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수(김상경)는 “이제 생각 좀 하고 살아야겠다”고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으로 결심한다. 이 결심이 <극장전>의 결말이며,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내레이션이다. 내레이션은 주인공의 마음속을 직접 들려주는 편리한 그리고 매우 인위적인 도구다.
우리는 동수의 머릿속이 궁금했다. 저 인간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걸까. 영화 한편 보고 난 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을 불편하게 하고, 무명 여배우를 만나 하룻밤을 같이 지냈으며, 병든 선배 문병한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는 일 없는 이 한심한 영화감독은 대체 어떤 인간일까. (시사회 때 한 관객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영화를 만드셨나요”라고 천진난만하게 감독에게 질문했다. 그도 무척 궁금했던 모양이다.) 동수의 내레이션이라면, 뜬금없이 튀어나오긴 하지만, 우리의 궁금증을 마침내 풀어주리라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동수는 우리의 기대를 간단히 저버린다. 그의 이상한 독백을 듣고 우리는 이렇게 독백한다. 이제 생각 좀 하고 살겠다니. 그게 다야? 도대체 어떻게 살겠단 말인가. 다음부턴 좀더 노련하게 여자를 꼬시겠다는 건가. 동수의 독백은 이렇게 들린다. “당신은 지금까지 저의 생각없는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하룻동안의 행적을 보셨습니다” 혹은 “제 결심을 귀담아듣지 마세요”.
<극장전>, 홍상수 필모그래피의 자축연
반복하자면, 그의 결심이 영화의 결말이다. 그의 결심은 텅 빈 이야기의 텅 빈 매듭, 혹은 끝내질(結) 수 없는 이야기의 묶여질(結) 수 없는 매듭이다. <극장전>이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열린 구조의 영화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이 영화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지만 영화는 어쨌든 끝나고 영실(엄지원)의 말대로 우리는 집으로 가야 한다. 그것이, 거창하지만, 영화의 운명이다.
동수의 결심은 엔딩 크레딧처럼, 혹은 그가 보고 나오는 중편영화의 음악처럼 영화의 그런 운명을 알리는 표지다. <생활의 발견>의 경수처럼 여자의 대문 앞에서 비를 맞고 기다리고 있거나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의 문호(유지태)처럼 길거리에 멍하게 서 있거나 <극장전>의 동수처럼 단호하게 결심하거나 달라지는 건 없다. <극장전>은 그런 영화다. 영화의 운명 외에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영화이며, 그 안에서 어떤 다른 걸 채워넣어도 달라질 수 없다고 말하는 영화다. 운명이 그렇다면 그 운명을 감추지 말고 차라리 그것으로부터 어떤 귀여운 순간을 찾아내는 편이 낫다. <극장전>은 거기서 시작된다. <극장전>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재미있게도 홍상수의 다른 영화들을 함께 만난다. <극장전>은 홍상수 필모그래피의 자축연처럼 보인다.
텅 비어 있다고 말했지만, 실은 무언가 그 안에서 말해지고 있다. 그것은 남녀의 구애다. 이 방면에서 홍상수는 인류학자적 관찰력을 갖고 있지만, 그의 영화가 구애의 민속지(이 표현에 가장 잘 어울리는 건 <오! 수정>이지만 이 영화는 홍상수의 다소 예외적인 영화다)는 아니다. 구애의 과정에서 등장하는 섹스라는 행위와 사랑이라는 단어의 함축이 홍상수의 영화적 전략에 가장 유용하기 때문에 선택된 소재일 뿐이다.
홍상수 영화의 구애담에는 일정한 패턴이 있다. 남자가 떠난 곳에 여자는 남고, 남자가 도착하면 여자는 떠나며, 남자가 기다리면 여자는 오지 않는다. 여자는 남자의 도착하지 않은 과거이거나 지나가버린 미래다. 홍상수의 남자들은 결국 <생활의 발견>에서 대문 앞의 경수처럼 공주를 숨긴 회전문 앞의 뱀꼴을 못 면한다(과거와 미래의 자리에 기억(<오! 수정>)과 꿈(<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과 설화(<생활의 발견>), 영화(<극장전>)가 들어서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홍상수의 영화에서 그것들은 연속 컷처럼 현재와 이어져 있지만 손을 뻗으면 사라진다). 남자와 여자의 사이는 비어 있는 현재이며, 그것을 홍상수의 인물들은 필사적으로 채우려 하지만 대개 실패한다. 남자는 섹스에 성공하지만 그것의 지속은 실패한다.
