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중동포 장률(43)감독은 중국 영화계에서 매우 이례적인 존재다. 본래 소설가 출신으로 1980년대 말부터 주목받는 젊은 소설가군에 꼽혔던 그는 2001년 ‘난데없이’ 영화로 전향했다. 그는 2000년 영화를 하는 친구와 다투다가 “영화같은 건 누구나 만들 수 있다”고 홧김에 ‘지른’말을 주워담기 위해 영화를 찍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렇게 만든 단편 <11세>가 베니스영화제에 초청받았고, 2003년 만든 첫 장편 <당시>(20일 필름포럼 개봉)가 로카르노, 밴쿠버 영화제 등에서 상영됐다. 두번째 장편 <망종>은 올해 칸영화제의 비평가 주간에 소개된다. 그가 말하는 ‘어이없는’ 감독 데뷔 계기에 비하면 그 결과가 눈부시다.
중문학 교수·소설가
난데없이 영화 ‘전향’
무심코 만든 단편에
베니스·칸 들썩 “한국인 영화 만들고파”
“가장 대답하기 힘든 질문이 동기예요. 왜 소설에서 영화를 바꿨냐. 생각해보면 어릴 때부터 시각에 매우 민감했던 것 같아요. 길거리에서 무심코 스쳐간 사람을 몇년 뒤에 봐도 기억할 정도니까.” 장률 감독은 연변에서 나고 자란 재중동포 2세로 한국인이면서 중국인이다. <당시>는 중문학 교수 출신인 그의 당나라 시에 대한 애정에서 출발한 영화다. 이상한 건 영화에 삽입된 당나라 시와 영화의 내용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전직 소매치기로 낡은 아파트에서 유령처럼 폐쇄적인 삶을 살고 있는 주인공의 생활은 건조하게 그렸는데 영화 중간중간에 등장하는 시들은 삶을 찬미하고 자연을 노래한다. “당나라 시는 매우 엄격한 틀을 갖추고 있지만 내용은 자유분방하죠. 그런 충돌을 영화에 대입시켜 보고 싶었어요. 삭막한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도 벗어나고 싶다는 열망은 있거든요. 그렇지만 열망이 삶의 고독을 바꿔놓지는 못하죠.” 그는 2000년 사스가 창궐했던 베이징의 휑한 풍경을 보면서 <당시>를 구상하게 됐다고 한다. “그렇게 북적이던 거리가 조용하고 모두가 영화 속 인물처럼 집에 쳐박혀 시간을 보냈죠.” 소설을 썼던 10여 년 전부터 영화를 찍을 때까지 <당시>의 주인공처럼 늘 집안에만 있었다는 그는 영화를 만드는 것이 “고독과 싸우는 법”이라고 말했다.
<당시>는 베이징에서 찍었지만 한국 제작사에 적을 둔 한국영화다. <11세>의 필름을 들고 후반작업을 하기 위해 무작정 한국에 왔을 때 소설가 시절부터 절친하게 지내던 이창동 감독의 소개로 최두영 프로듀서를 만나게 됐다. 최 프로듀서는 장 감독과 작업하기 위해 두엔터테인먼트를 만들었고 <망종>까지 함께 작업했다. 부산영화제에서 PPP프로젝트로 선정됐던 <망종>은 김치를 담궈파는 조선족 여인의 파국을 섬뜩하게 그린 영화다. “중국 어딜 가도 김치를 파는 조선족 여성들을 볼 수 있어요. 늘 부지런하게 살지만 또 언제나 사회의 가장 하층민이죠.” 조선족 뿐 아니라 그는 언젠가 한국을 배경으로 한국인이 등장하는 영화를 꼭 찍고 싶다고 했다. “한국영화를 많이 챙겨보는데 거리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지에 관심이 가서 줄거리를 꼭 놓치게 돼요.” 삭막하고 건조한 자신의 영화와 달리 가장 좋아하는 한국영화는 <8월의 크리스마스>라고 한다. 장 감독은 <당시>에 이어 중국시 연작인 <송사> <원곡>도 준비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