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새로운 영화를 만들려면 투쟁해야 한다"
며칠 전 독감에 걸렸다는 임필성 감독은 병원에 들렀다가 오느라 조금 늦겠다고 전해왔다.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던 윤종찬 감독은 아직도 후반작업 중인 <청연>에 관해 이야기하다가 “충무로 4대 재앙이라고 들어보셨어요?”라고 농담처럼 물었다. 제작비가 엄청나고, 촬영을 참 오래했고, 결과를 장담 못하는 영화 네편. 윤종찬 감독은 <남극일기>와 <청연>이 그중 두편이었다고 했다. 어쩌면 지루한 마라톤 코스를 함께 뛰어온 동료가 앞질러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는 심정이 아닐까. 그러나 편집 중인데도 시간을 내준 윤종찬 감독은, 미안해하며 감기약을 먹는 후배를 맞아 이해와 공감 섞인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대담 도중 임필성 감독은 가끔 “<소름>도 그렇지만…”, “<청연>도 비슷할 텐데…”라는 말로 답을 시작하곤 했다. 이성과 논리를 무색하게 하는 직관, 이유를 묻는 행위 자체가 의미없는 무모한 도전. 한국 최초의 여자비행사 박경원의 일대기인 <청연>과 남극 도달불능점으로 향하는 탐험대의 여정인 <남극일기>는 끝도 없어 보이는 길을 걸어왔다는 점 말고도 공통점이 있었던 듯했다. 그리고 공감해주는 선배를 만난 임필성 감독은 독감 걸린 성대로 한참 열변을 토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결 말끔해진 얼굴과 목소리로 일어나 작별을 고했다.
윤종찬 | <남극일기>는 재미있기도 했지만 한국영화가 이제는 어떤 수준에 올라갔다는 느낌을 주었다. 시나리오 쓰고 촬영하고 후반작업을 마치기까지 시간이 꽤 오래 걸렸을 듯한데.
임필성 | 모두 5년 걸렸다. 3년 동안 시나리오를 썼고, 촬영은 9개월, 후반작업은 6개월이 걸렸다. 헌팅도 2001년부터 매년 갔으니까 네다섯번은 갔던 것 같다. 캐나다나 그린란드도 알아보긴 했다. 캐나다는 <빙우>가 갔다왔고 스탭 인건비가 너무 비쌌다. 그린란드는 북극이랑 가깝지만 너무 고생한다고 다들 말리더라. 아, 시러큐스 설원에서 찍은 윤종찬 감독의 단편 <풍경>을 뒤늦게 봤다. 진작 보고 <남극일기>에 베꼈어야 했는데. (웃음)
윤종찬 | 5년 동안 영화 하나 만들어보니까 어떤가.
임필성 | 다시는 이렇게 하고 싶지 않다. 하도 오래 붙들고 있으니까 아직 영화가 끝나지 않은 것 같다. 프린트에도 문제가 있는 것 같고. 선배 앞에서 이런 이야기하기가 창피하긴 하지만 처음엔 독특한 상업영화를 찍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하다보니 내가 왜 이 영화를 끝까지 찍어야 하는 걸까 고민하게 됐다. 얼마 전에 송강호가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 우리가 재능이 부족할 수는 있어도 노력은 했다고. 참 고마웠다.
"남극을 밀실처럼 보이게 하려고 했다"
윤종찬 | 실화에서 모티브를 얻었는지 아니면 감독 본인의 상상만으로 만든 이야기인지.
임필성 | 99년에 허영호 대장이 남극을 무보급으로 횡단하는 다큐멘터리를 봤다. 그때 한 대원이 시름시름 앓자 팀에 균열이 생겼다. 허영호 대장은 휴머니스트인지라 대원을 놔두고 갈 수 없어 탐험을 포기하자고 했다. 그런데 다음 장면에서 허영호 대장이 엉엉 우는 것이었다. 그 장면을 보면서 40대의 성공한 탐험가를 애처럼 울게 만드는 집착은 무얼까 궁금했다. 만일 그 이야기가 영화라면, 그리고 트라우마와 집착과 편집증이 있는 탐험대장이라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도 생각해봤다. 남극 자체가 가지고 있는 공포에 미스터리를 덧붙이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도 궁금했고.
윤종찬 | 그러면 영화 속에서 탐험대원들이 발견한 남극일기는 픽션이겠다. 그 일기와 탐험대 여정이 거의 일치하는데, 차용한 의도가 있을 듯하다.
