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인]
<거북이도 난다>의 바흐만 고바디 감독
2005-05-25
글 : 김현정 (객원기자)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착하고 예쁜 아이들이 왜 이렇게 살아야 되나?”

바흐만 고바디는 언제나 국경지역에 머무는 감독이다. 쿠르디스탄 출신인 고바디는 어린 시절 전쟁을 피해 안전한 이란으로 이주했지만, 전쟁터나 마찬가지인 그곳으로 돌아가, 동족의 고단한 삶을 영화로 만들어왔다. 얼마 전 한국에서 개봉한 그의 세 번째 장편 <거북이도 난다>는 미군의 침공을 눈앞에 둔 이라크 쿠르드족 거주지역을 배경으로 삼은 영화다. 영리한 소년 ‘위성’은 사담 후세인이 화학 무기로 공격했던 마을에서 피난온 소녀 아그린을 보고 사랑에 빠진다. 그는 먹고살기 위해 분투하는 와중에도 아그린의 마음을 얻고자 노력하지만, 군인들에 강간당해 아이를 낳은 아그린은 언제나 죽음을 꿈꾼다. 어린아이가 목숨을 끊고 살인을 하는, 믿고 싶지 않은 현실. 그러나 고바디는 그 마음을 짐작이라도 하는 것처럼 “내 영화는 모두 사실에서 나왔으므로 믿어야만 한다”고 말했다.

몇번의 방한계획이 무산된 끝에 전주영화제 심사위원으로 한국을 찾아온 고바디는 영화제가 끝난 다음 서울에서 <거북이도 난다>를 상영하고 관객과의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 인터뷰는 두 가지 행사의 사이, 서울에서 진행됐다. 그는 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쿠르드족은 빨리 말하고 빨리 먹고 빨리 걷는다. 언제 짐을 싸서 달아나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고바디 자신도 말이 빠르다고 했다. 그러나 통역을 배려해야 하고 정확하게 소통을 해야 하므로 천천히 말하겠다면서, 고바디는 전쟁과도 같은 자신의 영화 만들기를 들려주었다.

-당신의 두 번째 영화 <고향의 노래>는 비극이면서도 낙천적인 에너지가 넘치는 영화였다. 그러나 아이들의 죽음으로 끝을 맺는 <거북이도 난다>는 훨씬 어둡게 느껴진다. 그 사이에 무슨 변화가 있었던 건가.

=나는 <거북이도 난다>가 어두운 영화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코미디도 있고 어둡기도 한, 쿠르드족의 삶을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영화일 뿐이다. 내 나라 쿠르디스탄에서는 매년 전쟁이 일어나고 죽음과 사고가 끊이지 않는다. 쿠르드족의 삶은 비극이다. 나도 아그린처럼 두세번 자살을 생각해본 적이 있는데, 우리에겐 죽음이 삶보다 더 큰 선물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므로 내 영화는 거울과도 같다. 내 마음은 <거북이도 난다>의 마지막처럼 어둡고 아프지만, 내 겉모습은 이 영화의 시작처럼 코믹하고 재미있다. 그리고 내 영화의 캐릭터들도 모두 내 일부다. 나의 어느 부분은 아그린이고 또 다른 부분은 위성이고 헹고다. 나는 그런 식으로 영화를 만든다. 내 마음속에 비극과 고통이 있다 해도, 내 영화의 주인공들이 살아가는 것처럼, 누구도 내가 가는 길을 막을 수 없다.

-<거북이도 난다>는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처럼 아이들을 주인공으로 삼고 있다. 어떻게 이 영화를 떠올렸는가.

=사담 후세인 동상이 철거되고 2주가 지난 다음에 이라크에 갔다. 이라크 국경지대 쿠르디스탄에는 몸이 온전한 사람보다 팔이나 다리가 없는 사람이 더 많았고, 위성이 지뢰를 파는 곳과 비슷한 시장도 실제로 있었다. 소형 카메라를 들고 그 지역을 여행한 다음 이란에 돌아왔는데, 찍어온 기록을 보면서, 영화를 만들고 싶어졌다. 반전(反戰)영화를 말이다. 왜 우리가 권력을 가진 미국과 서구 때문에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건가 항의하고자 했다. <거북이도 난다>를 찍기 전에 나는 왜 살아야 하나, 라는 무력감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팔과 다리가 없는 아이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삶의 의지를 발견했다. 이 영화를 보는 이들 또한 아이들이 겪은 비극을 직접 느끼기를, 자기 것으로 만들기를 바란다.

