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남극일기> 찬반논쟁 [3] - 황진미의 비판론
2005-05-31
글 : 황진미 (영화칼럼니스트)
원정대=제작진=관객의 진기한 메타영화

<남극일기>는 오해의 소지가 많은 영화이다. 그나마 오해를 줄이기 위해 한 가지 당부와 두 가지 질문을 먼저 제시하겠다.

첫째, 반드시 시설이 좋은 상영관을 찾아야 한다. 긴장감 있는 사운드는 이 영화의 가장 돋보이는 요소인데, 시설이 나쁜 상영관에서는 귀가 찢어지는 듯한 굉음으로밖에 안 들리며, 대사조차 전혀 알아들을 수 없다. 영상 역시 스크린이 컴컴하게 느껴지는 낙후된 상영관에서는 ‘미지의 팔’이나 ‘맘모스의 눈’ 따위가 전혀 식별되지 않기 때문에, 보고나서 남들이 하는 말에 (“그런 게 있었어?” 하며) 미지의 생물체처럼 눈만 굴릴 공산이 크다. 기술적인 문제가 있거나 국내 상영관의 실정에 맞지 않은 과욕을 부렸음에 분명한데, 관객이 ‘알아서’ 피하는 도리밖에 없다.

둘째, 이 영화의 주제는 뭘까? 아마 이런 것일 게다. ‘도달불능점’이라는 형용모순에 가득 찬 지구상의 어느 지점에 가려는 탐험대가 있다. 왜 가느냐? 불가능을 욕망하기 때문에, 그것이 인간의 모순된 삶이기 때문이다. 영화 속 “우리의 욕망이 그곳을 지옥으로 만들었다”는 말에서 보듯이, 불가능을 욕망하는 인간의 집착이 비극의 원천이며, 막상 그것이 이루어졌을 때 우리의 존재를 삼켜버릴 심연 같은 허무를 공포스럽게 재현하는 것이 이 영화의 주제일 것이며, 비평의 관점도 여기에 맞춰지기 쉽다. 얼마나 좋은가? <백경> <노인과 바다> <시지프스의 신화> ‘이카루스의 날개’ 등등. 실존주의에서부터 라캉의 ‘소문자 a ’에 이르기까지, 미끄러지는 욕망의 구조에 관한 무진장한 언설들을 죄다 가져다 써도 좋으리라. 그러나 정작 문제는 ‘그 욕망하는 주체’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논의이다. 20세기 서구가 아니라, 21세기 한국에서 ‘보편적 인간의 욕망’에 관한 논의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탐문해보아야 한다.

셋째, 질문, 과연 이 영화의 장르는 뭘까? 김봉석은 ‘스릴러로 가다가, 휴먼드라마로 이상하게 빠진다’(20자평)며 장르의 혼란을 지적하였고, 듀나는 ‘귀신들린 집 영화’(504호)에 가깝다고 하였다. 한편 이 영화의 옹호자는 ‘홍보가 스릴러로 났을 뿐, 철학적 은유를 품은 영화’라 말하기도 하며, 혹자는 ‘장르가 뭐 중요하냐? 장르의 바깥을 사유하자’고 제안하기도 한다. 그러나 영화 스스로 가령 제3의 시선이니, 괴(怪)눈동자니 하는 ‘귀신들린 집’ 장치를 실컷 과용해놓고, ‘홍보가 스릴러로 났을 뿐’이라는 변명은 옹색하다. 또한 장르의 틀을 버리자는 과단성 있는 주장 역시 블록버스터영화에 어울리지 않을 뿐 아니라, ‘불가능을 욕망하는 인간의 집착과 광기’라는 철학적 주제에 정면승부하지 못하고, 스릴러적 장치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가족외상 등을 가져다 쓴 영화의 비겁함에 대해 지나치게 관대한 처사이다. 영화가 장르를 초월하지 못하고, 자꾸만 장르를 지분거리는 데서 일어난 난맥상을, ‘주제가 철학적이다보니 장르는 모호해질 수밖에 없다’고 변호하는 것은 코미디다.

