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등 3편의 영화에 캐스팅된 신은경
2005-05-26
글 : 박은영
사진 : 정진환
“잰걸음으로 가다보면 어딘가 도달하겠지”

신은경이 세편의 영화에 동시에 캐스팅됐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느라 1년 반을 쉬고 나서, 슬슬 활동을 재개하려 하자 기다렸다는 듯 도처에서 출연 요청이 밀려들었고, 그중에서 고르고 골라 결정한 영화가 모두 세편이다. 일이 이렇게까지 몰리다니, 신은경 없는 동안 충무로에선 어떻게 영화를 만들었는지, 신은경은 일하지 않는 동안 어떻게 참았는지, 궁금해질 정도다. <Mr. 주부 퀴즈왕>에서는 전업주부가 된 남편 한석규와 갈등을 빚는 직업여성 아내로, <6월의 일기>에서는 예고된 살인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강력계 형사로 출연하게 된다. 남편이 대표로 있는 소속사 플레이어에서 제작하는 <오늘의 운세>는 신이 내린 여자가 사랑에 눈뜬다는 내용의 코믹멜로로, “기존 이미지와 달리 사랑스러운 여자” 역할이라서 마음이 동한 작품.

전날 밤 <Mr. 주부 퀴즈왕>의 첫 촬영을 하고, 새벽에 <6월의 일기>의 고사를 지냈다며, 눈도 붙이지 못하고 인터뷰 자리에 나타난 신은경은 별로 피곤해 보이지 않았다. “현장 분위기가 좋고, 일하면서 신이 나서,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계속 업돼 있다”는 소감 그대로다. 그뿐이랴. 열달 된 아들 민균이의 사진을 꺼내 보여주면서, “스튜디오 아저씨가 이렇게 표정이 풍부한 아기는 처음 본다더라”고 자랑할 때는 얼굴에 빛마저 돌았다. 야윈 듯한 몸매와 길게 웨이브진 머리가 아니어도, 이제 원숙한 여인의 느낌을 물씬 풍기는 신은경에게서 제2의 인생맞이 활동 계획을 청해 들었다.


-먼저 교통 정리가 필요할 것 같다. 보도에는 5월 중에 크랭크인하는 세편의 영화에 동시에 출연한다고 돼 있던데.

=가장 먼저 결정한 작품은 소속사에서 제작하는 <오늘의 운세>였는데, 다른 작품들이 먼저 들어가게 됐다. <Mr. 주부 퀴즈왕>이 추석 개봉으로 가장 빠르고, <6월의 일기>는 11월, <오늘의 운세>는 내년 설 개봉예정으로 진행되고 있다. 어젯밤에 <Mr. 주부 퀴즈왕> 첫 촬영을 했는데, 오래 쉬다가 하니까 묘하더라. 마음이 비워진 건 좋은데, 집중력이 떨어져서 조금 힘들었다. 여러 번 같이 작업한 공형진씨가 “첫 촬영 맞냐?”고, 편안해 보인다 그래서, 다행이다 싶었다.

-그동안 일하고 싶어서 몸이 근질근질했던 모양이다.

=인내심을 갖고 기다린 거다. (웃음) 너무 일이 하고 싶었다기보다는, 이전에 일만 하는 단순한 삶에서 아이 낳고 살림하고 하는 복잡한 일상으로 돌아가보니, 생각도 많아지고, 뭔가에 집중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일 안 하고 쉴 때도 나름대로 그 삶에 집중했지만, 거기 익숙해지면 다시 일을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남편에게) 빨리 일을 시작하게 해달라고 졸랐다.

-결혼 전 인터뷰에서, 결혼과 출산이 배우로서 당신에게 좋은 의미의 터닝포인트가 될 것을 기대한다고 했다. 실감하는가.

=지금 촬영하는 <Mr. 주부 퀴즈왕>만 해도, 결혼을 안 했다면 느끼기 힘든 부분들이 보인다. 한석규 선배랑 부부로 나오는데, 말로 설명 안 되는 부부간의 미묘한 상황들이 와닿더라. 남자들뿐이라서, 여자가 바라보는 결혼, 여자의 관점을 내가 나서서 설명하고, 또 이해시키곤 한다. 어제 실직당하는 장면을 찍었는데, 터덜터덜 걸어가는 뒷모습을 모니터로 보는데, 자식 가진 부모의 심정이랄까, 그런 게 느껴지더라. <6월의 일기>는 왕따 얘긴데, 내가 15살 조카를 둔 이모로 나온다. 애들 학교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형사로서 아이 이모로서 이해해야 하는데, 그게 자연스럽게 이뤄졌다. 결혼하지 않고, 아이 낳지 않았으면 몰랐을 일이다.

-<Mr. 주부 퀴즈왕>은 먼저 캐스팅된 한석규씨의 추천이 있었다고 들었다. 이유를 알고 있나.