-<거북이도 난다>에 출연하는 아이들은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준다. 그 아이들을 어떻게 발견했는가.

=어시스턴트 세명과 함께 자동차 네대에 나누어 타고 쿠르디스탄을 돌아다니면서 1천명 넘는 아이들을 만났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이미지와 맞는 아이를 찾아야 했다. 예를 들면 아그린은 열네살이어야 했고 예뻐야 했고 강간당한 고통이 얼굴에 드러나 있어야 했다. 아바즈 라티프는 바로 그런 소녀였다. 그녀는 꼭 열네살이었는데, 마치 아이를 가진 엄마처럼, 나이 들고 상처가 있어 보였다. <거북이도 난다>라는 제목은 아이를 업은 아그린이 거북이처럼 보이는 데서 나온 것이다. 거북이의 등껍질은 아그린이 항상 버리고 싶어하는 그녀의 아이, 다시 말하면 비극적이고 무거운 삶의 무게였다. ‘위성’으로 출연한 소란 이브라힘도 코믹하고 미국을 좋아하고 미국 옷을 입고 다니는 아이를 찾다가 발견했다. 위성은 내 어린 시절 모습이기도 하다. 내 부모는 내가 열여섯살 때 이혼했다. 그뒤 나는 지도자가 되고 싶었고 아버지처럼 힘이 있고 생활비를 버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거북이도 난다>에는 내 가슴속에 차 있던 압박과 콤플렉스가 드러나 있다.

-헹고 역의 히레쉬 페이잘 라흐만은 감전 사고로 두팔을 잃었다. 그런 아이가 카메라 앞에서 불구의 소년을 연기한다는 건 상처일 수도 있는데.

=그 아이는 팔이 없다는 사실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언제나 당당했다. 그는 자신이 팔이 있는 사람보다 연기를 잘한다고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히레쉬와 다른 아이들 모두 연기를 했다기보다 자기 삶을 되풀이했다는 편이 맞을 것이다. 위성의 대사도 사람들이 실제로 주고받는 말이고, 그가 장사하는 시장도 실제로 존재한다.

-삶을 되풀이한다고 해도, 비전문 배우와 일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당신은 어떤 식으로 배우들과 작업하는가.

=처음엔 제작비가 없어서 가족과 친척들을 배우로 썼다. 지루한 작업이었다. 전문적인 배우에겐 그저 지시를 내리면 되지만, 아마추어는 진짜 삶을 캐치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업을 계속하면서 내 영화엔 아마추어가 맞는다고 생각하게 됐다. <고향의 노래>에 나오는 배우들은 내가 어릴 적부터 일년에 한두번은 봐왔던 진짜 쿠르드족 음악가들이었다. 나는 그들과 같은 집에 머물면서 함께 먹고 잤고, 그들의 습관을 눈여겨보았다가 다음날 되풀이하도록 했다. <거북이도 난다>도 비슷했다. 나는 엄마가 된 듯한 심정으로 아이들과 지내면서 밥을 먹을 때도 아이들 먼저 먹였다. 그들이 스스로 귀한 존재라고 느끼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힘과 자신감을 가질 수 있도록. 그리고 실제 촬영할 때는 아이들에게 대사를 한 문장씩 불러주곤 했다. ‘위성’은 매우 영리하고 연기도 잘해서 한꺼번에 여러 문장을 불러줄 수 있었다.

<거북이도 난다>

-<거북이도 난다>에 출연한 아이들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가.

=‘위성’은 내가 만난 아이들 중에서 가장 똑똑했다. <취한 말들을…>에 출연한 아윱이 내 어시스턴트이고 영화 공부를 하고 있는데, 그는 아윱의 어시스턴트가 되고 싶어한다. 아그린은 TV방송사에 소개해서 일자리를 얻게 해주었다. 그녀는 지금 어린이 프로그램 진행자로 일하며 월급 300달러를 받고 있다. 이건 한국에선 3천달러와 맞먹을 만한 큰돈이다. 눈이 안 보이는 리가는 수술을 받아 시력을 회복했다. 쿠르디스탄엔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지역이 많아서 천막을 치고 전기를 끌어와 <거북이도 난다>를 상영해야 했다. 그날 그 천막 안에서 리가가 붕대를 풀었다.

