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캐나다 국민감독, <허리케인 카터>의 노만 주이슨
2000-04-04
글 : 박은영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기적과 마법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올 아카데미가 캐나다를 화나게 했다면, 그건 <사우스 파크>의 주제가 <블레임 캐나다>가 주제가상 후보에 올랐기 때문이 아니다. 전세계에 중계 방송되는 시상식에서 ‘타도, 캐나다’가 울려 퍼진대도 여유롭게 웃어 넘기던 그들이 정작 참기 힘들었던 건, 그들의 ‘국민감독’ 노만 주이슨(Norman Jewison·73)이 홀대받았다는 사실이라고 한다. 그의 영화 <허리케인 카터>는 남우주연상(덴젤 워싱턴) 후보 한 자리만 배당받았고, 그나마도 수상의 영예를 누리지 못했다. 꼭 그 이상의 상복을 누려야 할 영화는 아니지만, 편견에 희생돼 살인자의 누명을 쓴 흑인 복서의 이야기가 전하는 진한 감동만큼은 ‘국보급’이라는 사실을 캐나다 밖에서도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캐나다 토론토 출신인 노만 주이슨 감독은 50년대에 영국 <BBC>, 미국 <CBS>, 캐나다 국영 방송사를 거치며, 방송 작가와 드라마 연출가로 활동했는데, 이때 해리 벨라폰테, 주디 갈란드 등의 쇼를 연출해 에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61년에 할리우드에 진출해 <신시네티 키드>로 주목받았고, 미국 남부 도시의 인종적 편견을 다룬 <밤의 열기 속으로>을 계기로, 비평과 흥행 양단이 사랑하는 감독으로 입지를 굳히기 시작했다. <지붕 위의 바이올린>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등의 뮤지컬, <투쟁의 날들> <솔저 스토리> 등 사회성 강한 드라마, <문스트럭> <온리 유> 등 운명적인 사랑에 대한 동화까지, 데뷔 40주년을 앞둔 그의 필모그래피는 다양한 관심사와 열정을 따라 종횡무진 달려왔다. <허리케인 카터>는 그 중 <밤의 열기 속으로>와 <솔저 스토리>에 이어 인종차별주의를 정면으로 비판하는 노만 주이슨의 세 번째 작품.

베를린영화제 본선 진출작 <허리케인 카터>의 시사 직후 열린 기자회견과 베를린 포시즌스호텔에서 열린 라운드 테이블 인터뷰에서, 노만 주이슨 감독을 만날 수 있었다. 야구모자와 청바지, 호기심 가득한 눈망울, 우렁찬 목소리. 어디서도 칠순의 나이를 읽을 수 없었다. 청년의 패기와 열정으로, 또 한편의 뮤지컬을 꿈꾸고 있는 그의 영화 사랑을 들어봤다.

-루빈 허리케인 카터의 일대기를 영화화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밤의 열기 속으로>를 촬영하던 무렵, 66년인가 67년에 신문에서 인종주의, 편견의 희생자가 된 허리케인 카터의 이야기를 처음 접했다. 그에게 내려진 부당한 판결은 내게 또다른 충격이었다. 당시 미국사회는 인종문제가 불거져 있었고, 말콤X와 마틴 루터 킹이 주도하는 인권 혁명으로 어수선했다. 그 시대, 그 사회의 흑인이라면, 누구든 비슷한 위험에 처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처음 영화화를 시도했던 80년대 말에 루빈 허리케인 카터를 만났다. 그는 물론 덴젤 워싱턴 같은 미남은 아니다. (웃음) 많은 사람들이 그의 곁에 있었다. 변호사, 친구들, 그리고 경찰관. 투쟁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인 동시에, 그의 석방을 위해 함께 싸운 젊은 친구들의 우정에 관한 이야기로 틀을 잡았다. 정의를 위해 싸운 그들의 이야기가 어떤 소설보다 감동적이고 드라마틱했다.

-인종주의에 관한 영화를 즐겨 만드는데, 그에 대한 관심이 유난한 이유가 있나.

