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통신원]
[LA] 폴 해기스의 <크래쉬>, 인종문제에 대한 촌철살인 돋보여
2005-05-26
글 : 옥혜령 (LA 통신원)
이방인 공포증에 걸린 LA의 공포와 혐오

한밤중 고속도로에서의 무차별 총격사건이 11건째. 숱하게 미디어에 오르내리는 강도, 총격사건보다 이 불특정 고속도로 총격사건이 ‘엔젤로’들의 발길을, 아니, 운전길을 두려움에 떨게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브랜트 우드, 사우스 캠튼, 다운타운, 샌타모니카, 차이나타운 등 지명만 들어도 그곳에 사는 사람의 계급과 피부 색깔이 감이 잡히는, 자기만의 안전지대를 벗어나 비슷한 혹은 어울림직한 ‘색깔’의 안전지대에 가기까지 대개 거쳐가야만 하는 곳이 로스앤젤레스의 고속도로이다. 이 고속도로야말로 로스앤젤레스의 컬러풀한 다인종들이 가장 평등하게 공유하는 공간일지도 모른다. 물론, 돈 치들이 <크래쉬>(Crash)에서 읊조렸듯이, 이 잠깐 동안의 ‘공유’도 자신의 차창 너머 안전이 보장될 때의 얘기다. 거기서 어디선가 차창을 뚫는 총알을 만난다? 어떡하라고. 그런 식으로 굳이 접촉을 하지 않아도 좋단 말이다. 내 안전지대로 가게 해달란 말이다.

<크래쉬>, 고속도로 총격사건 파헤쳐

참으로 시의적절하게, <밀리언 달러 베이비>의 시나리오 작가 폴 해기스의 장편 데뷔작, <크래쉬>가 요즘 무의식을 짓누르고 있던 고속도로 총격사건의 두려움의 실체를 속시원히 밝혀준다. 5월6일 개봉된 <크래쉬>는 로렌스 캐스단의 <그랜드 캐년>, 로버트 알트먼의 <숏컷>, 최근의 <매그놀리아>에서 그려진 복잡하고 삭막한, 복합 인종 도시 로스앤젤레스의 이미지를 다시 파고든다. 그러나 <크래쉬>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스파이크 리의 <똑바로 살아라>의 로스앤젤레스판이라 할 만한, 이 도시를 정의하는 인종문제에 대한 그 촌철살인의 시선 때문이다. <LA 위클리>와의 인터뷰에서 해기스 감독은 이 영화가 인종문제라기보다는 9·11 사태 이후 ‘타자와의 접촉’으로 신경증과 불신의 골이 깊어진 미국사회에 대한 이야기라고 밝힌다. 하지만 일찍이 미국의 TV프로그램이나 영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강도 높은 인종 차별주의적 발언과 스테레오 타입들의 하룻밤 소동을 보고 있노라면, ‘인종’이야말로 미국사회에서 이방인을 정의하는, 그리고 엔젤로들의 삶의 반경을 규정하는 핵심적인 척도임을 부정할 수 없다.

실제로 <크래쉬>는 90년대 초반 실제로 자신의 차를 도난당했던 해기스 감독의 경험에서 잉태됐다. 해기스 감독은 ‘과연 그 강도들은 누구였는지, 초범이었는지, 어디 사는지, 평소에는 뭘 할지’에 대해, 강도사건 이후 현관열쇠를 바꾸러 왔던 열쇠공이 ‘갱단 멤버가 아니었을까’ 하는 등등의 꼬리를 무는 궁금증을 시나리오로 옮겼다고. 캐나다 출신으로 오랫동안 로스앤젤레스에서 텔레비전 극작가로 활동해온 해기스 감독은 <밀리언 달러 베이비>로 감독 데뷔를 할 뻔했으나, 클린트 이스트우드에게 메가폰을 넘겨준 상실감을 자신의 목소리로 되찾은 셈이다.

‘정치적 올바름’ 아래 숨은 두려움

<매그놀리아> 스타일을 연상케 하는 이 멀티 캐스팅 드라마에서는 앵글로색슨, 라티노, 흑인, 아시안, 페르시안 등 로스앤젤레스의 대표적인 인종들과 경제적 계층의 조합이 만들어낼 수 있는 예상 가능한 모든 스테레오 타입의 인물들이 타인종에 대한 분노와 두려움으로 로스앤젤레스의 하루를 불태운다. 진보주의자든 인종차별주의자든 막상 상황에 부딪히고 나면 자신도 모르게 ‘정치적 올바름’의 가면 밑에 숨겨진 두려움과 현실과 타협하고 마는, 그래서 미워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는 인간 군상의 모습을 돈 치들, 샌드라 불럭, 맷 딜런 등의 배우들이 영화 속에서 뼈아프게 그려내고 있다. 겉으로만 보면 할리우드 메이저급 영화이나 실제론 돈 치들이 나서서 제작비를 모아야 했을 정도로 작은 영화다. 그런데 이 작은 영화가 엔젤로들과 부딪치는 소리는 꽤 짱짱하다. 고속도로따라, 방향감각을 유지하며, 내 안전 지대의 반경을 매일 그려봐야 하는 엔젤로들에게 이른바 ‘움직이는 게토’라 불리는 로스앤젤레스 시내버스가 지나갈 때마다 왜 시내버스의 창문이 그렇게 큰지, 영화 속 인종차별주의 노이로제에 걸린 아프리칸 아메리칸 건달의 명답(?)이 생각날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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