-<거북이도 난다>는 전작에 비하면 규모가 매우 커졌다. 엑스트라로 동원된 배우들의 수만 해도 엄청났을 듯하다.

=한달 동안 자동차를 타고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도와달라고 방송을 했더니 쿠르드족 8천명이 오직 이 영화를 위해 모여주었다. 그 덕분에 난민들이 언덕 위에 몰려 헬기를 바라보는 장면을 찍을 수 있었다. 하지만 단 한 시간 헬기를 빌리기 위해선 두달 동안 미군에 사정해야만 했다.

-<고향의 노래>에 등장하는 쿠르드족들은 모이기만 하면 손뼉을 치면서 노래를 부른다. 인상적인 모습이었는데, 그것이 쿠르드족의 일상인가.

=쿠르드족은 언제나 걱정과 고난을 안고 있어서 웃지 않으면 계속 살 수가 없다. 쿠르디스탄에선 맑은 날 기분 좋게 나와도 누군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전쟁터로부터 고작 10km 떨어진 장소에서 즐겁게 결혼식을 치러야 한다. 우리가 원한 삶은 아니다. 권력이 있는 다른 나라가 그렇게 만들었다. 그러므로 쿠르드족은 항상 웃으면서 미래에 대비해야만 한다.

-당신의 영화는 미리 계획을 세웠다기보다 일어나는 사건과 맞닥뜨린다는 느낌을 준다. 시나리오를 어느 정도 쓰고 촬영을 시작하는가.

=시나리오를 쓰지 않고 메모지 몇장 분량의 시놉시스만으로 촬영을 시작한다. 그리고 배우들을 관찰하면서 매일 밤 시나리오를 완성해간다. 처음엔 대강의 설정만 있다. ‘위성’은 코믹하면서 미국과 유럽을 좋아하는 아이고, 열네살 먹은 소녀가 아이를 데리고 힘겹게 살아가고, 이런 정도. 하지만 내 영화는 매우 강하고 사실적인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나는 <고향의 노래>를 찍으면서도 막연히 비극이 될 거라는 사실만 알았을 뿐 구체적으로 어떤 사건과 만나게 될지는 몰랐다. 다만 뺨을 때리는 것처럼 견고한 충격을 주려고 했다. 한국과 미국과 다른 모든 나라의 관객에게 쿠르드족의 현실을 알리고, 삶의 가치를 생각해보도록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취한 말들을…>과 <거북이도 난다>의 착하고 예쁘고 올바른 생각을 가진 아이들이 왜 이렇게 힘들고 어렵게 살아야만 하는 건지도 묻고 싶었다.

-해외 관객과는 어떻게 만나는가. <거북이도 난다>는 한국의 메이저 배급사인 CJ엔터테인먼트가 배급하지만, 항상 이런 경우를 만나지는 못할 텐데.

=<거북이도 난다>는 30∼35개국에서 상영되었는데, 항상 힘들게 배급하고 있다. 한국 같은 경우는 거의 없어서 이렇게 큰 회사가 내 영화를 배급한다는 데 경의를 표한다. 포스터도 지금까지 본 것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든다(눈먼 리가가 망토를 뒤집어쓰고 벼랑에 서 있는 뒷모습). 하지만 나는 영화를 만들 때만은 예술만 생각한다. 내 영화의 관객은 일반적인 영화와는 다르다. 사람들은 영화를 보면서 위안을 구하지만, 나는 관객이 쇼크를 받기를 원한다.

-<거북이도 난다>는 이전 영화 두편과 달리 플래시백이나 환상이 섞여 있고, 앞날을 예언하는 헹고처럼 초현실적인 인물도 등장한다.

=나는 점점 시나리오를 많이 쓰고 있다. 내가 겪은 일이 많아지기 때문인 것 같다. <거북이도 난다>에는 세 가지 시제가 존재한다. 아그린의 플래시백으로 보여지는 과거는 매우 아프다. 영화에서 볼 수 있는 현재도 미국과 이라크의 전쟁 때문에 힘든 시기다. 헹고가 보는 미래는 물음표로 머물러 있지만, 그렇게 다르진 않다. 헹고는 초현실적인 인물이 아니다. 나도 앞날을 볼 수 있었고, 쿠르디스탄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앞날을 볼 수 있다. 몇년 뒤에 다시 전쟁이 일어날 거고, 여전히 힘들고 어둡고 아플 것이므로. 그래서 죽음이 삶보다 낫다고 말한 거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모두 아프니까. 그 때문에 아그린은 자신의 권리를 행사한 것이다. 그녀는 아이를 조용하게 만들고(죽이고),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

-당신의 장편영화 세편은 마지막 장면이 모두 비슷하다. 철조망이 있고, 인물이 프레임 밖으로 빠져나간다.

