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세 마리 토끼를 쫓다 망한 스파이크 리, <썸머 오브 샘>
2000-04-04
글 : 짐 호버먼 (칼럼니스트 영화평론가)
재료만 있고 영화는 없네

머리가 잘 돌아가는 감독답게, 스파이크 리의 영화치고 따분한 장면이 별로 없지만, 그런 만큼 앞뒤가 맞는 작품 또한 별로 없다. 디테일은 물샐틈 없는데, 구조는 기우뚱거린다. 아이디어는 엄청 좋은데 뒷감당이 안 되는 이런 측면에서, 할리우드 감독 중에 스파이크 리 따라올 사람이 없다.

비록 못지않게 삐그덕거리기는 하지만, 그의 초기작들은, 심지어 <말콤X>조차도, 새로운 정치적 수사학을 기약하는 바가 있었다. 사회적 만족보다는 사회적 갈등에 기반한 과시적 교훈주의라고나 할까. 그러나 <브룩클린의 아이들>(Crooklyn) 이후, 리의 영화는 브레인스토밍 결과 탄생한 아류작들 냄새를 풍겼다. 저예산 소품이건 광활한 도시의 풍경이건간에, 붓은 내달리되 형상은 거의 드러나지 않는, 일필휘지의 화폭이었다. 예외없이 꼭 봐둘 만한 영화이긴 했으되, 그렇다고 해서 제대로 성취를 거둬낸 영화들은 또한 결코 아니었다.

7월4일 미국 독립기념일 개봉에 맞춰 서둘러 제작된, 연쇄살인범 데이비드 ‘선 오브 샘’(샘의 아들) 버코비츠가 일으킨 공포소동을 프리즘 삼아 1977년 뉴욕이라는 흥청망청-디스코-펑크-소돔을 투사시켜낸 타블로이드판 서사극 <썸머 오브 샘>은, <브룩클린의 아이들>이나 <히 갓 게임>보다 훨씬 더 구조가 개차반이다. 버코비츠의 악명높은 ‘문건’을 받았던 당시 <데일리 뉴스>의 칼럼니스트 지미 브레슬린이 스크린 앞에 턱 나타나, 자기 고향에 대한 애증의 양가적 감정을 털어놓고 진부한 대사들로 관객의 면상을 갈겨대는 순간부터, 영화는 세 갈래의 서로 다른- 그 각각은 화가 나도록 정치적으로 올바른- 방향으로 내달린다.

빅터 콜리치오와 마이클 임페리올리의 각본을 스파이크 리가 각색한 <썸머 오브 샘>은 프리츠 랑의 <M>에서 발원한 전통적 사이코킬러물인 동시에, 뉴욕의 부박한 70년대를 파노라마적으로 또 뒤틀린 노스탤지어로 환기시키는 영화이며, 집단 히스테리, 그 중에서도 특히 타자를 악으로 치부하는 병증에 대한 분석이기도 하다. 이 마지막 측면이야말로 이 영화에서 가장 잘된 대목이다. 디스코 퀸 출신 아내(미라 소비노)의 눈을 피해 오입질에 여념없는 브롱크스의 바람둥이 이발사 비니(존 레기자모)는 샘의 일곱 번째 희생자가 될 뻔한 위기를 가까스로 모면한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부터, ‘샘의 아들’ 사건은 비니의 변덕무쌍한 리비도와 그 동네 편협한 이탈리아계 주민들의 편견과 버무려져(특히 비니의 친구 리치(아드리엔 브로디)가 마을로 돌아와 앞의 두 요소를 촉발하면서) 섞어찌개가 된다. 야심에 불타는 펑크 로커이자 틈틈이 포르노 배우 일을 하는 리치는 마을의 탕녀(제니퍼 에스포시토)를 개심시키는 한편, ‘메일 월드’(Male World)라는 시내의 매음굴에서 나체춤을 추고 호객 행위를 하면서 잔돈푼을 번다. 비니를 애증에 시달리는 마을 인사이더로, 리치를 그의 ‘왕따’ 친구로 빈틈없이 못박아 리는 내러티브가 궁극에 가서 <비열한 거리>의 수정본쯤으로 낙착되는 건, 이 영화에 내포된 스콜세지적 울림의 극히 작은 편린일 뿐이다.

