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영화]
스무살 청년의 붉은 맹세처럼,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2000-04-11
글 : 김형구 (촬영감독)

벌써 나이가 들어버린 것일까. 요즘 들어 자주 기억을 잃어버리는 버릇이 생겼다. 길에서 누군가와 마주쳤을 때 전에 함께 일했던 사람인데도 지우개로 지운 듯 이름이나 함께 한 작품이 생각나지 않거나, 1, 2년 전 일인 듯한 이야기도 남들이 상기시켜 줄 때마다 그런 일이 있었나 하곤 한다. 나도 모르는 사이 기억의 문이 하나둘씩 닫혀 가고 있다고 느끼던 며칠 전 다시금 옛 기억의 큰 문 하나를 열어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긴 겨울이 끝나고 봄을 맞기 위해 서재를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눈에 잘 띄지 않는 구석에서 소복이 먼지에 쌓여 누렇게 변해버린 영화 문법책 한권이 언뜻 눈에 들어왔다. 훅 하고 먼지를 털고 책장을 넘겼을 때 빛 바랜 책갈피 속에서 잊혀졌던 젊은 날의 기억이 아스라이 피어올랐다.

“한편의 영화가 사람을 변화시키고 그 변화된 사람들이 모여 사회를 변화시키길… 좀더 나은 사회를 위한 영화로서.”

붉은 펜으로 쓰여진 글자 한자한자 속에서 갓 스물이 넘은 청년 시절 내가 영화 속에서 진정으로 원했던 희망들이 힘차게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아마도 이 글은 처음 영화동아리에 들어가 내 마음과 똑같은 영화 한편을 발견했을 때 썼던 것으로 기억된다. 체코에서 미국으로 건너간 밀로스 포먼 감독이 만든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라는 영화에서 나는 맥 머피를 만난다. 잭 니콜슨이 열연한 맥 머피는 남들과 같지 않은 생각을 가진 것만으로 정신병원에 수용되고 그곳의 규칙에 따라 아니 그곳에서 길들여지는 대로 아무런 불만이 없는 것처럼 평온하게 지내고 있는 병원 환자들에게 그들이 무엇을 원하고 있고 또한 그것을 관철시키기 위해 대항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 맥 머피에게 자신의 실체를 밝히는 인디언 추장. 이 땅의 옛 주인이었던 인디언 추장은 더이상 이 땅의 주인이 아니고 이 사회의 부적응자이다. 마침내 맥 머피는 뇌수술을 당해 의식이 없고 이 땅의 주인이었던 인디언 추장은 그를 안락사시키고 병원의 창문을 통쾌하게 부수고 탈출해 새벽 하늘을 배경으로 달린다. 사회가 원하는 인간으로 재교육됨을 거부함으로써 의식을 거세당하게 된다는 영화 내용은 그 당시 획일화 속에서 허덕이던 내 모습을 담아낸 것 같았다.

영화를 처음 시작했을 무렵 그 나이의 청년들 누구나 그러했듯이 난 꽤 반항적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대학에 가지 않겠다고 부모님과 심하게 다투었던 것이며 뒤늦게 대학생이 돼서도 사회를 도식적이고 규율만이 팽배하는 곳으로만 치부하곤 했다. 늘 나 혼자만이 다른 생각을 가지고 외톨이로 떨어져 있다고 느끼던 내게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영화를 발견한 것은 신선한 충격이며 기쁨이었다. 또다른 곳에서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를 보고 나처럼 느끼는 사람이 더 있을 것이라는 희망도 생겼다. 그 순간 나는 처음으로 영화를 통해 다른 사람과 교류할 수 있다는 것을 느꼈던 것 같다.

또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에서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습지만 그때 당시만 해도 내가 보고 알았던 영화들은 한두명의 주인공과 그들을 통해 전개되는 이야기 구조가 전부였는데 밀로스 포먼의 영화 속에서는 모든 인물들이 상징과 은유로 각각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전까지는 주인공과 엑스트라만으로 구성된 영화를 보다가 영화에 출연하는 모든 연기자들이 다 주인공인 새로운 영화를 발견한 것이다. 실제 주인공인 잭 니콜슨뿐만 아니라 각각의 인물들이 너무나도 섬세하게 그려져 있고 그들이 영화의 구석구석을 채워 한신 한컷이 너무나도 소중하고 완벽했다. 나에게 이 영화의 가장 인상적인 신을 이야기하라면 맥 머피가 버스를 탈취한 뒤 바닷가에 도착해 낚싯배를 얻기 위해 자기 자신들을 소개하는 신이다. 이 장면은 이 영화의 백미이다. 그뒤 나는 밀로스 포먼 감독이야말로 나에게 가장 영향을 끼친 최고의 감독으로 칭하곤 했다.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는 내게 영화가 스토리텔링이 아닌 상징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또다른 방식으로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나도 이처럼 다른 영화를 만들어 보고 싶었다. 외롭게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확인시키고 그들이 모여 좀더 자유롭고 다양한 세상을 만들 수 있음을 알려주는 그런 영화를 만들어 보고 싶었다.

지금 나는 영화를 하고 있다. 시간을 거슬러보면 20년 전 한편의 영화가 내게 평생 영화를 업으로 해야 하는 의미를 알려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과연 오늘의 나는 그날의 다짐을 실천하고 있는 건지. 좀더 나은 사회를 위한 영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그저 영화만들기에만 급급하고 있는 건 아닌지. 나이 탓으로 돌린 일상의 건망증 속에서 나는 더 중요한 것을 잊고 살았던 건 아닌지. 불혹의 나이에 선 봄밤, 다시 한번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를 찾아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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