=그 장면은 나의 사인과도 같다. 내겐 영토라는 것이 가치가 없다. 사람은 똑같은 세상에서 살고 있는데, 영토를 나누는 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미국이 대표하는 서구 세력은 전쟁을 일으키고 그 전쟁에서 수익을 얻고자 자의적으로 국경을 가르는 것이다. <취한 말들을…>과 <고향의 노래>를 보자. <취한 말들을…>에서 아윱은 마디에게 수술을 해주기 위해 이란에서 이라크로 넘어가지만, <고향의 노래>는 그 반대방향으로 국경을 넘는다. 나는 그 장면들을 통해 영토는 무의미할 뿐 쿠르드족은 하나라고 말하고 싶었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이 작은 나라가 남한과 북한으로 분단돼 있다는 건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내 영화에서 카메라는 국경을 상징하고, 주인공은 국경 밖으로 나간다.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

-<취한 말들을…>과 <고향의 노래>에서 인물들은 살기 위해 이란으로 혹은 이라크로 간다. 정치적인 상황이 어떻게 변했던 것인가.

=나는 정치적인 감독이 아니고 정치의 천적이나 마찬가지다. 정치에 관해서라면 하고 싶은 말이 없다. 하지만 이렇게는 말할 수 있다. 4천만명의 쿠르드족은 이란과 이라크, 터키, 시리아 국경지대에서 살고 있지만 언어와 문화는 하나다. 그런데도 국경을 넘어 왕래하는 일은 불법으로 취급받는다.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내가 항상 국경지대에서 영화를 찍는 건 그 때문이다. 네개의 나라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쿠르디스탄은 지하자원이 풍부해서 전쟁이 끊이지 않는 분쟁지역이었다. 내가 직접 겪은 이란·이라크 8년 전쟁 중에도 쿠르디스탄에서 가장 많은 폭탄이 터졌고 지금도 불발탄이 남아 있다. 그래서 누구도 국경지대에 공장을 세우거나 투자를 하지 않는다. 파괴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쿠르디스탄에는 학교도 없고 영화관도 없다. 모두가 가난하다.

-그럼에도 쿠르드족은 문화적 동질성을 유지하고 있다. 끈기와 고집이 있지 않고선 가능한 일 같지 않다.

=쿠르드족과 아랍 국가들 사이엔 어떤 문화적인 공통점도 없다. 아랍은 쿠르드족이 좀더 나은 삶을 위해 시도하는 모든 활동을 싫어하고 탄압한다. 사담 후세인이 어떻게 쿠르드족을 억압하고 학살했는지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쿠르드족이 거주하는 네 국가의 국경지대는 서로 맞닿아 있어서 선으로 이으면 하나의 덩어리가 된다. 쿠르드족은 모두 그 덩어리, 존재하지 않는 쿠르드족의 국가를 그린 지도를 집에 걸어두고 있다.

-쿠르드족으로서 영화감독이 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거다. 쿠르드족의 현실을 알리고자 했다면 작가나 저널리스트가 될 수도 있었을 텐데.

=나는 어려운 일을 좋아하기 때문에 영화감독이 됐다. 집에서 글을 쓰고 싶진 않았다. 그리고 영화는 그림이나 시 같은 예술보다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어서 좀더 많은 힘을 가질 수도 있다. 물론 나는 아주 어렵게 영화를 만든다. 나는 따로 영화교육을 받지 못해 쿠르드족의 삶을 영화의 스승으로 삼았다. 그리고 내 영화의 현장에는 의자가 없다. 장비도 없고 제작비도 없어서 잠시도 앉아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내 영화의 제작비는 아마도 한국영화 제작비의 1% 정도에 불과할 것이다. 사람도 적기 때문에 나는 직업이 7, 8가지나 된다. 감독, 작가, 촬영감독, 디자이너…. 모든 걸 해야 하고 어시스턴트 중에도 프로는 없다. 내 희망은 자본을 투자받아 딱 한 가지 직업, 감독만 하면서 편하게 영화를 만들어보는 것이다. 그렇게 내 영화 속의 사람들처럼 힘들게 영화를 만들지만, 내 두팔은 에너지로 가득 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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