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뉴스]
[스크린 속 나의 연인] <영웅본색>, 그리고 <천녀유혼>의 왕조현
2005-06-09
피가 끓어오르던 고등학교 시절 성숙한 여인의 모습으로 다가왔다
<천녀유혼>

어릴 때부터 영화보다는 음악을 좋아했기 때문에 좋아하는 배우보다는 좋아하는 가수가 더 많았다. 인기 정상에 서있는 당대 최고의 여배우들도 많았지만 그들에게 연인이나 이성적인 매력을 별로 느끼지 못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왕쭈셴(왕조현)은 달랐다. 그는 피가 끓어오르던 고등학교 시절 나에게 여인으로 다가온 첫 여배우였다.

<영웅본색>과 <천녀유혼>은 80년대 중후반 고등학교 시절을 보낸 대다수 사람들이 잊지 못하는 홍콩 영화일 것이다. 강호의 의리가 사라졌음을 개탄하며 한 줌의 쓴 웃음을 지어보이던 저우룬파(주윤발)의 고독한 모습과, 금방이라도 굵은 눈물을 흘릴 듯한 왕쭈셴의 커다란 눈망울은 내 마음 속에 깊은 자국을 남겨 놓았다. <영웅본색>을 먼저 보고 <천녀유혼>을 보기 전까지 나는 약간 망설였다. 누아르가 아닌 시대극이라서 머뭇거렸는데 영화를 보면서 시간이 흐르는 게 아까울 만큼 그 속에 빠져들었다. 어리숙하면서도 맑은 심성의 선비 ‘영채신’(장궈롱:장국영)과 청순가련한 귀신 ‘섭소천’(왕쭈셴)의 애절한 사랑은 슬프도록 아름답게 어우러졌다. 서둘러 비디오 테이프를 빌린 나는 되감기와 빨리 감기를 수없이 반복하며 왕쭈셴이란 여배우에게 빠져들었다. 옷을 벗어 장궈롱을 감추던 장면, 나무 욕조에 밀어 넣고 입 맞추는 장면은 수십 번을 반복해서 봐도 좋기만 했다. 끝내 둘이 함께 하지 못하는 끝 장면에선 늘 한숨을 내쉬곤 했다. <천녀유혼>에서 왕쭈셴은 애처롭고 가녀린,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눈물을 머금은 그의 커다란 눈을 보고 있으면 정말이지 무슨 일이든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한 모습은 당시 포르노와 도색잡지를 통해서만 성에 대한 허기를 채울 수 있었던 나에게 여인의 의미로 다가왔다. 그것도 성숙한 여인의 모습으로. 너무나도 마음을 아프게 했던 영화 속의 슬픈 사랑은 곧바로 ‘왕쭈셴 열병’으로 전염됐다. 저우룬파, 예쳰원(엽천문)과 함께 한 코미디 영화 <대장부일기>도 무척 재미있게 봤다. 물론 그 중심에는 치렁치렁한 고전의상을 벗어던진 늘씬한 몸매의 그가 있었다. 발 빠른 친구가 구해온 왕쭈셴의 농구선수시절 비디오를 보며 즐거워했고, 그가 광고하던 음료수를 열심히 사마시기도 했다. 한번은 친구들 사이에서 ‘장궈롱은 왕쭈셴의 맨몸을 봤다, 못 봤다’로 논란이 분분했는데 야한 영화에 도가 터있던 한 녀석이 ‘중요한 부분은 가린다’는 결론을 내놓아 모두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한 가지 아쉬운 건 <천녀유혼> 이후의 작품들에선 그 특유의 애틋한 매력이 잘 살아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너무 가공된 애처로움만 강조한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송기철/대중음악 평론가

얼마 전 왕쭈셴의 뚱뚱해진 모습이 전해져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여러 소문 끝에 다음 영화를 위해 일부러 살을 찌우고 있다는 얘기가 전해졌는데, 그가 살이 찌건 마르건 내게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나에게 왕쭈셴은 언제나 <천녀유혼>의 ‘섭소천’ 바로 그 모습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글을 쓰기 전에 <천녀유혼>을 다시 한번 보려다가 오히려 예전의 설레던 마음이 퇴색할 것 같아 그만두었다. “인간이 귀신보다 잔인해”라는 ‘섭소천’의 슬픈 대사를 가끔씩 느끼는 나이가 됐지만 나에게 왕쭈셴은 여전히 눈부신 아름다움으로 기억되고 있다.

송기철/대중음악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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