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spirit이 한국말로 뭐지? <허리케인 카터>의 덴젤 워싱턴
2000-03-21
글 : 박은영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예정대로라면, 그는 벌써 이 방에 와 있어야 했다. 지난 2월19일, 베를린 포시즌스 호텔 411호. 한국 기자 다섯이 덴젤 워싱턴(45)을 기다리고 있었다. 브에나비스타의 한 관계자 말이, 어젯밤 한 파티에서 누군가 그에게 “한국은 흑인이 주연하는 영화를 좋아하지 않아서, 예외없이 흥행이 저조했다”는, 어쩌면 인터뷰에 치명적일 수 있는 ‘정보’를 흘렸다는 것이다. 안 그래도, 그는 이틀 전에 열린 베를린영화제 공식 기자회견에서 내내 얼굴을 굳히고 앉아 있었다. 누군가 할리우드에서 흑인 스타로 살아가는 부담을 묻자, “부담? 이렇게 기자회견에 참석해 마이크를 앞에 두고 앉아 있는 것이 바로 부담”이라고 답했던 것을 보면, 그는 천성적으로 대중 앞에 나서거나 말하길 즐기지 않는 것 같았다. 과연 이 인터뷰를 탈없이 마칠 수 있을지, 걱정스레 15분 정도를 기다렸나보다. 테이블 뒤편 출입구쪽에서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크고 단단해 뵈는 체격에 온화한 미소를 머금은 흑인 하나가 걸어들어왔다. 덴젤 워싱턴이었다. 찬찬히 눈을 맞추며 유쾌하게 인사를 건네는 그를 보면서, ‘편견’만큼 위험한 것이 없다고 반성하고 또 했다.

그건 <허리케인 카터>에서 덴젤 워싱턴이 온몸으로 전한 메시지이기도 했다. 클럽 살인사건의 범인이라는 누명을 쓰고 22년간 수감된 권투 선수 루빈 허리케인 카터의 실화를 영화화한 <허리케인 카터>. 인생의 절정기에 백인사회의 편견에 짓밟혀 증오를 키우지만, 결백을 믿는 친구들의 믿음과 사랑으로 자유를 찾는 한 흑인 복서의 일대기에서, 그는 그 감정과 그 세월의 격랑을 노련하게 헤엄친다. 92년 영화의 원작인 <제16 라운드>를 읽고, 영화로 만들어질 순간만을 고대했다는 그는, 배역을 따내고 맞추는 작업에 유난히 극성을 부렸고, 노먼 주이슨 감독은 그런 그에게 “내가 만난 가장 열정적인 배우”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럴 만했다. 그는 허리케인 카터의 외양까지 닮고자, 프로권투선수를 섭외해 6개월의 혹독한 훈련을 거쳤고, 몸무게도 40파운드나 줄였다고 했다. “지금? 물론 원상복구했다.” 두둑해진 배를 툭툭 두드려 보이며 그가 웃었고, 인터뷰는 자연스럽게 <허리케인 카터> 이야기로 시작됐다.

-실존 인물을 연기하는 것이 어렵진 않았는지.

=그 사람의 정신, 영혼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흉내내려고 하진 않았다. 말콤X나 허리케인 카터는 고된 시련을 통해 내면이 성숙해지는 인간들이다. 그들이 어떤 계기로,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보여주는 게 포인트라고 생각했다.

-루빈 허리케인 카터의 존재가 부담스럽진 않았나.

=그가 영화를 보고 만족스러워할지, 즐거워할지 잘 모르겠다. 준비하면서, 촬영하면서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는 나를 믿었다. 세트에 나타나는 일도 거의 없었다. 그냥 내가 ‘자유롭게’ 일할 수 있도록 믿고 내버려뒀다.

-베를린과 아카데미, 두 영화제에 모두 남우주연상 후보로 올라 있다.

=느낌이 좋다. 10년 전 <영광의 깃발>의 케이스가 생각난다. 그때도 베를린에 왔었다. 상은 못 받았지만. 오기 전에 골든글로브에서 수상했고, 돌아가 오스카(남우조연상)에서도 수상했다. 공교롭게도 올해 똑같은 패턴이다. 세 영화제에 모두 후보로 올라 있으니…. 물론 수상하길 바란다.

