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리포트]
[현지보고] 리들리 스콧 신작 <글래디에이터> 시사회 [1]
2000-03-21
글 : 황혜림

세기말적 스타일리스트, 콜로세움에 서다

리들리 스콧의 신작이란 사실 하나만으로, <글라디에이터>는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이다. 이미 20년이 다 된 얘기지만, <에일리언> <블레이드 러너>에서 본 스콧의 묵시록적 세계관과 어둡고 음울한 이미지의 교감이 워낙 매혹적인 자태로 뇌리에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짧게는 2년, 길게는 4년에 작품 한편으로 비교적 과작의 행보를 보인 이 세기말적 스타일리스트가 91년작 <델마와 루이스>를 축으로 점차 내리막을 걸어왔다는 것도 궁금증을 부풀리는 하나의 이유. 콜롬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 500주년을 기념하는 92년작 <1492 콜롬버스>에 이어 <화이트 스콜>, 가장 최근작인 <G.I.제인>까지 비평과 흥행 양면에서 부진을 면치 못한 스콧의 하락세는 신작의 공개무대에도 빛과 그림자를 드리웠다. 미국 L.A. 현지시각 2000년 3월11일 8시, 중심가인 산타모니카대로의 멀티플렉스 AMC14에서 열린 <글라디에이터>의 첫 시사회는 기대 반 회의 반을 안고 세계 60여개국에서 온 취재진으로 붐볐다.

고대 로마로 간 이미지의 세공사

상영장의 불이 꺼지고 수선스러운 웅성임이 일시에 사그라들자 스크린에는 고대 로마가 숨결을 얻어 되살아났다. ‘검투사’란 제목의 <글라디에이터>는, 고대 로마의 검투사를 소재로 한 시대극. 화면 가득한 밀밭 위를 쓰다듬으며 지나는 손을 눈으로 좇으며 시작하는 이미지 여행은 이내 황량한 겨울 벌판과 숲에 이른다. 단단한 몸집의 사내가 숲 근처에 진을 친 군대 사이로 말을 타고 달려오고, 곧 선두에 나선 그의 지휘 아래 일대 혈전이 벌어진다. 1만6천여개 불붙은 화살이 날아가고 투석기에서 쏘아올린 불타는 흙덩이가 순식간에 겨울 숲을 불꽃으로 휘감는 동안 수많은 병사들이 동강난 채 쓰러져나간다. A.D. 180년, 로마 제국의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게르마니아 정벌에 따라나선 막시무스 장군의 승전이 1??분짜리 서사시의 첫 연이다. 병사들의 처절한 혈투, 잿가루처럼 흩날리는 흙먼지와 눈, 강렬하게 타오르는 화염의 붉은 기운이 뒤섞인 이미지의 향연은 관객을 압도하며 탁월한 이미지 세공사 리들리 스콧의 면모를 환기시킨다.

승전 뒤 집으로 돌아가기만을 고대하는 막시무스 장군은 병든 아우렐리우스 황제로부터 마지막 부탁을 받는다. 황좌를 아들 콤모두스에게 물려주지 않고 로마를 다시 공화정으로 만들도록 도와달라는 것이다. 이를 눈치챈 콤모두스는 아버지를 살해하고, 막시무스와 고향에 있는 그의 가족을 없애라는 명을 내린다. 간신히 도망친 막시무스가 집에 이르렀을 땐 이미 아내와 아들이 살해된 뒤다. 모자의 무덤가에서 정신을 잃은 막시무스는 노예상에 팔려가고, 상대가 죽을 때까지 싸워야 하는 검투사로 살아가게 된다. 검투사로 다시 명성과 대중의 사랑을 얻은 막시무스는 복수를 꿈꾸고, 야심에 눈이 먼 젊은 폭군 콤모두스는 고독 속에 점점 괴팍해진다. 이들의 대립을 축으로, 콤모두스의 누이이자 막시무스의 옛연인으로 암시되는 루실라의 배신과 콤모두스의 폭정을 끝내려는 원로원의 반역모의, 막시무스를 돕는 검투사 주바와 검투사 대장 프록시모 등 가상의 영웅을 내세운 제정 로마기의 야사가 풀려나온다.

