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래디에이터> <트로이> <킹 아더> <알렉산더> 그리고 <킹덤 오브 헤븐>. 역사영화의 르네상스 시대가 도래하고 있는 듯하다. 전문가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이들 역사물이 SF물이나 판타지영화의 뒤를 이어 할리우드의 주류로 자리잡을 것이라는 전망을 조심스럽게 하고 있었다. 50년대와 60년대 초반에 막대한 제작비와 인력, 물량이 투입되어 만들어진 <십계> <벤허> <스팔타커스> <엘시드> <클레오파트라> 같은 대형 블록버스터영화의 뒤를 이어 40년이 지난 요즈음 또 한번 서사적 역사영화의 화려한 부활이 예고되고 있다.
교황, 십자군 원정은 잘못된 전쟁이라고 시인
영화 <킹덤 오브 헤븐>은 중세의 십자군 원정을 웅대한 스케일로 그려낸 스펙터클 서사 액션물로, <글래디에이터>에서 대형 사극의 부활을 알린 리들리 스콧 감독은 한 청년 기사의 눈에 비친 십자군 원정기를 거대한 스케일로 그려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영화는 ‘기독교와 이슬람 문명의 충돌’을 소재로 했다는 점에서 기존의 역사영화와 차별성을 보이고 있다. 9·11 사태 이래로 ‘문명충돌’과 ‘문명공존’이 최대 이슈로 떠오르는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은 작품이라 할 만하다.
얼마 전에 서거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재임 기간 중 중세 교회가 주도한 십자군 원정은 잘못된 전쟁이었음을 시인하고 용서를 구한 바 있다. “신이 원한다”라는 종교적 대의명분을 내세운 십자군 전쟁의 이면에는 서유럽 사회의 내부적 갈등을 외부로 돌리려는 세속적인 이해관계가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1096년부터 200여년에 걸쳐서 진행된 십자군 원정은 서구 팽창 정책의 일환이었다. 서기 1천년 이후부터 인구가 급증하면서 경작지 부족의 고통을 겪던 서구 기독교 세계는 북쪽으로는 발트해 연안, 남쪽에서는 수세기 동안 이슬람 세력에 지배되고 있던 스페인 반도로 그리고 마침내 예루살렘까지 식민 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시작된 제1차 십자군 원정(1096∼99)과 관련해서 한 연대기 작가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수백명의 기사들과 상당수의 무장한 병사들도 있었지만, 수천명에 달하는 여자들과 아이들 심지어 누더기를 걸친 노인들도 있었다.” 1099년 성지를 탈환한 이들은 예루살렘 왕국을 건설하고 오늘날의 근동 지역에 일련의 식민 왕국들을 세우게 된다.
이후 이슬람 세력과 일진일퇴를 거듭하면서 수세기 동안 지속적으로 원정군이 파견될 수 있었던 데에는 중세인들의 광적인 종교적 열정 외에도 기사들의 경쟁적 한탕주의가 큰 몫을 했다. 하지만 스콧 감독은 이러한 당시의 어두운 면에는 눈길을 주지 않고 정의감에 사로잡힌 기사의 모습만을 부각시키는 데 급급했던 것 같다. 역사적으로 볼 때, 십자군 원정은 사냥과 마상경기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던 기사들에게 새로운 돌파구를 제시한 전쟁이었다.
약탈과 정복을 위한 전쟁
더욱이 중세 기사들의 생활은 안락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중세 초, 기사 계급이 거주한 주거지는 보통 나무 울타리와 함께 흙벽으로 둘러싸인 목재 주택들이었다. 석조 건축은 비용이 많이 들었을 뿐만 아니라 돌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숙련된 기술과 경험이 풍부한 장인들도 많지 않았다. 11세기에 이르러서야 세력있는 영주들이 돌로 된 성을 짓기 시작했다. 중세의 기사도를 배경으로 한 영화 <아이반호>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성 내부에는 침대와 벽난로, 홀에 놓인 큰 나무 탁자와 의자 몇개를 제외하곤 가구라 부를 만한 것이 없었으며, 겨울에는 대부분의 성들이 언덕 정상에 나무와 돌로 건축된 구조적인 단점 때문에 농민의 오두막보다도 더 극심한 추위에 시달려야 했다. 특히 심각한 토지 부족 현상으로 장남만 상속을 받을 수 있는 장자상속제가 관철되면서, 부모로부터 토지를 물려받지 못한 떠돌이 방랑기사들은 십자군 원정을 노획물과 경작지 획득을 위한 절호의 기회로 삼게 된다. 이렇게 해서 ‘신이 원했던’ 전쟁은 약탈과 정복을 위해 피를 흘리는 비극을 연출하게 된다.
