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리포트]
[현지보고] 제14회 프리부르국제영화제
2000-03-28
글 : 임안자 (전주국제영화제 부집행위원장)
전수일 감독의 <새는 폐곡선을 그린다> 황금의 시선상, 한국 다큐멘터리 7편 초청 상영

한국의 희망과 절망은 대륙을 건너

<새는 폐곡선을 그린다>

전수일 감독이 연출한 <새는 폐곡선을 그린다>가 올해 프리부르영화제의 대상 ‘황금의 시선’상(상금 1750만원)을 받았다. “프리부르가 어디지”하고 묻는 독자들이 많겠지만, 실은 90년대 초부터 한국의 여러 감독들이 이곳을 다녀갔다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한국영화계에 익숙한 영화제다.

올해 14회를 맞은 프리부르영화제는 1993년 영화제 창설 뒤 첫 회고전을 이장호 감독에게 안겨줌으로써 한국영화와 인연을 맺었고, 그뒤에 임권택, 장선우, 박광수, 배용균, 이명세, 이광모, 민병훈 감독 등의 작품을 해마다 끊임없이 소개해왔다. 그러다 올해는 장·단편과 다큐멘터리 여러 편이 한꺼번에 초청됨으로써 영화제의 핵심행사 대우를 받았다. 영화제 집행위원장 마르시엘 크네벨은 80년대 말 쯤 임권택 감독의 <씨받이>와 배용균 감독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을 유럽에서 최초로 배급한 스위스의 트리곤배급사 선정위원으로, 제1회 때부터 부산영화제를 발판으로 한국영화 발굴에 더욱 적극적이다. 더불어 트리곤배급사는 올해부터 부산영화제에 대표단을 보내 한국영화의 유럽 배급문제를 새로이 검토할 예정이다.

프리부르, 한국과 인연깊은 중유럽의 도시

올해 영화제 상영작은 모두 78편. 그 중에서 10편의 장편이 경쟁 부문에 초청됐다. 심사위원은 99년 <지구상의 삶>으로 유럽영화계에 선풍을 일으킨 아프리카 말리 출신 아브더라만네 감독을 포함하여 다섯명이었고 브라질의 해방신학 창시자로 유명한 레오나르도 보프 신부가 위원장이었다.

전수일 감독의 두 번째 작품인 <새는 폐곡선을 그린다>에 대상을 준 심사위원들의 발표문은 이렇다. “아주 촘촘한 구조를 갖춘 이 영화는, 때로 강렬하고 그러면서도 익숙한, 새들이 비상하는 모습의 원형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새들은 극 안에 있다. 새소리가 들리고 이들의 존재를 피부로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새들을 볼 수는 없다. 비상하는 새들의 강렬한 모습은 우리 모두의 꿈인 동시에 누군가에게는 현실로 다가옴을 (감독은) 뛰어난 시공간 처리법을 통하여 은유적으로 명시하고 있다. 희망은 쉽게, 기계적으로 오지 않는다. 오히려 희망은 찢어지는 아픔과 질곡의 과정을 통하여, 헐벗은 모습으로 어렵게 얻어진다.” <새는 폐곡선을 그린다>는 로잔의 이름난 영화학교(ECAL)의 졸업반 학생들로부터 올해의 영화공부 대상으로 점찍히는 바람에 전수일 감독은 영화제 기간중 학생들과 열린 토론을 가지기도 했다.

평소에 배용균 감독의 작품을 좋아한다는 전수일 감독은 영화의 작업방식이나 자기 자신과의 치열한 싸움을 통하여 독자적인 영상철학의 경지를 이룩하고 있다는 점에서 배 감독과 일맥상통한다. 그런데 올해 우연찮게 영화제 20주년 기념으로 배 감독의 두 번째 작품 <검으나 땅에 희나 백성>의 시사회가 마련돼 두 감독의 작품을 비교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됐다.