=결코 끝이 없을 이야기다. 언제쯤 사람들은 서로를 존중할 수 있을까. 3000∼4000년 동안 이어져 온 투쟁은 아직도 진행중이다. 요즘 사회가 이 문제에 대해 더 이성적인지는 잘 모르겠다. 인종과 종교를 초월한 인간의 평등이라는 화두에 평생을 바치게 된 계기가 있긴 하다. 캐나다 출신인 내겐 2차 대전 직후 경험한 미국 남부의 참상이 아직도 생생하다. 1946년, 내 나이 열일곱에 미국 남부 여행을 간 적이 있었다. 흑인들은 버스에서 앉지도 못하고 공공장소에서 변변히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더라. 그런 갖가지 차별들을 똑똑히 목격했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전쟁에 나가라고, 나라를 위해 죽으라고 강요할 수 있는 건가. 그건 부당하다. 옳지 않다. 감옥에서 청춘을 보낸 무고한 흑인 복서의 이야기가 날 매료시킨 건 그래서다. 난 사람들 사이에 놓인 벽이 싫다. 인종과 종교 때문에 벽이 생기고 전쟁이 벌어진다는 것도 이해할 수 없다. 그 모든 장벽이 무너져야, 좋은 세상이 올 거다. 난 그런 복된 미래를 기대하며, <밤의 열기 속으로> <솔저 스토리> <허리케인 카터>를 만들었다.

-영화를 통해 세상의 장벽을 얼마나 무너뜨릴 수 있을 거라고 믿나.

=젊었을 때는 내가, 내 영화가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나이가 들수록 어쩔 수 없이 시니컬해진다. 하지만 이 영화를 통해서 사람들간의 진정한 관계가 이뤄낸 기적, 그리고 마법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루빈 카터와 소년 레스라의 관계, 그들의 순수한 믿음과 의지가 얼마나 강력했는지를. 레스라가 카터를 알게 된 것은 자서전 때문이지만, ‘그가 책을 찾은 게 아니라, 책이 그를 찾은 것이다.’ 카터가 레스라를 알게 된 계기는 또 어떤가. 그가 수많은 편지 중에서 유독 레스라의 편지를 택한 것은 바로 우표 때문이었다. 영국 여왕이 그려진, 그리고 캐나다 소인이 찍힌 우표를 보고 호기심이 발동한 것이다. 기적의 시작은 그랬다. 캐나다 젊은이들이 감옥에 갇힌 미국인을 도울 수 있었다는 건 보통 우연이 아니다. 카터를 지탱한 것 역시 미국적인 아이디어가 아니었다. 그는 왜 분노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분노는 동맥을 채울 뿐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좌선하는 맘이었던 것이다.

-허리케인 카터를 연기할 배우로 덴젤 워싱턴이 첫 번째 초이스였나.

=덴젤과는 <솔저 스토리>를 함께 했기 때문에 개인적인 친분도 있었다. 그가 얼마나 열정적이고 헌신적인지를 잘 알기 때문에 함께 일하는 데 다른 고민은 없었지만, 복서를 연기하기에는 나이가 많았다. 감옥을 가기 직전의 루빈 카터는 28살였으니까. ‘혼자 해결해봐. 난 너를 도울 수 없다’고 했더니, 기다렸다는 듯이 ‘준비하겠다’(I will be ready)며 큰소리쳤다. 그는 6개월 동안을 하루도 빠짐없이 2시간씩 트레이닝을 했다. 많은 배우를 만났지만, 그처럼 자기 배역에 열정적인 이는 또 없었다. 6개월 뒤 링 위에서 가운을 벗고 스파링하는 그의 모습을 봤다. 가히 환상적이더라.

-할리우드에서 이런 영화를 만든다는 것이 쉽지 않았을 텐데.

=영화를 만드는 건 언제나 힘들다. 관객은 물론이고 함께 일할 스탭과 투자자들에게 감독의 비전을 제시하고 믿음을 주기는 정말 어렵다. 이 영화 연출 제의를 받은 것이 80년대였는데, 그땐 제작비를 모으지 못해 무산됐다. 그래서 아르미안 번스타인의 비콘 픽처스가 다시 이 프로젝트를 들고 왔을 때 바로 수락했다. 하지만 제작비 수급은 여전히 수월치 않았다. 이 영화의 예산은 그래서 일반 할리우드영화의 절반 수준이다. 또한 루빈 카터의 일대기, 그리고 그것을 영화로 만드는 과정엔 많은 이들, 많은 상황이 얽혀 있어서, 하나하나 짚어가고 풀어가다 보니, 영화가 계획보다 늦어졌다. 그간 오스카에 45번이나 노미네이션됐지만, 그런 화려한 경력도 이 영화를 만드는 데 별 보탬이 되진 않았다.

