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18일 칸으로 떠나기 전날 비가 내렸다. 몸에 맞는 턱시도를 고르느라 인터뷰가 하루 늦어졌다. 국내 회사의 정장은 내가 입으면 팔이 짧다.
<클래식> <돌려차기> <그놈은 멋있었다>를 거쳐 네 번째 작품이지만 사람들은 나를 <극장전> 이전엔 없던 사람으로 취급한다. 진작 인터뷰 좀 해주지. 홍상수 감독이 수많은 사진 속에서 내 사진을 고르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보통 영화사에서 시나리오를 먼저 보내게 마련이지만 여기는 시나리오가 없었다. 대신 홍 감독과 배드민턴을 쳤다. 늦가을, 노랗게 물든 은행잎이 색종이 휘날리듯 날리는 가운데 몇 가지 연기를 주문받았다. 말로만 듣던 감독이고, 작품도 본 게 없었지만, 매혹적인 중저음으로 다가오는 목소리가 좋았다. 내용보다도 그 목소리, 거기에 간 거다. 홍 감독 생각은 결코 대중적이지 않다. 그런데 자기 생각에 대한 ‘센 믿음’이 인상적이다.
집에서도 막내, 촬영현장에서도 막내였다. 또래가 없어 현장이 재미있지는 않았다. 촬영 당일 나오는 쪽대본도 낯설고, 감독이 마시라고 준 음료수가 소주여서 놀랐다. 촬영 전에 마셔도 되나 걱정도 했는데 쓰기만 하고 잘 안 받던 소주가 나중엔 괜찮아졌다. 덕분에 감독과 더 많은 얘기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엄지원 누나와도 술을 먹었다. 베드신도 있으니 서먹하지 않게 미리 친해둬야지. 누나, 이래요 저래요 했더니 감독이 서로 반말하라고, 먼저 반말로 문자메시지부터 보내라고 한다. 막상 베드신 하려니 몸이 얼어붙는다. 나보다 어린 사람과 했으면 더 편했을까? 콘티엔 어떤 모습으로 하라는 지시도 없고, 참 걱정된다. 영화에선 내 노출이 적은 편이다. 지원 누나와 남산을 바라보며 걸어가는 장면이 예쁘게 나와 좋다.
사람들이 시사회에서 많이 웃는다. 링거 들고 엄마 앞에서 울먹이는 장면에선 크게 웃는다. 우리가 정말 진지하고 심각하게 찍어서 더 재미있게 나온 것 같다. 홍 감독님 영화가 대중과 더 많이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생활의 발견>보다 더 재미있다. 인터뷰라고 해서 왔더니 영화에 대해 묻지는 않고 어떻게 그렇게 어려 보이느냐, 근육은 어떻게 만드냐 같은 것만 묻는다. 나이를 어디로 먹었는지, 참 내 얼굴엔 막내티가 많이 난다. 단국대 친구들이랑 테니스 치고, 스키 타는 거 좋아한다고 말해주었다. 그러고보니 내 주위엔 모두 남자친구들이다.
자동차 지붕 위로 비가 떨어지니까, 차 안에 틀어놓은 베토벤의 <장엄미사>와 잘 어울린다. 내일 아침 비행기인데 일찍 일어나야겠다. 키가 비슷한 형과 떠나는 칸 여행이 쉽지는 않을 것 같다. 아침 일찍 나가서 비상구쪽 자리를 얻어야지 아니면 다리를 접은 채로 파리까지 날아가야 할 것이다. 칸에 가는 것이 ‘가문의 영광’이라고 했지만 가문의 수난이 될지도 모른다. 물론 그런 즐거운 수난은 얼마든지 당해도 되는 것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