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관객, 포스의 균형을 회복하는 진짜 영웅, <스타워즈3>
2005-06-08
글 : 김혜리
<스타워즈 에피소드3: 시스의 복수>로 분명해진 <스타워즈> 시리즈의 개성

이게 다다. <스타워즈 에피소드3: 시스의 복수>(이하 <시스의 복수>)가 마침내 두건을 벗고 이로써 극장용으로 조지 루카스가 예고한 <스타워즈> 연작은 종결됐다. 포스의 어두운 면을 업신여기지 말라고 누누이 이르던 제다이 마스터들은 정녕 옳았다. 6부작에서 가장 어두운 추락의 악장인 <시스의 복수>가 프리퀄 세편 중 최고작이며 심지어 조지 루카스가 직접 연출한 네편(에피소드1, 2, 3, 4)을 통틀어 제일이라는 흥분된 감상은 광속보다 약간 느린 스피드로 전세계에 퍼져나갔다. 이런 호평은 사실 얼마간 예견된 것이었다. <시스의 복수>는 은하계의 정치적 소요와 그것의 잠정적 봉합을 묘사하는 데 그칠 수밖에 없었던 <스타워즈 에피소드1: 보이지 않는 위험>(이하 <보이지 않는 위험>)과 <스타워즈 에피소드2: 클론의 습격>(이하 <클론의 습격>)과 달리 이야기할 만한 이야기를 가졌기 때문이다. 공화정은 제정에 먹히고 예언의 영웅은 악의 사도로 전신하며 제다이는 시스에게 학살당하는 <시스의 복수>의 연대는, 축적된 양적인 변화가 비등점에 달해 역사의 질적 전화를 일으키는 대목이다. 자연히 연작 전체를 꿰뚫는 교훈과 메시지도- 만약 <스타워즈>에서 그것을 구하는 관객이 있다면- <시스의 복수>에서 어느 때보다 또렷하고 웅장하게 객석에 울려퍼진다. 첫째, 자유와 민주주의의 적은 언제나 당신이 사랑하는 것을 인질삼아 위협한다. 둘째, 그 유혹과 협박을 이길 수 있는 길은, 동양의 현자들이 설파한 대로, 초탈의 철학을 터득하고 섭리를 따르는 것이다(셋째, “내 편이 아니면 다 적”이라는 논리를 쓰는 위인은 시스 아니면 조지 W. 부시뿐이다). <스타워즈>의 태생적 결함은 변함없다는 진단도 한발 뒤에서 호평을 따라붙고 있다. 기초 영어교본 같은 루카스의 대사는 여전히 관객과 인물이 뻔히 아는 사실을 요약하는 데에 몰두하고, 가엾은 배우들은 그 대사를 끌어안고 분투한다. 오직 팰퍼타인/다스 시디어스(이안 맥디아미드)의 대사만이 월등한 설득력을 발휘하는 탓에, 은밀히 루카스의 대본을 고쳐주었다는 극작가 톰 스토파드의 손길이 닿은 부분이 아니냐는 추측도 낳고 있다. 그러나 많은 흠결에도 불구하고 <시스의 복수>가 적어도 이 결점들을 좀더 쉽게 간과할 수 있는 에피소드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어 보인다.