스콧 감독은 자신의 영화를 통해서 오늘날의 중동 지역을 광란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십자군 전쟁을 자기 반성적 성찰을 통해서 해석하면서, 종교전쟁이 얼마나 비참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고자 했다. 자신의 ‘반전’ 메시지를 최대화하기 위해서 그는 피가 튀어오르고 살점이 도려져나가는 아비규환의 처절한 전투장면들을 연출했고, ‘신의 이름’을 내세운 전쟁의 어리석음을 고발하면서 인간의 존엄성은 그 어느 것으로도 대체될 수 없음을 깨닫게 하고 있다. 캔버스에 휴먼드라마를 채색하듯이 감독은 십자군 원정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통해 진정한 평화의 개념을 되짚어보고자 했던 것이다.
할리우드식 근사진리에 다가가는 영화
리들리 스콧은 사극의 베테랑 감독이다. 그는 할리우드 대형 서사극의 본격적인 부활을 알렸던 <글래디에이터>를 제작하기 전에 이미 제라르 드파르디외 주연의 <1492 콜럼버스>를 통해 그 실력을 입증한 바 있다. 그러나 <1492 콜럼버스>는 영화 자체의 완성도와는 별개로 역사 해석의 편향성 문제로 적지 않은 비판을 받았던 것도 사실이다. 콜럼버스에 대한 학계의 평가는 ‘최고의 탐험가’에서 ‘최악의 학살자’까지 극과 극을 오고가는 데 비해 <1492 콜럼버스>는 ‘콜럼버스 영웅 만들기’라는 기존의 서구적인 시각의 틀을 넘어서지는 못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에 비하면 <킹덤 오브 헤븐>은 스토리 전개에 있어 어느 정도 역사적 균형감을 유지하려는 감독의 의도가 잘 배어 있다. 문명들간의 상생을 부각하기 위해 영화 곳곳에서 아라비아 바이올린인 우드, 카눈의 소리가 들리는 이국적인 배경음악이 삽입됐고, 감독 스스로 “이슬람 역사에 밝은 학자들에게도 자문했다”고 밝힐 정도로 기존 할리우드영화에서 보여지는 이슬람에 대한 기독교의 절대적 우위라는 이데올로기가 많이 잠식됐다. 반이슬람적 정서가 많이 불식되었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기존의 서구 중심적 역사 해석에서 탈피한 영화로 볼 수 있다. 사실 영화는 오랫동안 정치적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특히 이슬람과 기독교 세계가 조우하던 시대를 배경으로 한 할리우드영화들 속에는 서구 중심적 편견이 깔려 있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할리우드 역사’는 한국을 포함한 친서방적인 국가들에서 역사교과서 이상의 역할을 담당했으며, 그 결과 이슬람의 역사는 테러집단과 극렬 과격분자들의 역사로 이미지화되어 아직까지도 우리의 뇌리 속에서 맴돈다.
노예선 아미스타드호를 둘러싼 이야기를 영화로 만든 스티븐 스필버그는 “감독이 어떠한 노력을 기울인다고 할지라고 위대한 남성과 여성의 삶을 정확히 포착하고, 이를 완벽하게 재창조할 수는 없을 것이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스필버그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과거 사건에 대한 영화감독의 접근 방법은 전문 역사가들의 그것과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과거를 정확히 이해하고 이를 재구성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전문 역사가들도 과거에 대한 자신들의 인식이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감독이나 역사가 모두 과거를 재현하려고 노력하지만, 과거의 사건은 이들 모두에게 신기루처럼 아른거리기는 마찬가지다.
