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 온 더 브릿지>는 불행에 관한 영화다. 그런데 파트리스 르콩트 감독이 생각하는 불행이란 남녀가 서로의 짝을 찾지 못하는 데서 온다. “난 아예 불행 자체니까요”라고 말하는 창녀 아델은 난간에서 흐르는 강물을 바라본다. 그녀의 말을 빌리면, 자신은 ‘역’과 같은 존재다. 수많은 남자들이 다가왔지만 누구도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런 그녀에게 신념으로 행운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남자 가보가 찾아온다.
사실 파트리스 르콩트 감독의 주인공들은 언제나 새로운 행복을 찾아나설 준비가 되어 있다. 창녀 아델은 한 남자에게 만족하지 못하고, 공연을 가는 곳마다 남자들에게 추파를 던진다. 왜냐하면 아무도 그녀에게 만족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랑한다면 이들처럼>에서도 마찬가지다. 충만한 사랑의 기쁨을 나눈 뒤 물건을 사러간 여자는 강물 속으로 뛰어든다. 그녀가 자살한 이유는 이제 둘 사이에는 행복의 절정보다는 ‘하강’만이 남았기 때문이다. 행복해지고 싶은 남녀, 그러나 행복해질 수 없는 운명. 집요하게 그의 전작들을 연결하는 고리다.
하지만 진리는 단순하다. 과거의 영화 속에서 해답을 찾지 못했던 감독은 이제야 가보의 입을 빌려 하나의 에피소드를 들려준다. 자신은 어렸을 적 이웃집의 모습을 항상 부러워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이웃집은 우리집을 부러워했다는 것이다. 방금 만난 그리스 남자와 함께 떠나려는 아델에게, 가보는 행복은 자기 안에 있음을 은유적으로 들려준다. 사실 안과 밖의 경계는 영화 속에서 반복적으로 상징화된다. 예를 들어, 난간 밖에서 바라본 센강이 그렇게 아름답게 비춰진 것도, 사람들은 쓰디쓴 현실의 다리 안쪽보다는 난간 너머에 무언가가 있다고 꿈꾸기 때문이다. 그러나 난간 밖은 죽음일 뿐이다.
명암대비가 강렬한 흑백의 화면, 프랑스 특유의 시적인 대사 그리고 사랑에 관한 르콩트 감독의 독특한 해석이 개입한 <걸 온 더 브릿지>는 99년 프랑스를 대표하는 영화 중의 하나다. 특히 같은 이야기를 조금씩 변주하는 묘미와 사랑의 판타지를 엮어내는 유머넘치는 화술은 당대 프랑스 감독 중 단연 으뜸이다. 영화 속에서 칼 던지기 쇼는 세상에 내던져진 남과 여가 ‘섹스’를 나누는 명백한 은유이고, 남녀 사이의 우연을 필연으로 바꾸고 운명을 신념으로 뒤흔드는 사랑의 해석은 메마른 현대인들의 감성에 울림을 준다. 특히 어린 나이에 데뷔해 유럽을 뒤흔들었던 요정 샹송 가수 바네사 파라디의 묘한 매력과 눈빛으로 사로잡는 다니엘 오테이유의 연기는 프랑스 최고의 ‘남과 여’를 엮어낸다. 감독의 찬사 그대로, 이 영화의 주인은 바로 등장인물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파트리스 르콩트는 이 모든 것을 마치 현란한 서커스처럼 빠르게 엮어놓는다. 그러나 정작 영화의 시작은 재판정에서 자신의 과거를 진술하는 듯한 아델의 클로즈업이다. 운명의 사건이 시작되기까지 아델은 자신을 거쳐간 남자들과 불행에 관해 이야기한다. 마치 뒤에 등장하는 가보와의 만남은 하나의 꿈 아니면 어딘가에 묶여 있는 기억과도 같다. 그렇다면 우리는 한 여자의 꿈, 아니면 행복을 꿈꾸는 운명적인 사랑이야기를 함께 꿈꾼 것은 아닐까. 사실 영화가 단박에 이해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관음주의적이고, 신파적인 요소들이 머리로 영화를 받아들이기에 어렵게 만든다. 하지만 영화의 틈새들을 힘이 넘치는 비약과 사랑의 대화들로 채워놓는 그의 방식은 누벨바그의 전통과 맥을 이으며, 이야기 자체보다는 이미지를 앞에 놓는다. 그래서인지 지중해를 사이에 두고, 남녀의 대화를 마치 텔레파시처럼 교차 편집하는 황당한 장면도 자유롭고 감미롭다. 이 모든 것에는 바로, ‘남과 여’라는 단단한 하나의 끈을 상정한 것인데, 강박적이고 한편으로는 상투적이지만, 시적인 비약과 상상력으로 인해 90분이라는 시간은 남과 여의 운명에 관한 놀라운 향연으로 충만하다.
감독 파트리스 르콩트
사랑에 관한 기나긴 탐구
사랑에 관한 남다른 해석을 보여주는 파트리스 르콩트 감독은 90년대 초반부터 대중적이면서도, 비평적인 찬사를 동시에 받아온 독특한 감독이다. 그는 프랑스영화들을 주대상으로 하는(우리의 대종상과 비슷한) 세자르영화제의 단골 손님이기도 하다. 그의 대부분의 작품들은 감독상에 노미네이트되었으며, 급기야 97년에는 <조롱>이라는 작품으로 세자르영화제 최우수 감독상과 작품상을 거머쥐었다. 당시 베르트랑 타베르니에와 공동 수상을 하게 되어 좀 불쾌감을 표시하기도 했는데, 96년 최고의 프랑스영화로 선정된 <조롱>은 49회 칸영화제의 오프닝을 장식하기도 했다. 배경은 루이 16세가 마지막으로 베르사유궁의 주인으로 행세하며 프랑스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며 부도덕한 궁정생활을 할 시기에, 굶주린 농부들과 격리된 이 사치의 공간에선 말 한마디로 상대방을 몰락시키는 말장난 게임이 유행했다. 영화의 소재는 바로 이 말장난 게임. 그런데 독특한 소재로 프랑스의 역사를 재해석한 이 작품은 르콩트의 작품군에서는 의외다. 사실 90년대의 대표작인 <사랑한다면 이들처럼>(1990)이나 <살인혐의>(1989)를 보면 남과 여의 사랑과 이별에 관한 독특한 해석으로 관객을 당혹시켜왔다. 93년도에 완성한 <탱고>에서는 ‘마누라 죽이기’를 결심한 남자들의 여행을 소재로 삼았다. 코믹하지만 역시 주된 정조는 남녀의 사랑이다. 국내에서는 크게 소개된 적이 없지만 그의 주요작품들은 이미 비디오로 출시됐다. 좀 찾기 힘든 것도 있지만, 이 사랑의 곡예사가 펼치는 사랑이야기는 한번쯤 들어두면 좋은 파르마콘(독약이자 치료약)이다. 파리 태생인 르콩트는 원래 만화작가로 출발했으며, 아마 상상력이 자유롭게 느껴지는 것은 만화의 작업 탓일 것이다. 처음에는 주로 상업적인 작품들로 일관했지만 점점 그의 예술적 재능을 발휘하는 중이다. 최근에는 프랑스의 비평가들과 설전을 벌일 정도로 입김이 센 감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