하다면 내가 리플리컨트가 아니라는 확신을 어떻게 가질 수 있는가?
<블레이드 러너>는 미국 개봉 당시 흥행과 비평 양면에서 모두 철저히 외면당한 불운한 작품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저주받은 걸작’들이 그러하듯 이 작품 역시 세월이 흐를수록 그 진가를 인정받아 오늘날에는 SF누아르를 대표하는 컬트영화로 확고히 자리잡았다. 이 영화의 현란한 비주얼이야 물론 프로덕션 디자이너 출신의 감독 리들리 스콧의 공로이겠지만, SF에 실존철학적 질문을 담아내어 그 장르를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린 공로는 온전히 작가인 데이비드 웹 피플스의 몫이다. 실제로 SF영화사를 <블레이드 러너> 이전과 이후로 구분하는 영화사가도 있다.
그가 쓴 또다른 수정주의 장르영화의 걸작이 <용서받지 못한 자>. 실제로 이 작품이 탈고된 것은 <블레이드 러너>가 발표되기 6년 전인 1976년이었으니 영화화하는 데만 무려 16년이 걸린 셈이다. 그만큼 불운한 작품이었다는 뜻도 되고 그만큼 피플스가 시대를 앞서 나간 작가라는 뜻도 된다. <용서받지 못한 자>는 웨스턴의 참회록이다. 고전적인 스토리텔링의 틀을 유지하면서도 계속 허를 찌르는 캐릭터와 스토리로 웨스턴의 컨벤션을 철저히 해체시킨 솜씨가 일품이다. 과거 마카로니 웨스턴으로 세계를 제패했던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이 영화의 주연과 감독을 맡았다는 사실 자체가 멋진 반전이요 통렬한 패러독스다. <용서받지 못한 자>와 <블레이드 러너>는 둘 다 내가 개인적으로 꼽는 영화 베스트10에 속한다. 이 두 작품을 겹쳐놓으면 전혀 엉뚱하게 들리지만 쉽사리 대답할 수 없는 기이한 질문이 형성된다. 과연 데커드는 용서받을 수 있을까?
데이비드 웹 피플스는 버클리의 캘리포니아대학을 졸업한 뒤 거의 20년 동안 필름을 자르고 붙이는 일에 전념해온 편집자 출신이다. 유일한 감독작품 <영웅의 피>나 <어비스>(1989)의 버전다운판인 <레비아탄>은 다소 격이 떨어지지만, <리틀 빅 히어로>나 <12몽키즈>는 그의 주특기인 장르영화 비틀기와 음울한 철학적 질문이 비교적 잘 살아 있는 작품들. 그러나 액션 과잉의 SF <솔져>나 브루스 윌리스가 혼자 설치고 다니는 <머큐리>를 보면 아무래도 작품의 평균수준이 고른 것 같지는 않다. 흥미로운 사실은 <12몽키즈>와 <머큐리>의 크레딧을 자신의 딸인 자넷 피플스와 나눠 갖고 있다는 것. 그 이외에도 두 부녀가 공동 크레딧을 걸고 시장에 내놓은 시나리오만도 5편을 넘어서는 것을 보면 앞으로는 자넷 피플스의 활약을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