임필성 | 일기는 낭만적이기도 하고 개인적인 기록의 느낌도 난다. 거기에 무시무시한 무언가가 혹은 저주의 모티브가 숨어 있다면 재미있겠다 싶었다. 남극은 순백의, 인간이 거의 없는 지역이다. 사람들은 그런 남극에 와서 비슷한 욕망과 비슷한 비극을 겪는다. 80년 전에 왔던 영국 탐험대가 똑같이 최악의 상황을 맞게 되는 반복은, 윤회까지는 아니어도, 익숙하면서 재미있지 않을까 싶었다.
윤종찬 | 남극은 굉장히 넓은 공간이지만 촬영하기엔 어려웠을 것 같다. 배경이 하얗기만 하니까 비슷하고 답답했을 테고, 결국엔 방 안에서 찍는 것 같지 않았을까.
임필성 | 다양한 지형을 찍고 눈의 색을 변주해서 지루함을 덜어줄 수는 있었을 거다. 하지만 본질적인 한계는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극은 사막이나 화성과 비슷한 공간이니까. 그래서 영화 후반부로 갈수록 남극을 밀실처럼 보이게 하려고 했다. 훨씬 타이트한 앵글과 광각렌즈를 쓴다든지 하면서. 이 영화를 즐기는 관객은 탐험대의 긴장과 공포, 추위를 느끼게 될 거다. 영화를 재미없게 보는 관객일지라도 극장에서 빠져나가고 싶을 정도로 답답함과 권태를 느꼈으면 한다. 그래선지 영화 보는 것 자체가 고생스럽다는 20자평도 나왔다. 20자평이랑 별점이 별로 안 좋다. 특히 <씨네21>. (웃음)
윤종찬 | 처음에는 낭만적인 순간이 나온다. 얼음으로 팥빙수를 해먹으면서 이게 내 나이보다 오래된 얼음이라고 말하는. 하지만 나머지는 어떻게 보면 백색을 배경으로 걷기만 하는 거 아닌가. 걷다가 텐트치고 자고 먹고 또 걷고. 민재의 독백처럼 밤인지 낮인지 개념도 없다. <남극일기>는 후반부로 갈수록 광기가 솟구치는데도 그처럼 건조하다. 그런 점에서 뚝심이 있다. 사실 맵시있게 찍을 수도 있고, 오버할 수도 있는데, 심리 하나만을 잡고 갔다. 신인감독으로선 쉬운 일이 아닐 텐데.
임필성 | 처음부터 밀도로 밀고 가는 영화를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고민이 없었던 건 아니다. 이렇게 드라이해도 되나 싶어서. 나는 논리나 설명으로 관객을 설득시키는 영화가 있고 추상적인 느낌이나 영화적인 아우라로 관객에게 체험을 주는 영화가 있다고 생각한다. 내 목표는 후자였다. 관객이 공포와 두려움과 내면의 광기를 느낄 수 있다면 그것 자체가 또 하나의 엔터테인먼트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투항을 했다면 쉬울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게 한다고 결과가 담보되는 건 아니다. 그리고 한국에서 조금이라도 새로운 영화를 만들려면 투쟁을 해야 한다. 나보다 어린 감독이나 신인감독들이 너무 쉽게 충무로에 투항하는 경우를 많이 봤다. 그러면 한국 영화산업에선 감독의 중요성이 없어지게 된다. 나는 모든 걸 구경만 하는 감독이 되고 싶지 않았다.
윤종찬 | <남극일기>에는 그런 아우라가 있다. 신선하고. 요즘 신인감독들은 이동숏을 많이 쓰던데 <남극일기>도 텐트 안에서 찍은 장면을 제외하면 충분히 쓸 수 있었을 거다. 그런데 거의 쓰지 않았다.
임필성 | 가장 현실적인 이유는 정정훈 촬영감독이 스테디캠을 싫어해서였다. (웃음) 그 대신 돌리를 써야 하는데 눈 위에서 돌리 쓰기가 너무 힘들었다. 그리고 이 영화는 둔탁하고 육중한 느낌을 가지고 있다. 내가 몸이 무거워서 움직이기 싫어하는 탓도 있겠지만(웃음) 드라이하고 쿨한 느낌이 편했다. 만일 시간이 있었다면 눈 위에서 스테디캠이나 돌리의 느낌을 낼 수 있는 새로운 장비를 개발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