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투덜거리자면 나는 미야자키 하야오에게 투덜거리고 싶다. <이웃집 토토로>를 제외하고는 나는 미야자키의 작품 가운데 대단한 재미를 느낀 게 별로 없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와 <원령공주>를 보면서는 졸았다. 시비를 걸겠다는 건 아니다. 말하자면 하야오의 작품세계는 너무 잘 나서 나를 기죽게 하고, 잠들게 한다. (말 되냐? --;;)
그의 스펙터클은 언제나 장대하고, 세계관은 언제나 심오하다. 주인공은 언제나 용감하고,(<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좀 다르지만), 관객은 언제나 깊은 감동과 진한 교훈을 얻는다. 그게 문제다. 소개팅으로 비유한다면 내 수준에 안맞게 너무 멋지고 잘 나가는 사람이라 눈물을 머금고 포기해야 하는 상대같다. 그런 비유에서 천생 내 짝은 다카하다 이사오다.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이라는 작품을 이야기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사실 감독의 외모로 따져도 지적이고 약간의 카리스마까지 풍기는 미야자키보다 농촌 스타일을 강하게 어필하며 영화 속 헤벌쭉 너구리 모드(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이 애니메이션에서 너구리들은 확연히 스타일이 다른 네가지 방식으로 그려진다)가 자신을 본따서 그린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허술하게 생긴 다카하다가 내 취향이다.
다카하다는 여러 인터뷰에서 자신을 현실주의자라고 말했고,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은 현실주의자의 이야기다. 누군가는 현실주의가 아니라 패배주의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너구리들은 지는 싸움을 한다. 애당초 그들은 이길 수 없는 싸움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목숨걸고 싸우다 장렬하게 산화하겠다는 비장감이 없다. 심각하게 대책회의를 하다가도 “누가 나설래?” 그러면 모두 자는 척을 하고, 또 그러다가 회의 끝나고 햄버거를 하나씩 돌리니 입이 찢어진다. 다양한 작전은 족족 실패하거나 무시당하고 마지막에 원로 너구리가 목숨을 바쳐가며 만들어낸 처절한 요괴대작전은 “어머, 저거 모야, 진짜 웃겨”라는 반응을 얻는다. 그래도 이들은 ‘놀면 뭐하냐’는 여유로 계속 ‘사고’를 친다. 결국 사람으로 변신해 살아가면서는 자기도 피곤에 절은 소시민인 주제에 찌질하게 살아가는 인간을 불쌍히 여기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의 너구리들은 정말이지 너무나 평범해 만약 미야자키의 캐스팅 오디션에 나갔다면 단역거리도 얻지 못할 인물들이다. 뭘 하든 시작은 창대하지만 그 끝은 미미하다. 실패를 받아들이는 방식도 “뭐, 어때”라는 식이다. 현실은 이들을 밀쳐내지만 이들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투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 행위는 역설적으로 자신의 위세를 꼿꼿이 내세운 현실의 벽을 하찮은 것으로 끌어내린다. 무엇보다 중요한 기싸움에서 너구리들은 대형 포크레인으로 무장한 인간(현실)보다 한 수 위다. 나는 이 너구리들의 현실주의를 배우고 싶다. 깨지더라도 ‘우헤헤’ 웃으면서, 놀면 뭐하냐는 생각으로 세상에 ‘개기면서’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