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혈의 누>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혈의 누>에 관한 모든 궁금증을 풀어주마라는 <씨네21>의 기사가 있은 뒤 다시 그 영화에 관한 리뷰가 등장하는 것에 대해 의아해하는 독자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좀 새롭게 보태야 할 것이 몇 가지 있는 것 같다. 특히 <혈의 누>가 “염치”에 관한 것이라는 감독의 말은 영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긴 하지만, 결정적이지는 않다. 염치는 임권택 감독의 윤리 언어이기도 한데, <혈의 누>가 가리키는 방향이 이러한 유교적 덕목을 불러내는 방향으로 순항하는 듯 보이지는 않는다. 그래서 먼저 서둘러 말하자면 좋다는 이야기다.
신흥 상공계급의 몸이 조각난 이유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롭게 생각하는 점은 두 가지다. 그 한 가지는 사지절단에 대한 시각적 강박이다. 거열이라고 이름 붙여진 처형 말이다. 다른 하나는 낭만적 사랑이다. <혈의 누>에서 제지공장의 도르래, 수사에 따르는 합리적 이성 등 이 모든 것과 더불어 근대적 감성 체계라 할 낭만적 사랑은 사대부의 자제인 김인권(박용우)과 중하류 계층인 강 객주의 딸 소연(윤세아)의 관계에서 형성된다.
우선 사지절단. 이 영화의 다섯 가지 스펙터클은 물론 조선 시대 대역죄인을 다스리던 다섯 가지 형벌이다. 참수한 목을 매다는 효시, 가마솥에 삶아 죽이는 육형, 돌담에 부딪혀 죽게 하는 석형, 말라가는 종이에 질식해서 죽게 하는 도모지 그리고 가장 잔혹한 거열. 이 거열은 죄인의 팔과 다리를 네 방향으로 우마에 묶고 동시에 우마를 몰아 사지가 찢겨 죽게 하는 형벌이다. 이 영화에서는 강 객주(천호진)가 거형에 처해지는데, CG와 분장 등을 통해 이 장면은 정성을 다해 재현된다. 천호진은 3시간 걸리는 피범벅 분장을 하고 4일간을 끈적끈적한 액체로 만든 피를 바르고 폭염 속에서 땅바닥에 죽은 듯 누워있어야 했다고 기사는 전한다. 거형이 무협지 지면에서가 아닌 조선 1808년에 실제로 집행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오히려 이 글에서의 핵심은 <혈의 누>가 보여주는 거형 집행 과정과 결과로 남겨진 몸, 그 처형 효과에 대한 강박이다. 즉, 1808년 조선 시대를 사지가 찢기는 사지절단, 거형장면으로 재구성하도록 추동하는 것은 무엇일까? <살인의 추억>이 음습한 배수로에 성기가 훼손당한 채 버려진 여자들의 시체로 80년대를 회고한다면 1808년 객주라는 신흥 상공계급 남자의 조각조각난 몸이 왜 동시대에 시각적 광기, 과잉으로 출현하는 것일까?
<조각조각난 몸>(Bodies in Pieces)이라는 동일한 제목의 영문 책이 2권 있다. 하나는 미술사가인 린다 노클린이 저자로 “근대의 은유로서의 파편”이라는 부제고 또 다른 한권은 데보라 하터의 것으로 “판타스틱 서사와 파편의 시학”이라는 부제다. 노클린의 저서인 <조각조각난 몸>은 18세기 말 유럽의 작가와 예술가들이 느낀 불안과 위기감이 과거의 영웅적 성취에 짓눌린 데서 발생했다고 보고 있다. <악몽> 등을 그렸던 푸슬리의 그림에서 나타나는 부분적이고 잘린 이미지, 파편들, 그리고 절단은 사라진 총체성 , 유토피아적 합일성에 대한 상실감과 향수를 대신하고 있으며 그러한 감정은 짐짓 파괴로 표현된다. 그런 고의적 파괴가 새로운 보기의 방식이 되었으며 근대적 개념이 되었다는 것이다. 반면 데보라 하터의 <조각조각난 몸: 판타스틱 서사와 파편의 시학>은 판타스틱 서사에서 조각난 신체에 대한 매혹은 바로 파편적이고 불안전한 것에 대한 판타스틱 양식 자체의 매혹을 보여준다고 지적한다.