=나를 염두에 두었고 희망했지만, 제안을 수락할 줄은 몰랐다 그러더라. 보조적인 역할이라서, 그랬나보다. <오늘의 운세>를 준비하던 중에 우연히 이 시나리오를 봤는데, 꼭 하고 싶었다. 나는 자신을 스타라기보다 직업인으로 매김하고 있는 만큼, 동료들의 생각과 느낌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들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확인해주고 싶달까. 선배님이랑은 전에 <파일럿>이라는 드라마를 같이 하긴 했는데, 그때 나는 애였고 선배는 하늘 같은 존재였기 때문에 같이 호흡을 맞췄다고 말하긴 힘들다. 부부의 역할이 전도된 설정이고, 부인이 군림하는 가장의 이미지이기 때문에 다른 배우가 하기엔 위험한 요소가 있었던 것 같다. 내 경우는 굳이 그런 이미지를 만들어내지 않아도, 전작의 영향으로 그런 느낌이 자연스럽게 묻어나기 때문에, (웃음) 원했던 게 아닐까 싶다.

-작품을 고르는 기준이 전과 달라졌다고 느끼나. <종합병원>의 이정화라는 배역이 만들어준 그간의 이미지에서, 이젠 완전히 자유로워진 것처럼 보인다.

=세 작품 모두 쉽게 선택한 게 아니고, 다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1년 반이면 오래 쉬었고, 빨리 현장 적응을 하려면, 한두편 병행하는 건 괜찮겠다 싶었다. <6월의 일기>만을 컴백작으로 가기엔 조금 망설여지는 부분이 있었다. 강력계 형사라는 캐릭터 자체가 강하니까, <조폭마누라> 했던 신은경이 선택할 수밖에 없는 작품이었겠구나, 여겨질 수도 있다. 사실 세편 다 ‘정답’은 아니지만 그렇게 잰걸음으로 가다보면, 능선이 됐든 산꼭대기가 됐든 어딘가엔 도달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젠 생각을 많이 하기보다는 그냥 마음이 가는 대로 한다. 전엔 그렇게 못했다. 영화계 판도나 흐름을 읽을 수 있는, 제대로 된 매니저를 만났고, 물론 만나자마자 결혼했지만(웃음), 그 사람이 권해주는 작품은 내가 할 만하고 할 법한 것들이니까, 계산없이 받아들이게 된다. 잘못되면 어떡하나, 걱정 안 해도 되는 게 너무 좋다. 어제 유선동 감독이 “선배님, 너무 신나 보여요”라고 하더라. 사실이다. 샴페인 몇잔 마시고, 신나는 음악 들으면서 춤을 추고 있는 기분이다.

-<6월의 일기>와 <Mr. 주부 퀴즈왕>을 동시에 촬영하게 될 텐데, 장르와 캐릭터 성격이 달라서 병행하기 힘들지 않을까.

=<6월의 일기>의 소재는 무거운 편이다. 그런데 이야기의 한축을 이루는 강력계 형사들 이야기는 재밌다. 에릭씨가 후배로 나오는데, 둘이 옥신각신하는 설정이 무척 웃기다. 둘 사이의 우정도 그려질 텐데, 기대가 크다. 여러 편 같이 한다니까, 사람들이 헷갈리지 않겠냐 그러는데, 그럴 이유가 전혀 없다. 예전엔 나무를 본다면 줄기나 잎 같은 디테일에 신경을 썼는데, 지금은 전체인 숲이 보인다. 이게 벚꽃길인지, 대나무숲인지, 전체로 다가가기 때문에 헷갈릴 수가 없다.

-나무가 아니라 숲을 보게 된 계기가 있었을 텐데.

=힘든 과정, 특별한 과정을 거쳤기 때문일 거다. 아기가 지금 10개월쯤 됐는데, 나 혼자 본 것도 아닌데, 정말 바빴다. 애 기르고 집안 살림하는 거, 아무나 하는 게 아니더라. 예전엔 일 끝나면, 집에서 편히 쉬기만 하면 됐다. 나를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간 거지. 지금은 그 시간이 없는 거고, 내가 없어진 거다. 그건 무척 큰 차이다. 전엔 나를 위주로 모든 걸 생각했다면, 이젠 다른 세계도 있을 수 있구나, 생각하게 된 거다. 상황과 사람에 대해 존중하는 마음이 커지고, 여유도 생겼다. 현장에서 뜻대로 일이 돌아가지 않아도, 조급하거나 화가 나지 않는다. 예전 같으면 난리난리쳤을 텐데…. (웃음)

-아기 낳고 몸이 많이 불었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예전보다 야위어 보인다.

