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불행의 또다른 속성을 잘 알고 있는 영리한 드라마, <시암 선셋>
2000-03-21
글 : 허문영 (영화평론가)

행여 작은 불행이라도 닥칠까 두려워 “난 원래 재수가 없어”, “내 복에 무슨…”이라며 본능처럼 마음의 벽을 치고 살지만, 진짜 재수없는 사람이 있긴 있나보다. <시암 선셋>의 가련한 주인공 페리. 남부러울 것 없는 화이트칼라였지만 비행기에서 떨어진 냉장고로 집 정원에서 아내를 잃은 뒤부터 정말 재수 옴붙은 인생이 된다. 라디오 방송의 코멘트, “화물운송 비행기에서 냉장고가 떨어져 사람이 죽었다는군요. 하하하, 죄송합니다. 앞으론 냉장고도 조심해야겠습니다, 하하하.”

불행은 늘 비감한 색을 띠진 않는 법. 어처구니없는 불행, X차에 받혀 죽는 것처럼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불행이 아내 대신 삶의 반려자가 된 페리의 인생에는, 동정마저 진중할 수가 없다. 하늘을 날던 비둘기도 그의 옆에선 괜히 벽에 머리를 부딪쳐 죽고, 길가던 노파는 이유없이 계단을 구르며, 고장난 덤프트럭은 꼭 그의 집을 향해 돌진한다. 그가 머무는 곳에선 멀쩡하던 세상이 어김없이 궤도를 이탈한다. 머피의 법칙을 열배쯤 불려놓으면 페리의 법칙이 된다. 신은 유독 그에게만 너무 짓궂다.

<시암 선셋>은 기왕의 드라마가 놓쳐왔던 불행의 또다른 속성을 잘 알고 있는 영리한 드라마다. 보통의 경우라면 이런 인물은 코미디에서 놀아야 한다. <프록터의 행운>에서처럼 정말 모자라는 주인공에게 이런 불행이 닥쳐야 보는 사람이 마음놓고 웃을 수도 있다. 하지만 <시암 선셋>은 그럴 수 없는 영화다. 그렇게 아름답고 청초하던 여인이 느닷없이 하늘에서 떨어진 냉장고에 깔려 빈대떡이 돼버렸으니, 그 꼴을 지켜본 남편 얼굴을 어렵게 외면하며 킥킥 솟아나는 웃음을 누를 수밖에. <시암 선셋>은 이런 당혹스러운 감정을 꽤 능숙하게 조종하며, 우스운 것은 아무래도 우습다, 라는 당연하지만 쉽지 않은 결론과 인생이란 결국 그런 우스꽝스럽고도 고통스런 불행을 미운 이웃처럼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살아갈 때 작은 행복이라도 다가온다, 라는 역시 평범하지만 한번쯤은 되새길 만한 교훈을 전해준다.

오스트레일리아를 무대로 오스트레일리아 감독이 만든 <시암 선셋>은 같은 이야기를 하더라도 할리우드와는 다른 오스트레일리아 특유의 거칠지만 싱싱한 기운이 있다. 무엇보다 장르적 관습으로 걸러지지 않은, 투박하지만 정이 가는 주변 인물들이 그렇다. 페리와 같이 여행하는 사람들은 이야기에 딱 맞아떨어지는 윤기 대신, 삶의 바다에서 바로 끌어낸 듯한 생기가 있다. 자기를 싱어 송 라이터로 소개하는 멍청한 아저씨, 매끈한 관광버스와의 경주에 결코 지기 싫어하는 불친절하지만 이상한 열정을 가진 운전기사, 지저분하고 인간성이 얄팍한데도 밉지 않은 사막 카페 주인 부부는 초반부에서 웃어야 할지 찡그려야 할지 몰랐던 관객의 마음도 얼마간 누그러뜨리면서, 주인공의 불행 체감 온도를 낮춰주는 역할을 한다.

시각적으로도 매끈하지 않아서 오히려 편하다. 애리조나 사막이었으면 황량한 중에도 어딘지 낭만적인 정조가 배어 있었을 테지만, 오스트레일리아의 사막은 가차없이 우중충하다. 아무리 그래도 선진국 오스트레일리아인데, 라는 선입관을 끝까지 저버리면서 감독은 그저 추레하기만 할 뿐인 인간들을, 홍수 한번으로 1주일 동안 세상과의 통로가 끊기는 사막 한가운데로 밀어넣고서는, 여기까지 왔으니 이제 남 눈치보지 말고 우스운 건 웃어버리자고 넌지시 그러나 효과적으로 제안한다. 불행지수로 치면 더 갈 곳 없어 보이는 바로 이 황폐한 벌판이 ‘왕재수’ 페리의 삶이 새로 시작될 공간이다. 산다는 건 뭐 특별할 게 없다. 떨어지는 냉장고에 깔려죽지 않을 정도의 평범한 행운만 있으면 살 만한 거다. 페리가 찾던 시암 선셋은 이렇게 후줄근한 곳에 있었다. 미리 알면 재미없을 기발한 라스트신은 그렇게 말하고 있다.

특별히 내세울 게 있는 걸작은 아니지만 1999년 칸영화제 감독주간에 초청돼 관객상 수상작의 하나로 뽑힐 정도의 호의는 얻었고, 지난해 부천판타스틱영화제에선 대상을 수상하며 한국 관객의 애정을 듬뿍 받았다.

<시암 선셋>을 만든 사람들

호주의 명계남, 메가폰을 잡다

이 영화로 감독 데뷔한 존 폴슨은 스크린과 연극무대를 오가며 맹활약해온 오스트레일리아의 일급 배우. 한국의 최종원이나 명계남처럼 연극계 스타였고 스크린에선 명조연으로 이름을 날렸다. 1993년부터는 오스트레일리아 단편영화제인 TROPFEST를 설립해 집행위원장을 맡았고, 1995년 단편 <무슨 일이야 프랭크>로 시카고영화제 은상, 시드니영화제 단편상을 받으면서 감독의 가능성을 엿보였다. 데뷔작이 칸영화제 감독주간에 초청되면서 꽤 성공적인 데뷔를 한 셈. 최근에는 <미션 임파서블2>에 출연했다.

색채에서부터 오스트레일리아적인 냄새를 물씬 풍기는 촬영은 <프리실라>(1994)를 찍었던 브라이언 브레니가 맡았다. 프로듀서 앨 클락 역시 <프라실라>에서 프로듀서 겸 배우(목사 역)로 작업했고, 할리우드에서 이원 맥그리거가 주연한 <아이 오브 비홀더>(1999)를 공동제작하기도 했다. 두 각본가 중 맥스 댄은 흥행 홈런을 친 코미디 영화 <빅 스틸>(1990)의 시나리오를 썼고, 앤드루 나이트와는 <스탑스우드:일급 전문가>(1991)에서의 공동작업으로 오스트레일리아 코미디사상 최고 흥행기록을 이미 세웠다.

가녀리고 준수한 외모지만 망가지는 것도 어울리는 주연 라이너스 로치는 동성애 신부를 다룬 문제작 <프리스트>로 데뷔하면서 한국 관객에게도 낯익은 배우. <프리스트>에 이어 헬레나 본햄 카터와 <비둘기의 날개>에서 공연했고, <시암 선셋>으로 연기의 폭을 넓혔다. 갱의 여자 그레이스 역의 대니얼 코맥은 뉴질랜드의 일급 스타. 빼어난 미인은 아니지만 선이 굵고 섹시한 코맥은 해리 싱클레어 감독의 <토플리스 걸들이 자신의 삶을 말하다>로 뉴질랜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스타덤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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