아주 오래 유예된 카타르시스의 폭발

적잖은 평자들은 <시스의 복수>에 쏟아지는 호의가 프리퀄 두편 이후 현저히 떨어진 기대치의 이면이라고 지적한다. 그렇다면 <보이지 않는 위험>(세계 수입 4억3100만달러)과 <클론의 습격>(3억1100만달러)에 대한 진짜 불만은 무엇이었을까? 루카스 필름의 한 관계자는 이 문제에 단순명쾌하게 답한 바 있다. “사람들은 오로지 다스 베이더만 원했다.” 다시 말해 애초 대중이 원한 프리퀄은 <시스의 복수> 하나였는지도 모른다. 이는 작가인 조지 루카스에게도 마찬가지여서 그 역시 30년 전 구상한 프리퀄 플롯의 60%는 <에피소드3>에서 일어난다고 밝힌 바 있다. 그렇다면 <에피소드1>과 <에피소드2>는 왜 프롤로그 자막이나 한편의 전사(前史) 에피소드로 뭉뚱그려지지 않았을까. 비즈니스적 동기는 미뤄두고 추측해보자. 2차 3부작이 전설 속 죽은 영웅의 부활인 양 예고되면서 <스타워즈> 프랜차이즈는 오리지널 3부작이 지닌 유희정신으로 충만한 모험담의 색채를 떨구고 일종의 현대적 신화의 풍모를 둘렀다. 오래전부터 꿈꾼 대로 <스타워즈>에 셰익스피어나 고대 그리스 비극의 비장미를 불러들이고자 했던 루카스는, 다스 베이더가 아주 선하게 시작해서 아주 악해진다는 것을 보여줘야 하며 그 과정은 충분한 시간을 들여야만 효과가 있다고 판단했다(<타임아웃> 인터뷰). 관객에게 <스타워즈> 프리퀄 3부작은 본질적으로 기나긴 기다림이었다.

<시스의 복수>가 프리퀄 3부작에서 1/3 이상의 비중을 차지한다는 사실은 엉뚱하지만 헤이든 크리스텐슨의 캐스팅으로도 확인된다. 그는 희로애락과 갈등을 편차없는 우울한 표정- 언제나 예정된 결말을 염두에 둔 듯한- 연기로 지루하게 표현해왔다. 크리스텐슨은 강하면서도 약한 청년 아나킨의 양면성을 고루 포용하지 못했다. 이 젊은 배우에게 어울리는 쪽은 약하고 불안한 아나킨뿐이었다. 그런데 시종 얼어붙어 있던 그가 <시스의 복수>의 클라이맥스에서 타오른다. 화산 행성 무스타파에서 사랑하는 여인을 원망하고 밀쳐내며 스승을 질투하고 핏발 선 눈으로 “나는 당신을 증오해”라고 울부짖을 때 이 젊은 배우는 비로소 그의 발탁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보여준다. 오직 이 장면을 위해 우리는 견뎌온 것이다. 요컨대 <시스의 복수>은 오랫동안 옷깃을 풀어헤친 채 갈가리 찢기기를 기다려온 팬들의 가슴에 마침내 꽂힌 칼날이며, 육중한 별들이 소멸 전에 보여주는 눈부신 슈퍼노바인 것이다.

관객이 같이 쓰는 영화

이처럼 약속된 카타르시스에 대한 관객의 기대는 <스타워즈>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스타워즈>라는 영화의 실체를 형성하는 요소다. 개봉에 즈음한 마케팅 소동과 사회 현상은 <스타워즈>를 블록버스터 중에서도 이른바 ‘이벤트 영화’의 대명사로 만들었다. 그러나 극장 안에 들어와 숨죽인 관객의 보이지 않는 내면에서 매우 특수한 수용 프로그램이 작동한다는 의미에서도 <스타워즈>는 이벤트 영화다. 이십세기 폭스의 팡파르부터 루카스 필름의 로고, 화면을 후려치는 ‘스타워즈’의 제목, 존 윌리엄스의 스코어 위로 우주 저편으로 날아가는 오프닝 자막에 이르는 단 몇분이 <스타워즈>가 주는 최고의 엔터테인먼트라고 느낀다면 당신은 이 프로그램을 내장한 관객이다.