이제부터 앞서 두 가지 질문에 대한 나름대로의 견해를 피력해보겠다.

영화의 주제? 집념이 광기라는 개발독재 비판론

“두 가지 의견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기술로는 불가능하다는 것과 우리 기술로도 해낼 수 있다는… 바람이 너무 거세다는 것과 그뒤에 정상이 기다리고 있다는…. 지금 우리 경제에 대한 두 가지 의견이 있습니다. 긍정의 힘을 믿습니다. 대한민국!” 이것은 얼마 전 국정홍보처 카피이다. 화면에는 실제로 조선소와 악천후속 등반이 나왔다. ‘하면 된다’고 밀어붙이던 박정희 시대의 ‘대한 늬우스’도 아니고, 참여정부 시대에 불가능을 타진하는 신중론 등 여타의 의견을 모조리 긍정/부정의 이분법을 적용하여 불순한 것, 심지어 반국가적인 것으로 몰아가는 솜씨라니! 아직도 ‘목표지향, 성장 일변도’의 개발독재 패러다임은 포장만 달리할 뿐 달라진 게 없는 모양이다.

<남극일기>는 정확하게 ‘바람이 너무 거세다는 것과 그뒤에 정상이 기다리고 있다는 두 가지 의견’에 관한 영화이다. 그러나 ‘긍정의 힘’을 믿고, ‘수많은 탐험가들의 시신이 묻힌’ 동토를 걸어, ‘고지가 바로 저긴데 예서 말 수는 없다’며 의지를 불태우는 집념의 화신이 ‘위대한 인간 정신의 구현자’가 아니라, 바로 ‘미친 놈’이요, ‘미친 아비’ 라는 것을 폭로하는 영화이자, 그 아비의 권력(=의지)이 자식에 의해 저지되지 않으면, 결국 제 자식을 잡아먹고 만다는 것을 경고하는 영화이다.

따라서 영화의 주제를 ‘불가능에 맞서는 보편적 인간의지’로 놓고, 그것을 기괴하다고 봐야 할지, 숭고하다고 보아야 할지, ‘화이트 아웃’을 겪을 필요는 없다. 오히려 ‘보편적 인간의지’라는 크레바스에 빠지지 않도록 유의해야한다. 영화의 초반에 대장은 도달불능점에 가는 이유를 말한다. “우리 같은 놈들은 아무도 해내지 못할 것 같은 일을 할 때 살아 있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일상이고 생활이다.” 대화라기보다 독백처럼 들리는 이 대사에서 밑줄칠 단어는 ‘우리’이다. ‘우리’는 ‘나’로 교정되어야 한다. 그는 대원들에게 “너희가 내 가족”이라 하고, 포기하자는 대원에게 친아들에게 그랬듯 “약해빠진 놈”, “아비 말 안 듣는 놈”이라 호통친다. 그에게 대원들은 모두 ‘작은 자기’, 즉 자신과 같은 목표를 지니나 자신보다 나약한 존재로 인식된다.

그는 대원들이 독립된 인격체로서 각자의 욕망과 의지와 가치관이 있으며, 이곳에 일시적으로 합류했다는 사실을 인정치 않는다. 그에게 의지는 한 가지요, 차이는 오직 강함과 약함이 있을 뿐이다. 그는 자신의 의지를 이 탐사대 전체의 의지로 환원하여 “그곳에 가야 한다”는 ‘보편적 의지’ 곧 대의를 실현코자 한다. 진로에 방해되는 대원의 낙오를 고의로 묵인하고, 진로에 이견을 가진 대원을 구출치 않으며, 반대의견을 피력하는 부대장의 시력을 빼앗고, ‘포기 발신’을 하려는 대원의 다리를 잘라버린다. 이 과정이 처음엔 “구조는 베이스캠프에서 추진하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효율론으로 지지되는 설득의 외양을 띠지만, 두 번째 사고부터는 폭력의 과정이요, 광기 발현임이 분명해진다. 20세기 서구문학에서 논해지는 ‘인간존재의 한계에 도전하는 위대한 모험정신’의 담론은 ‘인간 누구의 의지인가?’ 그리고 ‘각 인간들의 상이한 의지는 어떻게 충돌하고 잠식되었는가?’로 세분화해서 다시 물어져야 한다. 보편적 인간의지 담론 자체가 폭력인 것이다.