발리안과 시빌라의 로맨스는 허구
<킹덤 오브 헤븐>도 “근사진리”를 작품에 반영하기 위해서, 사실과 허구를 교묘하게 배열하여 만든 사극영화다. 예루살렘의 왕 볼드윈 4세는 영화에서처럼 실제로 수족이 흐물흐물해졌고 앞도 볼 수 없는 심한 나병으로 고통을 받고 있었으며, 결국 그가 더이상 통치할 수 없을 지경이 되자 1184년에 조카에게 왕위를 물려준다. 이러한 왕위 계승과정은 살라딘과의 화해를 지지하는 파와 이에 반대하는 강경파간의 파벌싸움으로 더욱 복잡해진다. 이 시기에 때맞추어 이슬람의 위대한 장군 살라딘이 대군을 이끌고 기독교 왕국을 공격하게 된다. 이때 기독교 진영의 일부 성급한 장수들은 적을 기다렸다가 공격하자는 제안을 무시하고 용광로처럼 펄펄 끓는 사막으로 뛰어드는 결정적인 실수를 범한다. 식수 부족으로 거의 탈진한 부대는 결국 하틴 근교에서 이슬람 군대에 전멸되고, 예루살렘은 1187년 살라딘에게 넘어가게 된다. 이처럼 큰 맥락에서 볼 때 영화의 스토리는 대체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진행된다.
하지만 좀더 미시적으로 자세히 살펴보면, 문서에 기록된 역사는 스콧 감독이 만들어낸 역사와는 차이가 있다. 역사 속의 발리안은 예루살렘 왕국 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왔던 이벨린 가문 출신으로, 영화에서와는 달리 그는 마리아라는 이름의 여인과 결혼한 유부남이었다. 그가 사생아였고 예루살렘으로 오기 전에 미천한 대장장이였다는 문헌 기록도 찾을 수 없다. 영화에서 볼드윈 4세의 여동생이자 유부녀로서 매력적인 청년 기사 발리안과 사랑에 빠졌던 시빌라에 대해서도 허구적인 내용들이 많이 가미됐다. 그녀의 역사적 실체는 영화 속의 그것과는 판이해서, 공주였던 그녀는 1176년에 십자군 원정에 참가했던 한 기사와 결혼해서 나중에 왕위를 계승하게 되는 볼드윈 5세를 낳게 된다. 하지만 이듬해에 남편이 사망하자, 발리안의 둘째형이 미망인이 된 시빌라와 결혼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따라서 시빌라를 둘러싼 스캔들이 정말 있었다면, 이는 발리안이 아니라 그의 친형이 관련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빌라는 더 막강한 권력을 소유하고 있던 기 드 루시앵과 재혼을 해서 두명의 딸을 더 낳는다. 이렇게 볼 때, 영화 속의 두 주인공 발리안과 시빌라는 허구적 요소들로 그럴듯하게 포장된 인물들이다.
역사적 영웅은 발리안이 아니라 살라딘
역사적으로 ‘이벨린의 발리안’이 함락 직전의 예루살렘 방어를 책임지고 있었지만, 영화에서와는 달리 그는 싸움을 더이상 수행하기가 어렵다고 판단하고 살라딘과 협상하는 방법을 택한다. 그리고는 몸값을 지불하는 조건으로 백성들의 안전한 귀향을 보장하는 살라딘의 동의를 받아내게 된다. 따라서 1187년의 진정한 승자는 기독교 전사 발리안이 아니라 관대한 이슬람 군주 살라딘이었다. 예루살렘을 이슬람 제국의 영토로 재탈환하는 데 성공한 그의 성품은 온화함, 인내심, 경건함, 겸손함으로 대변되었고, 광대한 지역을 통합했던 그의 재임기간은 이슬람의 황금기로 불렸다. 영화 마지막 부분에 등장하는 영국의 리처드 왕이 주도한 제3차 십자군 원정 역시 성지 탈환이라는 본래의 목적을 당성하지 못하고 살라딘과의 휴전협정으로 막을 내렸다. 그는 십자군 전사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그리스도의 무덤을 방문하는 것을 허용했고, 이들을 예를 갖추어 맞았으며 식사에도 초대했다고 전해진다.
영화 속에서도 십자군 전사들이 이슬람과 체결한 휴전협정을 어기고 이슬람 상인들을 비열하게 공격하고 이들의 마을을 짓밟는 장면들이 연출되기는 했지만, 정작 살라딘의 진정한 위용은 발라딘, 볼드윈 4세, 티베리아스와 같은 ‘정의’의 전사들이 휘두르는 칼소리에 함몰되고 마는 아쉬움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