<글라디에이터>는 애니메이션 <치킨 런>과 더불어 2000년 드림웍스SKG가 선보이는 야심작. 제작비 1억달러를 상회하는 서사대작으로, 드림웍스 작품 가운데 최대의 규모와 스펙터클을 과시한다. 첫 전투 장면을 찍는데 영국 한 지방의 숲을 불태우고, 불화살을 따라잡기 위해 초당 15m의 속도로 움직이는 카메라를 사용했으며, 말타와 모로코 등지에 야만과 문명이 공존하던 고대 로마제국의 화려한 위용을 재건해냈다. 당대 로마 문화의 공간적 중추였던 원형경기장 콜로세움의 재건은 그 중에서도 핵심적인 과제였다. 원래 5만5천명까지 수용 가능하지만 이제는 잔해밖에 남은 게 없는 콜로세움을 만들기 위해, 유적 한쪽에 2000여명이 들어갈 수 있는 세트를 짓고 나머지는 화면상에서 컴퓨터그래픽으로 지어냈다. 철퇴에 머리가 날아가고, 전차가 부서지는 검투 시합이 벌어지는 콜로세움의 웅장함은 물론, 경기장을 가득 메우고 환호하는 3만3천여명의 관중들도 그래픽이 만들어낸 영상이다. 로마의 옛 시가지와 거리를 만들어내는 등 사라진 로마제국을 부활시키기 위해 <쎄븐> <G.I.제인>을 거쳐온 프로덕션 디자이너 아서 맥스를 필두로 30명의 디자이너와 500여명의 인력이 매달려야 했다.

드림웍스 최대의 스펙터클

이렇게 과거 로마제국의 광채를 재현한 서사극의 출발은 의외로 소박하다. 드림웍스의 부사장이자 <글라디에이터>의 프로듀서인 월터 파크스에 따르면, 2년 전 <아미스타드>의 작가 데이비드 프란조니가 고대 로마에 대한 영화를 만들어 보고 싶어한 것이 그 발단. 이들은 당시 문화의 중심이었던 원형경기장이 영화의 훌륭한 무대가 될거라 여겼고, 대중의 지지를 업고 황제에 맞서는 검투사 영웅의 이야기를 빚어냈다. 여기에 <아미스타드>의 미술팀이 자료로 가지고 있던 19세기 화가 장 레옹 제롬의 그림이 영감을 더했다. 스필버그가 파크스에게 보내줬다는 그림은 콜로세움의 중앙에 선 검투사가 상대를 죽일지 살릴지 황제의 손가락 신호를 기다리는 모습을 담은 것. 파크스와 공동프로듀서 더글라스 윅은 로마제국의 스펙터클을 재현하면서 영웅담을 맛깔스럽게 살려낼 감독으로 리들리 스콧을 일순위에 꼽았고, 그림을 들고 그를 찾아갔다. “새 천년이 도래한 지금이야말로 역사상 가장 군대와 정치력이 막강했던 제국의 정점과 몰락을 되짚어보기에 적절한 때라고 생각했다”는 스콧은 “너무 오래된 것이라 신선하다”며 연출제의를 받아들였다. 스콧과 TV시리즈에서 호흡을 맞추고 차기작 <한니발>에도 합류한 존 매티슨이 촬영을 맡아 시적인 전투 장면, 콜로세움과 로마 시가지의 부감 등 시대의 정취를 역동성 있게 담아내는 데 일조했다. <블랙 레인> <델마와 루이스>에 이어 함께 작업한 한스 짐머는 “로마 건축처럼 양식화된 왈츠를 고르고, 그 우아함에 거친 느낌을 더한” 음악으로 장엄하면서도 낭만적인 서정을 덧입혔다.

최근 <인사이더>로 아카데미 주연남우상 후보에 올라 주가 상승중인 러셀 크로를 포함해, 비주류 인생을 단골로 연기해온 호아킨 피닉스, <아미스타드>로 떠오른 신성 자이몬 혼수, <데블스 애드버킷>에서 악마의 딸로 나온 코니 닐슨 등 출연진은 할리우드 톱스타 명단에서 벗어나 있다. 막시무스와 콤모두스가 콜로세움에서 일대일 혈투를 벌이고 최후를 맞는 결말에서 할리우드 주류 영화의 공식을 슬쩍 비껴나 보기도 하지만, <글라디에이터>는 할리우드 영웅담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강한 자기력으로 시선을 붙들어매는 초반 전투 장면의 이미지의 생기가 갈수록 다소 바라지는 것도 아쉬운 점. 하지만 <벤허> <스팔타커스> 이후 자취를 감춘 지도 40여년이 지난 서사 장르의 영웅담과 스펙터클을 2000년에 되살려낸 <글라디에이터>가 리들리 스콧의 필모그래피에 어떤 공과를 남길지는, 극장에 개봉되는 5월이 지나봐야 확실히 알 수 있을 듯하다. 국내에는 6월 초에 개봉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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