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와 여자가 벤치에 앉아 있다. 남자가 무엇인가 물었고 여자는 귓가의 머리를 쓸어올리며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남자를 본다. <인터뷰>의 메인 이미지로 선택된 사진에서 배경이 되는 파리 센강의 풍경은 식별할 수 없을 만큼 희미하다. 마치 ‘여기가 파리라는 사실은 잊어도 된다. 이 아름다운 남녀에게 시선을 고정하라’고 주문하는 것 같다. 시선과 실루엣 만으로 이국의 풍광을 압도하는 그들은 심은하와 이정재다. 모름지기 배우라면 존재만으로 스펙터클이 되는 게 당연하지만 둘의 조화가 이루는 시각적 쾌감에는 남다른 데가 있다. 사람들은 그들의 만남에서 더하거나 뺄 것 없는, 구질구질한 삶 저 너머에 있을 것 같은 낭만적 신화를 예감한다. 영화제목이나 내용을 몰라도 그런 이미지가 노크할 때 무의식의 문은 쉽사리 빗장을 연다. 영화의 성패는 두고볼 일지만 둘의 사진이 담긴 포스터에 눈길이 오래 머무는 건 당연하다.
심은하
보통 빛은 어둠에서 돋보이지만 그녀의 환함은 맑고 투명한 배경에서도 빛난다. 티없이 부드럽고 초롱초롱한 심은하의 이미지는 <8월의 크리스마스>와 <미술관 옆 동물원>에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지만 순백의 화폭 같은 그녀는 어떤 색조도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다. <청춘의 덫>에서 한없이 착한 여자에서 눈초리의 한기가 전해지는 독한 여자의 면모까지 보여준 걸 보면 그녀가 한 세대에 한두명 나올 천부적인 배우라는 사실에 새삼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마지막 승부>로 데뷔하던 시절 그녀와 지금의 심은하는 마치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인다. 마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년간 못봤던 친구가 자신과 다른 차원에 속한 아가씨가 되서 나타난 듯 지금의 그녀는 모두 똑같은 옷을 입는다 해도 한눈에 알아볼,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자신만의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다. 그녀가 브라운관에 갇힌 배우가 아니라는 건 참으로 다행이다. 단지 심은하의 미모가 더 큰 화면에 어울리기 때문은 아니다. 그녀의 연기는 작은 화면과 규격화된 세트에선 눈치채기 힘들, 아주 사소한 몸짓과 눈짓으로 관객을 매혹시킨다.
-<인터뷰>를 택한 이유는.
=그동안 멜로영화를 몇편 해봤는데 이번엔 또다른 방식의 러브스토리를 해보고 싶었다. <인터뷰>를 처음 봤을 때 형식이 다르니까 새롭더라. 시나리오를 아주 재미있게 읽었고 다른 영화와 다른 독특한 재미가 있을 거 같았다.
-<인터뷰>에서 맡은 영희라는 인물은 시나리오만 봐서는 어떤 캐릭터인지 감잡기 힘든 인물이었을 거 같은데.
=과거에 했던 인물들과 영화 속 이미지는 크게 다르지 않다. 내겐 캐릭터가 분명하지 않다는 점이 오히려 매력이었다. <미술관 옆 동물원> <텔미썸딩>과 정반대 경우인데 영희란 인물이 내내 숙제로 남아 있었다. 시나리오 읽으면서 인물이 잘 보이지 않아서 더 파고들고 싶었던 거 같다. 변혁 감독에게 물었더니 어쩌면 은하씨랑 같을지 모르겠다, 자신의 사랑이야기를 해줬으면 싶다고 말했다. 그래서 찍으면서 내게 맞춘 부분도 있고 시나리오에서 없앤 장면도 있다. 카메라 앞에서 하는 얘기를 관객이 보면서 ‘어, 저게 영화 속 영희의 이야기인가, 심은하 이야기인가’ 헷갈리게 만드는 것이다.
-가장 기억에 남고 가장 힘들게 찍었던 장면은.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하는데 은석이 찾아와서 영희의 옛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이다. 변혁 감독은, 영희가 애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자살기도를 할 정도로 극단적인 감성의 여자일지 모른다며 그런 극단적인 모습을 이 장면에서 보여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평범하게 이야기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눈에 눈물이 고이는 걸 보여줘야 하는데 쉽지 않았다.
-여리고 순수해보이는 외모와 달리 독한 면도 있는 거 같다.
=생각보다 의지가 강한 편이다. 어려울 때 잘 넘어가고 대범하고 당당해지려고 한다.