그의 예감이 적중했다. 며칠 뒤 그는 베를린영화제의 은곰상 트로피를 들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오스카가 그의 손을 들어줄지는 미지수. 남우조연상이라면 몰라도, 남우주연상 자리에 흑인 배우를 앉히기엔, 오스카가 아직 보수적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이 영화가 정치적으로 영향을 끼칠 수 있길 바란다”는 그의 바람을 ‘정치적’으로 해석한다면, 너무 비약일까.

덴젤 워싱턴은 어릴 적 가족과 함께 남부여행을 하면서 겪은 일들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버지니아의 주유소에 들렀다가 화장실을 못 쓰고 쫓겨난 일, 여행지의 명당에는 접근조차 못했던 일, 레스토랑에 갈 수 없어 차 속에서 도시락을 먹던 일. 그는 “그땐 어려서 몰랐다”고 담담히 말했다. 그리고 스타가 된 지금도 뉴욕 밤거리에서 택시 잡는 데 어려움을 겪곤 한다는, 놀라운 고백을 했다. 반듯하게 잘생긴 이목구비, 지적이고 안정적인 이미지로 <필라델피아> <펠리칸 브리프> 등에서 성공한 흑인 지식인 캐릭터를 독식하고도, 흑인의 인권 문제를 다룬 <영광의 깃발> <솔저 스토리> <말콤X>까지 차지할 수 있었던 건, 그런 개인적인 경험들이 새겨준 사회 의식 때문인 듯.

<피플>이 최고의 섹시남으로 뽑지 않았더라도, 그의 매력 앞에 여성들이 맥을 못 춘다는 것쯤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특히 흑인 여성들에게 그는, 다른 의미다. 백인 여배우와 키스라도 할라치면, 흑인 여성팬들이 “배신이야”하고 거세게 항의하는 것. 로맨틱한 러브스토리에 즐겨 출연하지 않는 것도 팬들의 성화 때문이라는 후문이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흑인이라는 정체성에서 그는 그냥 자유롭고 싶어했다. 그는 인터뷰 중에 ‘spirit’이 한국말로 뭐냐고 물었다. 그리고 잠시 뒤, 통역자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하필이면 ‘자유롭게’라는 단어를 따라했다(정확한 발음으로). <허리케인 카터> 식으로 말하자면, 이건 우연이 아니다. “나의 정신을, 영혼을 자유롭게 놔주세요.” 무의식중에 그는 이 말을 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당신이 맡은 배역은 사회적인 이슈가 되곤 한다.

=세상에 나쁜 일만 일어나는 건 아니다. 물론 차별은 늘 존재한다. 인종은 물론이고, 외모, 성정체성에 대한 차별이 있게 마련이다. 인간이 사는 세상이니까.

-흑인 인권 문제가 걸린 사안에 관여하는 데 대한 부담은 없는지.

=내 이름을 빌리려는 이들이 적지 않다. 실제로 어린이들을 위한 권익단체 등 몇몇 곳에는 관여하고 있다. 논란이 되는 사안일수록 부담을 느낀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알려야 하고 무슨 말이든 해야 한다고 생각되면, 그냥 한다. 난 사회운동가도 아니고, 대변인도 아니다. 그냥 배우일 뿐이다. 역할을 통해 연기를 통해 세상에 노출되는 사람일 뿐이다.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흑인 스타라는 사실이, 이익일 수도 불이익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 문제에 대해, 내겐 선택의 여지가 없다. 아니, 선택권이 없는 건 아니다. 연기를 그만두면 되니까.

-액션, 정치 드라마, 스릴러를 종횡무진했다. 개인적으로 어떤 작품을 선호하나.

=난 다양한 작품, 다양한 배역을 즐긴다. 도전하는 게 좋다. 인생의 영화, 최고의 영화가 뭐냐고 물을 때마다, 난 ‘다음에 찍을 영화’라고 답한다. 모든 영화, 모든 역할이 다 교과서였고, 배운 만큼 다음 작품에 쏟아넣으려 노력한다. 내 역할은 갈수록 깊고 커지는 셈이다. 그럴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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