섹스는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그것이 유일하게 성공한 것처럼 보였을 때 즉 결혼이라는 지속이 일정하게 보장되는 요청이 받아들여졌을 때, <오! 수정>의 재훈(정보석)은 “목숨을 걸고 단점을 고치겠다”고 결심한다. 당연한 일이다. 그건 목숨을 걸 만한 일이다. 재훈도 생각을 하며 살고 싶었던 모양이다. 물론 그의 결심을 믿을 수는 없다. 그의 결심 역시 동수의 결심만큼이나 난데없기 때문이다. 재훈에게 수정은, 그가 무심결에 희정이라고 이름을 잘못 불렀을 때, 고정되지 않은 존재다. 그 이름은 이미 지나갔거나 아직 오지 않은 이름이며, 수정도 마찬가지다. 그것의 지속을 가능케 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한다. 그래도 아마 실패할 것이다.
섹스는 활발한 대상이지만, 거기에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이자 흐물흐물해진다(그러면 경수처럼 섹스도 못하게 된다). 사랑이란 말은 늘 실패의 징후로 등장한다. <생활의 발견>에서 경수와의 섹스를 지속시키려는 명숙(예지원)이 “절 사랑하세요”라고 묻자 경수는 대답을 피한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 그는 선영(추상미)에게 “사랑해요”라고 말한다. 물론 명숙과 경수는 실패한다. 여기서 실패는 대상의 상실이 아니다. 사랑하는 대상을 잃어버렸다는 의미에서 실패가 아니라(이 경우 사랑이라는 감정 자체는 지속된다) 사랑이라 불리는 감정 자체가 실패한 것이다. <극장전>의 동수가 “사랑” 운운하자, 영실이 “당신이 사랑하긴 뭘 사랑합니까”라고 따끔하게 야단친다.
지속의 실패의 결과는 상실이나 결여가 아니라 원천적 공허의 재확인이다. 지속의 실패가 예감될 때,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유혹이다. 그것은 선택가능한 것 중에서 유일하게 완전하고 지속되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생활의 발견>에서 경수의 난데없는 “우리 같이 죽을까요”라는 대사는 <극장전>에서 상원(이기우)과 동수의 입으로 반복된다. 그러나 죽음은 지각되지 않는 대상이다. 홍상수의 영화에서 지각되지 않는 것은 표현되지 않는다(홍상수는 지식을 표현하지 않는다. 혹은 경수는 스콧 니어링의 자서전 본문을 결코 읽지 않는다. 그가 반복해서 보는 건 첫 페이지의 사진뿐이다). 그러므로 죽음은 결코 표현될 수 없다.
죽음은 그것을 맞는 인물 이전에 홍상수의 영화가 두려워할 대상이다. 홍상수의 영화에서 죽음은 유혹이면서 불길한 그림자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에선 살인극이 벌어지고, <강원도의 힘>에선 모호한 살인극이 스쳐지나가며, <극장전>에선 죽음을 앞둔 인물이 전후반에 등장한다. <극장전> 속의 영화에서 상원의 실패한 자살 소동은 이 영화를 만든 선배 감독의 “나 죽기 싫어”라는 말의 메아리다.
반복하자면 홍상수의 구애담에서 중요한 건 섹스라는 1회적 행위의 성공이 아니라, 그것의 지속의 실패다. 그의 영화의 이야기가 텅 비어 있다거나 무의미하다는 말은 지속의 실패를 뜻한다. 지속되지 않으므로 의미는 미끄러지는 게 아니라 지워진다. <강원도의 힘>에서 지숙은 전반부에서 아파트 복도에 새겨진 ‘조금만 더 긴 호흡으로 살아가자’라는 낙서를 지운다. 상권은 후반부에 그 글을 쓰지만, 그 글은 이미 지워진 글이다. ‘긴 호흡’의 자리는 홍상수 영화에 없다.
홍상수 세계의 시간이 점점 짧아지는 이유
지속의 실패는 역사적 시간으로의 편입의 실패다. 홍상수의 영화가 다루는 시간은 역사적 시간으로부터 이탈한, 육체적으로 체험되는 시간 혹은 현상학적 시간이다(혹은 정승훈이 말한 탈근대적 시간이다). 홍상수의 영화에는 생성과 축적을 가능케 하는 선형적 시간이 없으므로, 성장은 불가능하며 역사적 시간은 그의 영화 밖에 있다. <극장전>에서 한 인물의 소년기와 청년기이기도 한 상원과 동수는(동수는 영화 속 상원을 두고 “저건 내 얘기야”라고 말한다) 나이 차이가 10년은 돼 보이지만, 동수가 섹스를 더 잘한다는 것 외에는 하는 짓이 비슷하다.
