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에서 어른들은 속수무책으로 아이들의 병 앞에서 나뒹군다. 어른들은 그저 울 수밖에 없다. 그에 비한다면 아이들은 할 수 있는 게 더 많다. 아이들은 낯선 서로의 환경을 넘으며 친구로 길들어진다. 병이 죽음을 가져올 수는 있지만, 아이들의 성장과 사귐을 가로막을 수는 없다. 아이들이 자신의 힘으로 커간다는 얘기로 읽는다면, 이 영화는 흔치 않은 성취를 거둔 셈이다.
이상한 일이다. 어른들이 없어도 아이들은 자란다. 그리고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는 꼭 초등학교만은 아닌 것 같다. 병에 걸려도 아이들은 자라며, 병원도 아이들의 훌륭한 학교가 된다. 아니 이 말은 틀린 말일 것이다. 아이들은 병을 거쳐 더 웃자란다. <안녕, 형아>는 자연스럽지만 잘 드러나지 않은 이런 이상한 진실을 보고하는 영화다.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병에 걸리고 죽는다는 자연현상은 얼마나 잔인하며 또 동시에 자연스러운가. 그러나 이 진실이 어린이에게도 예외없이 해당되는 것이라고 믿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이것이 우리가 전혀 모르는 일도 아니며, 익히 TV 다큐멘터리물에서 다룬 것이라 새로운 일도 못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가 관객의 눈물을 쏙 빼서 장사를 해보려는 나쁜 의미에서의 상업영화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품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최루성 상업영화라기보다는 아이들의 성장영화다. 그것도 어른의 역할보다 아이들의 역할을 더 크게 묘사한 어린이를 위한 성장영화다.
착하고 의젓하고 세심한 형 한별(서대한)은 언젠가부터 구토 증세가 심해지고 눈이 잘 보이지 않는다. 같은 초등학교에 다니는 한이(박지빈)는 말썽꾸러기 대장에 형 괴롭히기, 노래부르고 춤추기, 힐리스(운동화 뒤꿈치에 바퀴를 단 운동화) 타기, 유희왕 카드 모으기가 취미이다. 한별이 뇌종양 판정을 받고 병원에 들어가자 엄마(배종옥)와 아빠(박원상) 그리고 한이 가족은 깊은 근심에 빠진다. 한별이의 중병에 가족들은 서로 다른 반응을 보인다. 엄마는 아이가 차 안에 구토를 했을 때 혼을 낸 것, 아파서 학원 빼먹은 걸 거짓말했다고 회초리로 때린 것에 대에 후회한다. 아들이 아팠을 때 우리 부부는 도대체 뭘 했느냐는 자책이다. 아빠는 어디론가 억울함을 풀고 싶지만 어디 마땅하게 풀 데가 없다. 한이는 가족의 모든 관심이 형에게로 가고, 아버지는 형을 괴롭히면 때려주겠다고 협박까지 하니 화가 치민다.
김은정 작가와 임형태 감독은 한이 가족을 위해 선물처럼 한명씩 사람을 보낸다. 첫 번째 선물은 한별과 함께 소아암병동에 입원한 욱이(최우혁)다. 한이 형제가 낯을 가리는 배타적인 성격임에도 욱이는 뻔뻔하게 이들에게 손을 내민다. 부모가 모든 것을 아낌없이 지원해주는 중산층 어린이였던 한이 형제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개그맨 지망생 욱이의 매력에 손이 묶인다. 욱이가 건넨 따뜻한 손과 개구쟁이 같은 미소에 이들 형제는 겸손함과 우애를 선물로 내민다.
그 다음의 선물로 나오는 것이 욱이 엄마(오지혜)다. 이 영화의 명장면이라 할 화장실 장면을 보자. “아픈 아 앞에서 울믄 안 된다는 법은 누가 맨들었는가 몰라… 허구헌 날 똥냄새 맡으며 울어야 하니… 참말로… (물 찬 세면대 가리키며) 여기 얼굴 담궈 보소. 물에 담그고 울면, 눈도 안 붓고, 안 빨개져요.” 울음이 넘쳐나도 울음을 참을 수 없는 엄마의 마음이 세면대를 가득 채운 찬물처럼 객석으로 출렁거린다. 욱이 엄마와 한별이 엄마의 울음은, 아이의 중병 앞에서, 어른들이 아이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행위이다. 이 영화에서 어른들은 속수무책으로 아이들의 병 앞에서 나뒹군다. 어른들은 그저 어깨를 맞대고 함께 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에 비한다면 아이들은 어른들보다 할 수 있는 게 더 많다. 아이들은 타잔 아저씨와 <개그콘서트>에 나오는 정종철 아저씨를 흑기사로 호출하며 아픔을 잊는다. 그리고 낯선 서로의 환경을 넘으며 친구로 길들어진다. 병이 죽음을 가져올 수는 있지만, 아이들의 성장과 사귐을 가로막을 수는 없다. 아이들이 자신의 힘으로 커간다는 얘기로 읽는다면, 이 지점에서 영화는 흔치 않은 성취를 거둔 셈이다.