프리부르영화제에서 한국영화의 수상기록은 1994년 박종원 감독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 국제시네클럽상, 1998년 유상곤 감독의 단편 <길목>이 대상, 그리고 1999년 이광모 감독의 <아름다운 시절>이 다시 국제시네클럽상을 받았고 장편의 대상은 이번이 처음이다.

겉으로는 아주 허술해보이는 프리부르영화제의 뛰어난 점은 수상 영화를 포함한 경쟁 영화에 대한 알뜰한 뒤처리다. 보통 1회성으로 끝나는 다른 영화제들과는 다르게 이 영화제에 초청된 경쟁부문 영화들은 행사가 끝난 뒤에도 스위스의 32개 도시에서 일년 내내 순회상영된다. 주로 국내의 시네클럽 조직망을 통해 상영이 이뤄지지만 유럽의 다른 시네클럽과도 연결되어 있어 무명의 젊은 감독들을 널리 알리는 데 알게 모르게 막대한 기여를 하고 있다. 예를 들어 지난해 시네클럽상을 받은 박종원 감독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과 이광모 감독의 <아름다운 시절>이 같은 연결망을 거쳐 스위스 전역에서 상영됐고, 전수일 감독의 영화도 다음해까지 스위스의 곳곳에서 상영된다.

한국의 저항영화 섹션: 한국 다큐멘터리 7편 초청

<먼지의 집>

한동안 풍성한 말잔치를 불러일으켰던 국적불명의 포스트 모더니즘의 미학이 시들해지면서, 그동안 화면에서 사라지는 듯하던 리얼리즘이 요즘 다시 유럽영화인들의 주메뉴로 등장하고 있음은 주목할 만하다. 지난해 칸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은 벨기에영화 <로제타>가 그런 새로운 흐름의 대표적인 예이며, 그 밖에도 사회현실을 파고드는 영화들이 최근 유럽 각국에서 부쩍 많이 생산되고 있다.

한국에서도 포스트 모더니즘의 말장난이 유행하던 지난 20여년간, 국제영화제를 통해 비친 한국영화의 모습은 저항과 투쟁의 미학을 바탕으로 한 리얼리즘의 기조 위에 있었다. 로카르노영화제 집행위원장 마르토 뮐러는 박광수 감독의 <그 섬에 가고 싶다>를 경쟁부문에 초청하면서 “오늘의 감독들은 정치나 사회문제에 별로 관심이 없다. 그런 뜻에서 한국 감독들은 예외이며 그 점이 한국영화의 정체성이다”라고 했다. 물론 오늘 한국영화를 그렇게 간단히 하나로 묶어 설명하기는 힘들다. 사회가 변했고 영화의 사회적 기능도 바뀌었다. 아직도 과거와 현재의 정치나 사회문제를 캐묻는 영화인은 다큐멘터리 감독들인 듯하다. 80년대 젊은 감독들이 당시의 사회문제를 픽션의 우회적 방법으로 묘파했다면, 90년대 이후에는 다큐멘터리 감독들이 그 자리를 이어받은 셈이다. 이미영 감독의 첫 다큐멘터리 <먼지의 집>은 박광수 감독의 <우리도 그들처럼>의 무대였던 강원도 탄광지역으로 카메라를 가져 갔는데, 10여년전 문성근이 광부로 위장취업했던 그 지역은 폐광이 잇따르면서 실업자가 된 광부들이 극한 추위에서도 갈 데가 없이 거리를 헤매는 비참한 모습이 화면에 생생히 담겼다.

이런 변화를 반영이라도 하듯이 프리부르영화제서는 올해 “한국의 저항영화”라는 주제를 만들어 다큐멘터리를 중심으로 한 특별행사를 준비했다. 여기에 다큐멘터리 7편(<레드 헌트2> <민들레> <노래로 태양을 쏘다> <숨결> <꼭 한 걸음씩> <먼지의 집>)과, 실업문제를 다룬, 1999년 토리노영화제 대상 수상작 박홍식 감독의 <하루>, 아이들의 세계를 통해 군부독재시대를 은유한 권종관 감독의 <1970년 10월28일 일요일 맑음> 등 단편영화 2편, 그리고 앞에서 말한 배용균, 박광수 감독의 작품들과 장선우 감독이 영화100년 다큐멘터리로 만든 <한국영화 씻김> 등이 초청됐다.