=임신하고 23kg가 늘었는데, 체질이 그런지 금방 다 빠졌다. 아기 낳고 많이 용감해졌다. 산후조리원에 있을 땐데, 거기 엄마들 초산이냐 아니냐에 따라 눈빛들이 다르다. 남자들이 군대 갔다 와서, 방위냐, 현역이냐, 해병대냐, 이런 거 따지고 눈빛 싸움하는 것과 비슷하다. 아이를 낳는다는 건, 그 자체로 존경받을 만한 일이더라. 올림픽 출전해서 메달 따는 것보다 가치있는 일이고, 충분히 우월감을 가질 만한 일이다.

-결혼하고 엄마가 됐는데도 주부나 미시 컨셉의 CF에 한번도 출연하지 않았다. 소신이 남달랐던 게 아닌가 싶다.

=안 그래도 (남편에게) 물어봤다. 난 그런 광고 안 들어오냐고. 모르겠다면서 넘기던데, 그게 아닌 것 같다. 철저한 계산에 의한 결론이 아니었을까. 연기자의 특정한 상황이나 이미지를 광고에 이용하는 일은 흔하다. 그런데 그런 일을 만들지 않는 건, 내가 배우로 오래 남아주길 바라기 때문인 것 같다. 내가 열세살에 데뷔했으니까, 올해로 연기 20년째다. 한석규 선배를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저분은 나보다 더 힘들고 무거운 시간을 지나왔겠구나, 나는 아직도 갈 길이 멀구나, 그런 생각.

-결혼 무렵 개봉한 <조폭마누라2>는 전편에 비해 흥행도 별로였고, 평도 좋지 않았다. 활동을 쉬는 동안 의식이 되진 않았나.

=그랬다면 <조폭마누라3>를 하겠다고 덤볐을 거다. 결과에 대해선 아쉽다고 느낄 만큼 속상하지 않다. 내 상황에서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하니까. 사람마다 오감 중에 특별히 발달된 부분이 있고, 그 감각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는데, 내 경우엔 시각이 그랬다. 눈을 사고로 다치고 나서 많이 힘들었다. 중도 하차할 수도 있을 만큼 나빴지만, 포기하지 않았다는 게 자랑스럽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시간을 어떻게 지나왔나 싶다.

-촬영에 들어간 두 신작에서 ‘최고 대우’를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솔직히 나는 상황을 잘 모른다. 숫자에 대해선, 수학이 아니라 산수 단계에서 포기했으니까. 다른 배우들도 대체로 그런 걸로 알고 있는데, 현실이나 판도에 대한 감도 별로 없는 편이다. 알기 시작하면, 일에 몰두하기 힘들어질 것 같아서, 일부러 알려고 노력하지 않는 건지도 모르겠다. 매니지먼트가 단순 대행 업무가 아니라 관리와 유지, 그 이상의 서비스가 되면서, 배우들이 소속사에 대한 신뢰와 자기 브랜드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일하고 있는 것 같고, 나도 그런 거다. 그 이상은 생각하지 않는다.

-여자로서 큰 변화를 겪었는데도 공백이 길지 않았다. 나이 있고 가정 있는 여배우로서, 후배들에게 귀감이 될 것 같다.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해서 자기 영역을 만든 배우들도 있지만, 나이와 경험이 많은 배우들의 활약이 두드러지지 않나. 점점 더 그렇게 될 거라고 본다. 여배우들도 결혼하면 은퇴하고, 영영 볼 수 없게 되는 일은 드물어지지 않을까. 결혼과 출산이라는 과정은 배우 개인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다. 내 경우도 아이 낳고 나니, 관리를 더 열심히 하게 된다. 그런 거다. 얼마 전 남편 일 때문에 미국 갔다가 그쪽 영화 관계자한테 들은 얘기가 있다. 할리우드는 배우들에게 결혼하고 가정 갖는 걸 조장하는 분위기인데, 미혼이면 사생활이 불규칙해서 촬영 스케줄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란다. 물론 미혼 배우들이 다 그런 것도 아니고 우린 풍토가 많이 다르기도 하지만, 생활이 안정된 사람들이 소명의식도 책임감도 더 높은 것 같다.

-다양한 연령대의 배우들이 활동할 수 있으려면 시나리오가 다양해져야 할 텐데, 정해진 작품 이후에 도전하고 싶은 새로운 장르나 역할이 있는지 궁금하다.

=사실 소재도 나올 만큼 나왔고, 기술적인 부분도 발전할 만큼 발전했다. 이젠 공감대의 문제인 것 같다. 배우인 나를 설득하고, 관객을 설득할 수 있는 공감대의 문제. 여러 가지 도전을 더 해봐야 알겠지만, 지금은 작업 분위기가 좋은 영화, 재밌는 영화가 좋다. 심각한 영화, 고뇌하는 역할도 언젠가는 해야겠지만, 당장은 코믹 요소가 있는 영화가 좋다. 물론 상황이나 공감대에서 파생되는 코미디를 바란다. 그렇지 않으면 배우가 아니라 광대가 되어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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