스릴러도, 휴먼드라마도 아닌 메타영화

<남극일기>는 스릴러도 휴먼드라마도 ‘귀신들린 집’도 아니라, 바로 ‘메타영화’이다. <극장전>을 메타영화로 보는 의견(502호)이 있지만, 이는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에서 이미 예견된 것(454호)이므로 전혀 새롭지 않다. 오히려 <남극일기>가 지닌 이 희비극적인 자기반영성에 주목해야 한다.

다른 많은 메타영화들처럼, <극장전>은 영화 속 영화와 그 영화의 외연이 구분되어 있다. 그러나 <남극일기>는 ‘남극일기’라는 영화 만들기 과정과 상영과정 자체가 바로 <남극일기>가 되는 진기함을 보여준다. 이런 영화는 <로케트는 발사 되었다>(1997) 이후 처음이다.

<남극일기>는 이런 것이다. ‘아무도 만들지 않은 대작을 만들자’는 벅찬 희망으로 고난의 대장정도 불사하겠다는 제작진이 꾸려진다. 그들에겐 1920년대의 영국 SF소설 같은 시나리오 <남극일기>가 있다. 시나리오의 앞부분은 ‘남극 좋다, 춥다’등 대사가 명확하지만, 뒤로 갈수록 글자는 알아볼 수 없고, 몇개의 모호하고도 불길한 이미지만으로 구성되었다. 그들은 조금씩 불안감을 느끼고, 제작진들 사이에서 ‘무모한 시도’라는 불만의 목소리가 나오지만, 감독은 “어떤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가야 한다”고 웅얼거린다. “예술가란 저런 건가?”라며 티격태격하다가 제작진은 링반데룽(제자리를 맴도는 상태)에 빠지고, 이따금씩 관객이라는 무시무시한 대타자의 눈을 의식하면서 공포에 시달린다. 제작진은 도달불능점에 도달할 수는 있을 것인가, 그곳에 가면 무엇이 있을 것인가 끊임없이 의심하고 불화하지만(제작진들 사이에 다투었다는 소문이 무성하다), 그들 중 아무도 감독을 막을 자가 없다. 정말 이대로 영화가 완성될지 불분명한데, 제작기한은 다가오고, 시나리오 속 불행한 원정대가 바로 제작진 자신들이었음을 깨닫는다. 영화의 마지막 드디어 도달불능점에 도착하였지만, 누가 아니래나, 거기는 그냥 한점이었을 뿐이고, 해는 진다. 곧 영화는 끝난다. 감독은 그 이해도달불능점에서 “너는 나를 막을 수 있을 줄 알았다”는 원망을 누군가에게 풀어놓고, 다시금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향해 어둠 속으로 걸어간다.

이 과정은 상영관에서도 재현된다. 관객은 가벼운 마음으로 미스터리적 요소가 출몰할 때마다 저것들이 모두 해명되려니 기대한다. 중반이 넘어가면서 수습되지 않을 것 같은 불길함에 휩싸이고, 동시에 그것들이 해명되진 않더라도 이 고행에는 뭔가 의미가 있을 것이라 자위한다. 엔딩 시간의 재촉을 느끼면서, 이대로 끝나면 허무해서 어쩔 것인가를 곱씹지만, 예서 말 수도 없다. 도달불능점에 가면 뭔가 있지 않을까, 마지막 반전이라도 있지 않을까 설마설마 하다가, 도달불능점이 바로 ‘관객이해도달불능점’이라는 것을 깨달으며, 허탈하게 크레딧을 응시하는 것이다. 영화 전단지에는 “관객에게 영화 속 탐험에 동참하는 듯한 생생한 긴장감과 공포를 전하려 한다”는 감독의 말이 적혀 있다. 그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과연 감독의 ‘집념’은 제작현장과 상영관을 남극 이상의 썰렁함으로 얼어붙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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