-<8월의 크리스마스> 뒤 연기가 어느 경지에 이른 거 같다는 느낌이 든다.
=어떤 일이든 미치도록 열심히 하면 어느 순간 일에 대한 욕심, 열정이 어느 순간 보이는 거 같다. <8월의 크리스마스>가 내게 딱 맞는 작품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촬영하면서 힘들었고 엄살도 부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는데.
이정재
카리스마가 있는 배우를 만나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다. 대체로 눈빛만으로 압도하는 느낌을 주는 배우는 만들어지기보다 유전적으로 타고나는 쪽에 가깝다. 이정재가 <모래시계>에서 ‘발견’됐을 때 세공사의 손길이 닿지 않은 보석이라 느낀 사람은 대단히 많았다. 때문에 제대할 무렵 아직 이렇다할 히트작도 없는 그에게 억대의 출연료 제의가 잇따르기도 했다. 이때 출연한 <불새>와 <박대박>이 연달아 실패한 건 어느 정도 예정한 길이었는지 모른다. 그는 지금 그때를 “건방져 있었다”고 회상한다. “반성의 시간을 가졌다”는 흔한 표현을 쓰지만 빈말로 들리지 않는 것은 촬영현장에서 지켜본 사람들이 이정재에 대한 신뢰감을 자연스레 내비추기 때문이다. <정사> <태양은 없다> <이재수의 난>으로 이어지는 영화들에서 그는 잘생기고 키 큰, 섹시한 오빠에서, 체취가 묻어나는 젊은 남자로 변했다. 이재용, 김성수, 박광수 등 솜씨좋은 세공사들을 만난 탓도 있겠지만 자신을 돌아보고 훈련할 시련과 시간의 도움이 훨씬 컸을 것이다.
-<인터뷰>를 찍으면서 느낀 점은.
=<인터뷰>에 출연하기로 한 건 젊은 다큐멘터리 감독이라는 배역에 매력을 느꼈던 탓이 크다. 강한 이미지로 나온 영화가 많은데 이번엔 부드럽고 지성적인 인물이라 도전해보고 싶기도 했고 다큐멘터리와 극영화를 결합한다는 점도 신선했다. 실제로 연기하면서는 연륜과 공력이 부족한 한계를 많이 느꼈다. 어떻게보면 그동안 드라마의 굴곡이 심한 영화만 해서 일상적인 연기를 힘들어한 면도 있을 거다. 영화 자체가 아주 뚜렷한 드라마로 구성된 게 아니여서 무엇을 표현해야 된다는 상황없이 배우가 만들어야 하는 연기가 많았다. 상황이 뒷받침되지 않으니까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 고민도 많이 했다. 이런 연기를 하려면 정말 지성이 더 쌓여야겠구나, 싶더라.
-영화 속에서나마 감독을 해보니까 연출하고 싶지 않나.
=감독은 정말 똑똑해야 하겠구나 싶더라. 연출할 욕심은 없다. 무슨 일이든 어설프게 이것저것 하는 것 싫어한다. 연기하는 것도 벅찬데. 하지만 내가 찍으면 어떻게 할까는 늘 생각한다. 일종의 상상력 수업인데 시나리오까지는 아니고 간단한 시놉시스 정도는 혼자 쓰면서 어떻게 표현할까 고민한다. 쓰다보면 감정이나 느낌이 오고 표현력에 크게 도움이 된다. <태양은 없다>를 찍을 땐 실제로 김성수 감독이 슬픈 장면은 재미있게 찍고 재미있는 장면은 정적으로 찍자는 내 얘기를 들어주기도 했다.
-그동안 영화에서 뭔가 야심이 있는 젊은이로 그려지곤 했는데.
=하다보니까 그렇게 됐는데 이젠 나란 사람 자체가 그런 이미지로 굳어진 거 같기도 하다. 그러나 비슷한 배역만 하고 자꾸 그런 모습만 보여주니까 내가 보기에도 역겹다. 개인적으로는 카리스마가 강한 남자가 내면적으로 부드러운 멜로 영화의 주인공으로 나오거나, 부드럽기 이를 데없는 남자가 천하의 악당을 잘 소화할 때 새로운 매력이 보이는 거 같고 그런 상반된 모습을 소화하고 싶다.
-지금 촬영중인 <시월애>은 어떤 영화.
=도시에 사는 남녀의 사랑이야기인데 현재의 여자가 2년 전 과거의 남자와 소통한다. 혼자 사는 건축설계사로 쓸쓸함, 그리움 같은 감정이 묻어나는 남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