우선 판타스틱 서사로 말하자면, <혈의 누>에는 분명 미완, 미제(풀리지 않은 것), 파편들에 대한 양식적 매혹이 있다. <혈의 누>에서 아버지의 질서를 믿는 원규(차승원)는 망원경과 합리적 사고를 지닌 채 무당과 사대부, 객주가 공존하는 동화도에 들어와 이성적으로 사건을 풀어낸다. 그러나 사건의 형사적 해결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교착 상황에 부딪히고, 이성으로 해명하지 못하는 몇 가지 것들- 소연을 바닷가 동굴에 옮겨놓은 이는 누구인가? 거기서 새는 왜 우나? 무엇보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에 갑자기 피는 왜 섞이나- 이 그것을 더 어둑어둑하고 회의적으로 보이게 만든다는 점에서 “문지방의 주저함(토도로프)”을 가지고 있으며 “근대”적 판타스틱 양식에 해당한다(이전 이른바 60, 70년대 귀신영화에서 이성과 초자연성 사이의 주저는 없다. 그냥 귀신의 존재를 인정한다).
근대와 전근대가 착종된 피와 눈물과 비
더욱 중요한 사지절단에 대한 강박으로 되돌아가자면, <혈의 누>는 반복 충동에 의해 움직인다. 영화가 연쇄살인 스릴러 장르의 관행을 빌려 관객에게 약속하는 것은 효시, 도모지, 육형, 석형, 거형이 반복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반복하는 자를 잡는 것이 원규의 일이며 관객이 관심을 가져야 할 일로 설정된다. 4개의 것이 정확히 반복된다. 거형만 변형, 반복되려는 순간을 맞는데, 결과적으로는 실패한다. 또 이 순간이 영화의 주요 비밀이 밝혀지는 계기가 된다. 바로 이 변형, 실패가 이 영화의 핵심 중 하나다. 말과 소를 이용한 거형 집행 방식을 제지소의 도르래로 반복하려는 시도가 원규의 등장으로 실패하는 것이다. 이 말과 소에서 근대적 기계장치로의 변화에 개입된 여러 요소들- 강 객주라는 신흥 상인계급의 등장, 서학의 도입, 체계적 수사, 남녀 개인들간의 낭만적 사랑- 과 잔존하는 전근대- 양반, 무속, 조공, 유교- 이 <혈의 누>에서는 다른 질서, 다른 배열로 전환되지 않고 피와 눈물과 비가 뒤섞인, 착종된 미결의 상태, 시대로 남는다.
이인직의 <혈의 누>가 발표된 것이 1907년. 영화 <혈의 누>가 설정하고 있는 시간은 1808년. 영화는 소설 <혈의 누>에서 1세기를 거슬러올라간 셈이다. 근대의 기원이라는 진단을 받고 있는 개화기, 19세기 말이 아닌 19세기 초(1808), 거중기(도르래)를 이용한 정약용의 수원성 축조 등 이른바 향후 자생적 근대로 나갈 수도 있었던 대안적 지점을 찾아 근대의 기원 서사를 다시 쓰고 있는 것이다. 찢겨진 강 객주의 몸에 대한 시각적 강박이 유럽의 18세기 말 고전 시대, 온전한 것에 대한 노스탤지어와 동일한 효과를 갖고 있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그것은 오히려 근대의 첫 장면에서 사지절단된 반상 질서 하위의 신체가 환상사지- 전쟁 때 팔과 다리와 같은 신체의 일부를 잃은 사람들이 그 상실을 부인하고 그것이 남아 있다고 느끼는 것- 로 배회하며 탈근대를 욕망하는 우리 앞에 접골과 절합 혹은 복수를 요구하며 출현한 것이다. 그러나 <혈의 누>는 영화의 말미에 갑자기 낭만적 사랑으로 도주하면서 이 근대의 궤적에서 출현한 환상사지의 공포를 오히려 탈정치화한다. 이 영화에서 결코 해석되지 않는 연서 “직금도”처럼, 이 영화가 우리에게 다섯 가지 처형 방식을 자세히 보여주며 엄청 무섭게 몰아붙인 뒤 동시대 정치의 어떤 부분을 정확히 비판하고 있는지 알 수 없게 만든다. 양반, 민중, 중간 계급, 문관, 무관에 대해 골고루 칼을 들이대긴 하지만 그 어떤 것도 동시대 정치적 상처와 딱히 공명을 일으키진 않는다. 그럴듯하지만 그렇다(!)는 아니다.
마지막으로 이 영화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갈 수 있었던 또 하나의 길은 영화 첫장의 약속을 이행하는 것이다. 즉 소연이 총을 맞아 바다에 빠져 죽은 뒤, 스스로 원한을 갚는 길 말이다. 이것은 여귀가 등장하는 공포영화쪽으로 가는 것인데, 이 역시도 난데없는 낭만적 사랑으로 좌절된다. 즉 강소연이 김인권에게 말하듯이 그에 대한 사랑이 없었다면 소연은 가족을 억울하게 멸한 발고자들을 모두 죽였을 것이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이 영화는 여귀가 감행해야 할 복수극을 김인권이 대신 해주다 마지막에 실패하는 이야기다. 땡볕 오뉴월(음력)에 서리를 내리는 것은 여자의 한인 것이다. 여자의 한과 강 객주의 피눈물. 우리네 삶, 서러움도 많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