-허리케인 카터의 구명운동을 벌인 캐나다인들은 영화 속에서 그다지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모든 캐릭터를 발전시키기 시작하면 영화가 길어지고 지루해진다. 실제로 루빈 카터를 위해 구명운동을 펼친 이들은 모두 아홉명이었다. 이들을 모두 등장시키는 것은 애초 불가능했기 때문에 리사, 샘, 테리 셋으로 압축한 것이다. 다행히 그들 모두를 만나서, 당시의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정해진 러닝타임 안에 얼마나 담아낼 수 있을지, 시간이 유일한 문제였다. 결국 관객의 집중도를 높이기 위해, 그리고 루빈 카터와 레스라의 관계를 부각시키기 위해 이들의 비중을 줄이기로 했다. 남은 숙제는 이들 캐나다인 삼총사를 성자처럼 보이지 않게 연출하는 일이었다. 옳다고 믿는 일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약하기도 하고 강하기도 한, 평범한 사람들로 그리려고 노력했다.

-실화에 근거했다는 점 때문에 영화 마무리에서 고심한 흔적이 보인다.

=가장 어려운 부분이었다. 사실 할리우드는 해피엔딩에 별관심이 없다. 해피엔딩인 인생이 어디 흔한가. 낙관적이고 싶지만, 삶은 그리 낙관적인 것이 아니다. 루빈 카터의 경우도 그가 레스라의 편지를 읽지 않았더라면 인생의 반전을 이룰 수 없었을 거다. 너무도 당연한 그의 석방이 해피엔딩일 수밖에 없는 이유, 그 배경이 안타깝다.

-클럽 살인사건 피해자 가족들이 영화의 내용이 사실이 아니라고, 항의했다던데.

=사람들은 신문기사와 경찰의 발표라면, 뭐든지 믿는다. 뉴저지 법원의 판결에도 불구하고, 연방법원은 루빈 카터의 진실을 받아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루빈 카터에게 씌워졌던 살인 혐의를 그대로 믿는 이들이 있다. 범인은 아직 잡히지 않았다. 마피아가 그랬는지, 미치광이가 그랬는지,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한다. 그래서 루빈 카터를 범인으로 몰아간 자신들의 믿음을 지키고 싶어하는 이들도 있는 것 같다. 정말 슬픈 일이다.

-그간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오갔다. 가장 자신있는 건 어느 쪽인가.

=어떤 영화든 중요한 건 하나라고 생각한다. 미덥게, 그리고 지루하지 않게 만드는 일이다. 관객이 영화 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사실이라고, 적어도 사실에 가깝다고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개인적으로는 뮤지컬을 좋아한다. TV에서 트레이닝한 셈인데, 초창기에 해리 벨라폰테, 주디 갈란드, 앤디 윌리엄스 등 뮤지션들의 쇼를 연출한 적이 있다. 그러면서 음악과 영상을 하나의 예술로 결합시키는 작업에 매료당한 것 같다. <지붕 위의 바이올린>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뮤지컬은 두편밖에 못 만들었지만, 눈물과 웃음이 가득한 뮤지컬을 또 만들고 싶다. 우리네 인생사가 본래 그렇지 않은가. 지금은 뮤지컬이 유행에 뒤떨어지는 감이 있긴 하지만.

-사람들의 맘을 움직이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 가장 먼저 염두에 두는 것은 무엇인지.

=영화감독은 이야기꾼이다. 자신의 신념과 사상을 영화 속에 반영할 수 있어야 하고, 그로 인해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어야 한다. 심각한 영화가 아니라도 그건 마찬가지다. <문스트럭>을 예로 들자면, 그 영화는 달의 힘과 마법에 관한 코미디지만, 동시에 이탈리아계 미국인들의 진솔한 삶에 대한 이야기다. 감독으로서 나는 사회 상황과 인간의 본질을 반영하는 스토리를 찾는다. 영화 내내 카메라가 쫓는 건 감독의 정신이고, 그 정신은 배우들의 연기에서 품어져나온다. 메시지를 정하는 것, 전달하는 것 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좋은 배우들과 좋은 팀워크을 이루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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