<썸머 오브 샘>에는 장소에 대한 스콜세지의 치밀한 감각이 결여돼 있지만, 그래도 그 무대가 스콜세지적 뉴욕이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영화의 마지막 곡목이 1977년을 풍미했던 <뉴욕 뉴욕>일 뿐 아니라, 등장인물 거의 모두가 트래비스 비클의 악몽 속을 살아가고 있다. ‘샘의 아들’(마이클 바달루코)이 남긴 편지들은 트래비스의 일기를 그대로 닮아있고, 그 편지들 자체가 리치의 펑크곡들로 변신한다. 그런가 하면, <택시 드라이버>의 과열된 잡동사니들, 다시 말해 산산조각난 두개골이나 성적인 혐오, 일촉즉발의 표현주의들이 이 시대를 대표하는 것들로 제시된다. <썸머 오브 샘>의 외관은 창백하다는 말로는 모자란다. 빛바랜 동시에 과포화상태이기도 한 영화의 컬러는 8mm 포르노테이프의 그것과도 같다.

테렌스 블랜처드의 음악이 아바에서 더 후, 나아가서는 집안싸움의 소음과 야구 중계방송에 이르기까지 속속들이 스며드는, 거의 ‘불협화음’에 가까운 <썸머 오브 샘>은 살인범이 미치도록 짜증스럽게 구는 밉살맞은 개를 쏘는 순간부터 과속페달을 밟으면서, 주로 메가 클로즈업과 ‘바바 오레일리’에나 어울릴 듯한 세트를 이용해 살인, 마약, 기도 그리고 매음굴 순례로 이어지는 일련의 격렬한 몽타주 장면들을 쏟아낸다. 여기다 그해 여름의 트라우마적인 분노의 폭발과, TV 기자 존 제프리스로 분한 감독 자신의 거슬릴 정도로 무감동한 카메오 출연을 보태보라(농담도 유분수지, 리는 그의 실제 누이인 조이를 낄낄거리는 구경꾼으로 등장시켜 길거리에서 즉석 인터뷰함으로써 ‘비관적인 관점’에 손을 든다).

리는 1977년이 <스타워즈>가 탄생하기도 한 해라는 사실을 무시하고 있는데, 그 결과는 세탁기 효과라고나 할 만하다. 서브플롯과 캐릭터들이 세탁기의 유리벽에 짓눌리다가 물살의 소용돌이 속으로 휩쓸려 들어가는 그런 효과. 원심으로 치닫는 이런 동작들이 술로 뒤범벅된 설명적 장면 속에서 한 호흡 죽이는 경우도 이따금 있다. 어느 광란의 밤, 비니와 디오나가 CBGB에서 스튜디오 54로, 거기서 ‘플라토의 은신처’의 난교파티로 휩쓸려다니는 장면에서처럼. 비니가 어쩔 수 없이 친구 리치가 도시를 공포로 몰아놓은 진짜 살인범이라고 믿는 척해야 하는 지경에 몰릴 즈음엔, 영화에서 막 나가는 건 마을사람들뿐만이 아니게 된다.

20분 정도 짧거나 아니면 두 시간은 더 길었어야 할 영화 <썸머 오브 샘>에서는, 너무 많은 일이 두번씩 벌어지는 것처럼 보이고, 그 나머지 일들은 전혀 벌어지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도시의 유독성 파편더미 속으로의 몰입이랄까. 월요일 아침에 코니 아일랜드 비치를 뒤지고 다니는 기분 말이다. 있어야 할 재료들은 다 있는데, 정작 영화 자체는 없는 꼴이다.

<씨네21>은 <빌리지 보이스>의 짐 호버먼 칼럼을 독점전재합니다. 이 글은 2000년7월6일자에 실린 평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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