그런데 욱이를 빼면 아이들이 근대의 살균실에서 자란 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 수도 있다. 필립 아리에스는 오늘날의 ‘아동’이란 개념이 발명된 것이라고 말했다. 어린이란 ‘작은 어른’이 아니라 독자적인 발달 시기를 거치는 인격체란 얘기는 현대에 이르러 통설이 되었다. 근대화는 이런 과정을 매우 자연스러운 일상으로 각인시켰다. 한별이 형제는 근대가 어린이에게 베푼 모든 수혜를 다 누리고 있다. 아이들은 심리치료사 수잔 포워드가 말하는 ‘유독성부모’(상처를 입혀 아이들이 그 상처를 반복하게 만드는 부모)로부터도, 경제적 궁핍으로부터도 멀리 떨어져 있다. <해리 포터>와 <개그콘서트>와 유희왕 카드가 정말 아이들의 일상의 전부일까? 병원은 모든 정성과 의학을 다해 아이들을 돌보고 아이들은 근심없이, 병을 거쳐 정신적으로 청소년기로 진입하고 있다. 그래서 가라타니 고진이 <아동의 발견>에서 근심하는 대로, 오히려 ‘진정한 아이’를 상상하는 독재자 어른의 뜻대로 아이들이 커가는 건 아닌가 하는 쓸데없는 근심이 생기는 것이다. 만듦새가 뛰어남에도, ‘울려야 할 때 확실히 울려주지 않는’다는 불평이 비죽비죽 나오는 이유는 이 영화가 슬픔을 슬프다고 말하지 않는 ‘쿨’한 영화여서가 아니라, 이 영화를 만든 어른들이 너무 사려 깊고 경우 바르기 때문이 아닐까.
<안녕, 형아>의 이항 박사
연기에 대한 열정이 컸던 소아암 권위자
<안녕, 형아>는 아이들뿐 아니라 병원 의사들까지 모두 연기가 뛰어나다. 그중 유난히 눈길을 끄는 이는 극중 자기 이름 그대로 나오는 이항 박사다. 제작진은 소아암 병동의 할아버지 박사를 캐스팅하면서 프리 프로덕션 기간에 많은 조언을 준 이항 박사를 떠올렸다. 그는 한양대에 재직하면서 소아혈액종양학 권위자로도 널리 알려졌지만 경기고등학교 연극반 출신이 만든 화동연우회에서 연기와 연출을 하며 연극 활동도 꾸준히 해왔다. 이항 박사뿐 아니라 그의 주선으로 서울대 의대 연극동호회원들도 영화에 참여해 사실감 넘치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병원 의사와 간호사 가운데 가장 두드러지는 건 물론 이항 박사다. 차가워 보일 듯한 병원 분위기가 이항 박사로 인해 따뜻해 보이기까지 한다. 환자 가족과 어린이 환자를 어루만지는 그의 온기있는 대사와 사랑이 담긴 시선은 인상적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출연한 영화를 끝내 볼 수 없었다. 전기누전으로 인한 화마가 그를 삼켰던 것이다. 촬영이 끝나고 편집 마무리를 할 즈음이었다. 그는 죽기 전까지도 연극 연출을 하며 열정을 불태웠다. 지인들은 평소 좋아하는 술을 늦게까지 마셨다가 불길을 피하지 못한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 MK픽처스의 심보경 이사는 “극의 리얼리티를 높이려고 배우 경험이 있는 의사를 찾았는데 조감독이 이항 박사를 추천했다. 이항 박사의 연극 연출작과 배우 출연작을 봤더니 이미지도 맞고 게다가 소아암 권위자라서 더이상 좋을 수가 없었다. <내 머리 속의 지우개>에도 출연했고 그뒤로도 영화 작업이 예정되어 있었다”며 안타까워했다. 이항 박사의 타계로 제작진은 깊은 슬픔에 잠겼고, 돈독한 사이였던 오지혜는 특히 상심이 컸다. 오지혜는 <한겨레21>에 고인을 기리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