한국에서 불법 영화로 수난당하고 있는 조성봉 감독의 <레드 헌트2>가 상영되던 날, 관객은 영화가 끝나고도 한동안 자리를 뜨지 않고 멍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최근에 일어난 유고전의 참상을 기억했을까, 50년 전 제주도에서 일어난 비극을 보고 난 이들은 말을 잊고 있었다. 그뿐이랴, 억울하게 죽어간 자식들의 명예회복을 위해 3년을 천막 속에서 살고 있는 유가족들, 한 개인병원의 인권탄압과 무서운 폭력, 평생을 탄광에서 보낸 광부들의 실업문제, 하나씩 외롭게 죽어가는 위안부 할머니들, 모두 답답하고 가슴을 짓누르는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다가간 카메라의 정신은 희망을 입증하고 있다.

특히 스크린쿼터제를 지키기 위하여 영화인들이 하나로 뭉쳐 할리우드와 한국 정부정책에 맞서 싸우는 장면을 생생하게 보여준 <노래로 태양을 쏘다>는 영화제 참가자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영화제쪽에서는 즉각 “한국영화의 아이덴티티를 위해 투쟁하는 영화인들에게 연대감을 보낸다”는 성명을 영진위에 보냈고, 프리부르지역의 일간지 <리버테>는 한 쪽을 할애해 한국영화에 대한 기획기사를 다뤘다.

변방 3대륙의 후원자, 문화교류의 모델

프리부르는 지리적으로는 독어와 불어권의 중간에 놓여 있는, 가톨릭 전통이 강하게 지배하고 있는 보수적인 소도시다. 1980년에 출범한 이 영화제는 처음에 격년제로 치러지다가 92년부터 연례행사로 바뀌었고, 설립동기나 행사 성격을 보면 낭트영화제와 비슷하다. 이제 ‘제3세계’라는 개념은 희미해졌지만, 둘 다 제3세계, 즉 아프리카, 아시아, 라틴 아메리카 3대륙에 중점을 둔 영화제들이다. 유럽시장에 진출하기 어려운 세 지역의 영화를 발굴하고 지원한다는 게 이 영화제들의 목적이다. 그런 이유로 3대륙과 연결돼 있는 스위스 정부의 경제, 기술지원 단체들이 프리부르영화제를 적극 지원하고 있으며, 몇년 전 유네스코로부터 문화교류 차원의 모델영화제로 지정됐다. 2년 전 쿠바의 전통깊은 영화학교(ICAIC)가 운영난으로 폐교 직전에 놓였을 때 이 학교의 학생작품들을 대대적으로 소개하는 동시에 후원금 모금 운동을 벌여 학교를 돕기도 했다.

올해 한국영화와 함께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단문제 그리고 80년대 이후 아랍지역 영화를 한데 묶은 아랍영화 회고전이 있었다. 그걸 계기로 튀니지의 나세르 케미르 감독이 영화제에 참가했다. 케미르 감독은 아랍의 전통적인 서예와 모자이크의 미학을 바탕으로 서정성이 넘치는 영화를 만들어왔는데, 그의 <사막의 경표 관리인>과 <비둘기의 잃어버린 목걸이>는 잘 알려진 수작이다.

영화제의 간이식당으로 쓰이는 천막 안은 큰 영화제서 좀처럼 만나기 힘든 세계적 대감독들과 쉽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곳이다. 아프리카의 가스통 카보레, 아르헨티나의 페르난도 비리, 쿠바의 토마스 알레아 궤라, 인도의 므리날 센, 대만의 허우샤오시엔을 나는 여기서 만났다. 이것은 분명 프리부르영화제 같은 작은 영화제의 좋은 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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