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아, 아메리칸, 아메리칸, <아메리칸 뷰티>의 미나 수바리
2000-04-04
글 : 김현정 (객원기자)

고무 호스의 물줄기를 맞으면서도 무지개 속에 선 듯 빛나는 로리타, 감당할 수 없는 사랑의 그늘로 서른두살의 남자를 끌어들이는 <연인>의 소녀, 혹은 차갑게 푸른 눈동자로 채 자라지 못한 육체를 덮어 버리는 <택시 드라이버>의 어린 창녀 아이리스. 이들은 조금만 무게를 가해도 짓눌려 버릴 것처럼 어려 보이지만, 이 아이들 앞에서 부서지는 쪽은 오히려 어른들이다. 스무살도 되지 않은 이 소녀들에게서 어른들이 얻고 싶어했던 것은 무엇일까. 이들의 무엇이 잊고 있던 욕망을 일으켜세우고 다시 한번 갈증 속에 버려지게 했을까. 놓쳐 버린 시간에 대한 향수라고 쉽게 대답할 수도 있다.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았던 은밀한 저항의 반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아메리칸 뷰티>는 다소 다른 의미를 담는다.

<아메리칸 뷰티>의 주인공 레스터 버냄을 연기한 케빈 스페이시는 그 답을 짐작하는 듯하다. 장미꽃잎으로 몸을 감싼 미나 수바리(21). 그 꽃잎들이 하나씩 떨어지며 소녀의 육체가 향연처럼 펼쳐지는 환상 속에서 진정한 자신을 찾으려는 레스터에 대해 스페이시는 이렇게 설명한다. “그의 여행은 과거로 향하지 않는다. 레스터는 자신의 내면을 향해 떠나는 것이다”라고. 결국 이 소녀가 내뿜는 자신만만한 향기가 무력한 레스터마저 감염시킨 것이다. 그러나 이 욕망은 파멸로 끝나지 않는다. 욕망은 더 간절한 욕망으로 이어진다는 진실만을 확인시키는 로리타와 달리, 수바리는 욕망의 실현 직전에서 “처음이에요”라는 말로 친구의 아버지를 멈추어 세운다. <아메리칸 뷰티>에서도, 그 이전 작품인 <아메리칸 파이>에서도 수바리는 처녀성을 고집한다. “순진하게 보이는 외모와 반대되는 역할을 맡을 수 있어서 기뻤다”지만, 생기있게 살아 있는 금발의 수바리는 좀더 건강하며 좀더 보수적이다. 말 그대로 ‘아메리칸 뷰티’, 사랑스러운 미국의 소녀다.

유난히 큰 눈에 가득 담은 웃음이 인상적인 수바리는 지금보다 다소 어두운 성향의 영화들로 출발했다. 급진적인 작품들로 유명한 감독 그렉 아라키의 <노웨어>로 데뷔했고 스릴러 <키스 더 걸>에서는 연쇄살인자에게 사냥의 대상이 되었다. 사춘기 소녀의 어두운 초능력이 폭발하는 <캐리2>는 그녀에게 좀더 비중있는 역을 주었다. 그뒤 99년, <아메리칸 파이>의 오디션장에 나타난 수바리는 제작자 워렌 자이드의 말에 따르면 “사람들을 압도해 버렸다.” 10대들의 유쾌한 성적 탐험을 다룬 코미디 <아메리칸 파이>에서 수바리가 연기하는 소녀는 단정한 합창단원 헤더. 그녀의 방정한 품행 때문에 졸업하기 전에 총각 딱지를 떼야 하는 남자친구를 초조하게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이르러서는 <아메리칸 파이>의 다른 소녀들처럼 섹스를 주도한다. 그리고 그녀의 당돌함은 <아메리칸 뷰티>에 이르러 강렬한 유혹으로 선회했다.

당분간 수바리는 <아메리칸 뷰티>의 흔적을 지우지 못할 것 같다. <클루리스>의 감독 에이미 해커링과 함께 하는 <루저>에서 그녀는 대학교수와 사랑에 빠진다. “<아메리칸 파이>와 <섹스의 반대말>를 섞어놓은 듯한 영화가 될 것”으로 기대하는 <미니의 첫 경험>에서는 의붓아버지를 이용하는 18살 소녀를 연기한다. 수바리는 소녀를 향한 성적 환상에 묶여 더이상 성장하지 못할 수도 있다. “나는 <아메리칸 뷰티>를 여덟번 보았다. 그 영화를 볼 때마다 다른 느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수바리의 이러한 열정이 상황을 돌파하는 동력이 되어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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