홍상수의 영화 속 시간이 점점 짧아지는 건 우연이 아니다. <생활의 발견>은 1주일,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는 2일, <극장전>은 24시간 안에 벌어진다. 그것은 훨씬 더 줄어들 수도 있다. 홍상수는 시장에 물건 사러 가는 과정만으로도 한편의 영화를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평면적이고 딱딱한 느낌의 시각적 배경, 얕은 공간 포착, 드문 롱숏 등의 시각적 스타일도 다. <극장전>에서 보통은 인물의 심리를 드러내기 위해 사용되는 줌인과 보이스 오브 내레이션이 사용되지만, 김혜리가 지적했듯 그것은 홍상수의 세계를 크게 흔들어놓지 않으며, 오히려 인물의 내면이 텅비었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그런 면에서 <극장전>은 ‘변모’와 ‘발전’을 기대하는 일부 평자들에게 보내는 답장일 수도 있다. 그는 짓궂게도 바꾸라고 한 건 바꾸지 않고, 있어서 좋다고 한 것을 바꾼다).
홍상수의 영화는 실패한 지속들, 혹은 지속되지 않는 것들의 배열이다. 시간이 선형성을 잃고 의미가 생성 축적되지 않는다면 영화의 구성요소들은 규범적인 자리를 배정받지 못한다. 그들은 있을 법한 곳에 없고 있을 법하지 않은 곳에 출몰한다. 무원칙해 보이는 이들의 배열 방식 가운데 하나는 이젠 꽤 잘 알려진 대로 차이와 반복, 혹은 유사성의 산재다. 비슷하지만 서로 다른 상황과 이미지와 말들이 내면적 연관없이 다른 시점에 다른 곳에서 등장하는 장면들의 사례는 위에 적은 것들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홍상수는 여전히 홍상수다
인물이 주체이며 학습 효과인 모방은, 평자들에 의해 지나치게 강조되는 경향이 있지만, 반복의 한 종류일 뿐이다. 더 중요한 건 인물의 학습이 매개되지 않은 차이와 반복이다. <생활의 발견>에서 경수와 선배는 춘천에서 혼자 온 여대생을 은근히 유혹하려 한다. 경주에서 추상미는 춘천에 갔을 때, 두 남자가 자신을 유혹했다고 말한다. <극장전>의 영화 속 영화에서 남녀는 안경점 안과 밖에서 만나지만 영화 밖에선 안경점 앞에서 만난다.
이 상황들이 하필 거기 있을 이유는 전혀 없다. 오직 홍상수라는 창작가의 직관이 그것을 원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존재 이유는 그들의 배열이 만들어내는 합주의 리듬이다. 실은 그 리듬이 홍상수 영화의 모든 것이다. 그리고 그 리듬은 정교하며 종종 아름답다.
<극장전>의 멋진 장면 하나. 영화 속 영화가 끝나고 동수가 극장 밖을 나오는 순간 영화 속 엔딩 음악은 연장되면서도 톤이 미묘하게 바뀐다. 잠시 뒤 동수가 영실을 쫓아가면서 이어폰을 낄 때 요한 스트라우스의 행진곡이 울려퍼진다. 동수는 자기가 주인공이 되어 영화 속으로 다시 들어온 것이다. 사운드의 디제시스와 비디제시스의 경계 이동과 동수의 영화 안팎 경계 이동을 절묘하게 엇갈려놓은 이 두 장면은 차이와 반복이 빚어내는 매혹적인 대비의 사례다. 이건 매우 아름다운 리듬이다.
홍상수의 영화는 지속성을 잃어버려 의미를 배당받지 못한 것들이 벌이는 잔치판이고 대화이며 합주다. 거기다 의미와 가치를 요구하는 건 스콧 니어링의 사진만 보고 있는 경수에게 “책을 참 열심히 읽으시네요”라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엉뚱한 일이다. 그게 소란으로 들린다 해도, 그 소란마저 영화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지속 불가능한 것들을 배열할 수 있는 유일한 매체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영화 역시 지속불가능하다. 그게 <극장전>이라는 영화의 운명이다. 우리는 영실의 말을 들어야 한다. “자기 재미 봤으니까, 뚝! 이제 그만!” 홍상수는 여전히 홍상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