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S>6월12일(일) 밤 11시 45분
망부석처럼 바다를 바라보며 서 있는 제주 외돌괴의 모습으로 시작해 감귤밭 등 제주의 풍광을 보여주면서 시작하는 <고원>은 1960년대 당시 “한국의 누벨바그 감독”으로 일컬어진 이성구 감독의 멜로드라마다. 정비석의 원작을 김지헌이 각색하고 장석준이 촬영한 이 작품은 한 남자와 두 여자의 삼각관계를 축으로 세 사람의 10년간의 가슴앓이를 그리고 있다. 첫 장면부터 디포커스(defocus)된 화면이 모습을 드러내면 누워 있는 주인공의 얼굴이 보이고, 그가 얼굴을 돌리자 죽은 듯 누워 있는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이 보인다. 시작부터 두 남녀 사이의 오래된 과거의 이야기를 뿌려놓을 것 같은 분위기를 흠씬 느낄 수 있다. 두 사람의 가슴 아픈 사연은 “슬퍼지기 위해 맺어진 인연이 있다면 그 인연이야말로 우리 둘일 게요”라는 김진규의 첫 대사에서부터 짐작이 간다. 친구 집에 세들어 사는 화가 현오건(김진규)과 그를 마음속으로 사모하고 있던 친구(박암)의 부인 채옥(김지미), 그리고 친구의 여동생 영주(남정임)의 슬픈 사랑과 엇갈린 운명. 그들은 전쟁이라는 혼돈 속에서 발화된 욕망의 화신의 저주 속에 평생을 살 수밖에 없다. 자력에 이끌리듯, 10년이라는 시간과 제주와 서울이라는 공간도 단숨에 넘어 만난 영주와 오건이지만, 그 10년만의 만남은 채옥의 자살을 불러오고, 결국 두 사람 역시 마지막 포옹을 끝으로 영원히 만날 수 없는 시간과 공간으로 걸어가고 만다. 그것도 아주 힘없이…. 거의 모든 장면전환에 쓰이는 디포커스처럼 그들의 사랑은 희미한 기억 속에서만 존재할 뿐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