물론 아직 도래하지 않은 사건과 운명에 의해 관객의 감정이 발생하는 것은 <스타워즈> 프리퀄뿐 아니라 널리 알려진 설화적 줄거리를 가진 모든 영화에 해당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작은 차이가 있다. 방대하고도 치밀한 원작이 존재하는 영화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 포터>에서 관객의 주된 관심은 소설 속 신비한 존재, 원작이 인상 깊게 그렸던 장면과 감정이 어떻게 스크린에 형상화됐는지 확인하는 데에 있다. 공인된 소설이 출간됐으나 그것이 영화의 부산물에 지나지 않는 <스타워즈>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관객이 알고 있는 것은 개요뿐이다. <스타워즈> 팬의 뇌세포는 영화가 보여주고 들려주는 순간부터 바쁘게 움직인다. 보이는 것 이면에 도사린 스토리를 상상하고 기존 정보에 끼워 맞춘다. 그런데 루카스씨는 상당히 불친절하다. 캐릭터는 단순하고 전개는 허술하다. 잘 만들었다는 <시스의 복수>도 빈틈투성이다. 파드메 아미달라의 현실정치가적 강인함은 어디 갔나? 제다이의 계율에 애착하던 청년이 어떻게 악몽만으로 어린이들의 학살자로 변할까? 오비완과 아나킨은 어떻게 별다른 저항도 없이 적의 심장부에 침입할 수 있었나? 비극적 3막 <시스의 복수>를 보는 동안 팬들은 말해지지 않은 사정과 갈등을 상상하며 텍스트의 빈틈을 열심히 메우고 장엄한 벽화를 완성해 거기에 감동받고자 한다. <롤링 스톤>의 피터 트래버스는 이를 “<벌거벗은 임금님>격의 현상”이라고 꼬집기도 한다. 어쨌거나 <스타워즈>는 관객의 유능함을 보여주는 한 극단의 예다. 사실주의적 디테일이 넘치는 영화를 보는 관객의 잠재의식이 지푸라기로 새끼줄 꼬듯 어떻게든 이야기를 추출하는 반대편에서, <스타워즈>의 관객은 듬성한 구조에 살을 채워넣는 것이다. <스타워즈>는, 아니 <스타워즈>여야만 하는 영화는 이미 관객 안에 있다.

화가/마법사가 된 감독

팬들의 충성과 향수가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다. <스타워즈>의 특수한 관람 방식은 조지 루카스의 연출 스타일과도 관련이 있다. 조지 루카스가 <스타워즈> 특히 연출을 전담한 프리퀄 3부작에서 주력한 연출 목표는 말이 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림이 되게 하는 것이다. 즉 영화의 구멍을 관객이 상상으로 메우도록 자극하는 시각적 큐사인으로 가득한 무대, 드림스케이프(dreamscape)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루카스는 프리퀄에 착수한 큰 동기가 테크놀로지의 도약이 비로소 “우주의 변방을 벗어나 중심부의 문명을 그릴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이라고 말한 바 있다. 프리퀄 3부작에서 각 프레임에 담긴 시각적 정보량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과잉하다. 과소한 이야기와 과다한 이미지 사이에서 관객은 자기도 모르게 조정자 역을 떠맡는다. 관찰자들이 전하는 대로 1977년 <스타워즈>를 발진한 이래 조지 루카스가 갱신에 주력한 영화 만들기의 부문은 비주얼과 사운드에 한정됐다. CGI와 실사 촬영된 배경, 세트를 경계 없이 융화시키는 작업에 있어서 루카스는 분명히 피터 잭슨과는 또 다른 경지를 성취했다.

전형적 캐릭터, 극단적 갈등, 아리아와 합창이 무대장치와 같이 폭발하는 정점들. <스타워즈>가 영화 이하거나 영화 이상의 무엇이라고 할 때, 가장 닮은 장르로 오페라가 떠오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시스의 복수>에서 팰퍼타인이 아나킨을 유혹하는 곳도 오페라 극장이다. 이들이 관람하는 은하계식 오페라는 뜻모를 빛이 소용돌이치는 투명한 구인데, 이것이 마치 <스타워즈> 세계의 엠블럼 같다. 결국 조지 루카스의 연출은 공간에 집착하고 시간을 회피하는 방향으로 진화해왔다고 말할 수 있다. 오리지널에 비해 이야기의 박진감이 희박해진 프리퀄에 실망한 관객에게 루카스는 “이것이 내가 원했던 <스타워즈>”라고 대꾸했다. 프리퀄의 편집을 지배하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공간의 논리다. 예컨대 <시스의 복수>의 본론은 코루산트와 다른 행성(유타파우, 카시크, 무스타파)을 교차편집한 덩어리의 연쇄로 구성되어 있다. 1940년대 TV시리즈에서 상속한 유명한 와이프아웃 장면전환 기법도 한몫을 한다. 연결의 이음매를 노출하는 이 기법은 영화의 움직임을 시간의 전진이 아니라 무대 공간의 전환처럼 보이게 만든다. 물론 모든 공간은 시간을 품게 마련이다. 그러나 <스타워즈> 프리퀄의 은하계는 그 안에서 누군가가 산 흔적이 전혀 없다. 흠집 하나 없는 벽에 둘러싸인 인물들은, 아무도 먹고 마시거나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코팅되어 액자에 넣어진 세계다. 그들은 오직 정치적 철학과 칼날을 맞부딪힐 때만 서로 접촉한다.

시간이 증발된 순환구조의 서사극

우리는 반문할 수 있다. <스타워즈>가 시간을 외면한다고? 뭐니뭐니해도 이것은 연대기 아닌가? <스타워즈>는 어느 블록버스터보다 통시적 서사가 중요한 구식 영화가 아니었던가? 조지 루카스가 두 세대에 걸친 시간을 다루기 위해 구사한 화법은- 마스터 요다의 말투처럼- ‘프리퀄’이라는 도치법이다. 여기서 비교 대상으로 떠오르는 영화는 물론 <엑소시스트>나 <텍사스 전기톱 살인사건>의 프리퀄이 아니라, 돈 콜레오네의 청년기로 거슬러올라간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대부2>일 것이다. 그러나 <스타워즈> 6부작의 시간은 <대부2>와 달리 안으로 닫아걸려 있다. 아들은 태어나고 자라 아버지의 길을 걷지만 그들을 둘러싼 시간의 흐름은 감지할 수 없다. 부자의 행로는 거의 복제된다. 어린 아나킨과 루크는 똑같이 타투인을 벗어나려고 하고 때마침 연연할 가족을 잃어 영웅의 장도에 오르게 되며 3부작 중 비슷한 시점에서 한팔이 잘린다(물론 <스타워즈>에서 팔 절단은 스카이워커 가문만의 피해가 아니지만). 루크와 반군은 <스타워즈 에피소드6: 제다이의 귀환>(이하 <제다이의 귀환>)의 말미에 제국군에 승리한다. 그러나 공인된 후일담에 따르면 루크와 동료들은 다시 패배를 맛본다. 루크와 레이아의 자식들도 영욕을 반복한다. 말하자면 이 연대기는 아나킨이 먼저 나오든 루크가 먼저 나오든 큰 차이가 없다. 이것은 영원한 순환의 구조에서 잘라내어진 하나의 단위(unit)일 뿐이다. 여섯개의 에피소드 중 네편이 승전과 전공을 기리는 집회로 마무리되고 두편이 패배를 어루만지며 끝나는 것은 순전히 영화가 편의적으로 선택한 리듬이다. 어차피 포스는 누군가의 영혼을 재로 만드는 제의를 거쳐 균형을 잃었다가 회복하기를 반복할 것이다. <스타워즈> 연대기에서 시간은 교묘하게 증발해버린다.

시간을 지우는 조지 루카스의 작업은 영화 안에 머무르지 않는다. 후반작업을 영화 만들기의 핵심으로 여기는 루카스는 끊임없이 영화를 고치고 덧칠하기로 유명하다. <스타워즈> 오리지널 3부작의 스페셜 에디션은, 어빈 커시너 감독과 리처드 마르캉 감독의 서명을 문지르고 루카스의 이름을 덧쓰는 동시에, 영화는 얼마든지 언제든지 새롭게 만들어질 수 있다는 루카스의 입장을 천명했다. <제다이의 귀환>에 영혼의 형태로 삽입된 헤이든 크리스텐슨의 이미지를 보는 순간 우리의 시계는 고장나버린다. 옛날의 <스타워즈>가 아무래도 기억나지 않으면서 덜컥 불안해진다. 이러다가 언젠가는 가필되지 않은 옛날의 오리지널 3부작이 빈티지 에디션으로 출시될지 않을까. 루카스는 자꾸만 화가나 마술사에 가까워진다. 영화란, 연출이란 어떤 것이어야 한다는 이야기에 무심할 만큼 그는 완고한 권력자다. 그러나 <스타워즈>는 관객을 통해서만 활성화되고 지상의 시간과 접속할 수 있는 의존적인 구조물이기도 하다. 조지 루카스는 세계 최고의 비즈니스맨이고 영상의 마법사이며 그렇게도 연약한 감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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