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태양>은 센 제목이다. 바람, 햇살이 강렬하게 몰아치고 내리쬐는 젊음의 어느 날들. 그뿐인가? 이들은 어그레시브 인라인 스케이트에 미쳐 있다. 그래서 영어제목은 ‘어그레시브들’이다. 청춘은 질풍노도, 태풍태양의 계절인 것만큼이나 (사회적) 헛된 열정의 순간이기도 하다. 자본으로 교환도, 환원도 축적도 되지 않는 일에 자신을 온전히 바치는 것. 인라인 스케이터를 비롯한 특정한 하위문화의 숭고미에 가까운 아름다움은 이러한 경제적 ‘무가치’가 그 하위문화 동아리 사람들이 아! 야! 와!라는 탄성과 박수를 보내며 감탄하며 숭배하는 상징적 가치로 무한히 끌어올려지는 데 있다. 익스트림 스포츠가 자본의 무한경쟁이라는 사회적 공간 주변부에서 비사회적 무한경쟁, 한계초과를 표식하면서 동시대적 숭고미로 기능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에서 소요(천정명)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소요학파를 연상시키는 멋진 이름을 가진 이 영화의 내레이터이자 주인공 중 한 사람이다. 그러나 수업은 따분하면서도 어렵기만 하고 부모는 갑작스레 해외로 도피해 집에 혼자 남아 있다. 수업 중에도 인라인 스케이트라는 판타지에 빠져 있다가, 모기(김강우)라는 잘난 스케이터가 속한 동아리에 어울리게 된다. 훈련된 묘기를 보이는 모기, 맏형 같은 갑바(이천희), 그리고 모기의 여자친구이면서 비디오로 이들의 활동을 기록하는 한주(조이진)는 부재하는 부모의 자리를 대신해 소요에게 유사가족으로 다가온다.
은근히 한주에게 마음을 두고 있는 소요가 왜 모기를 좋아하냐고 묻자 한주는 “야심이 없어서”라고 대답하는데, 정말 모기는 딴마음 먹지 않고, 딴 목표없이 인라인 스케이트에만 매달린다. 반면, 갑바는 동아리 사람들을 잘 보살피면서 인라인 스케이트의 사회적 상승을 꿈꾸고, 세계대회 참여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러던 중 갑바는 대회 참여를 위한 항공권 마련을 위해 모기를 CF 촬영에 동원한다. 기어이 이들간에 갈등은 시작된다. 그러나 이런 줄거리 요약은 사실 이 영화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태풍태양>은 마치 인라인 스케이트의 예측 불가능한 다음 동작들과 구심력과 원심력을 활용하면서도 그 힘들을 거슬러 가속을 얻는 것처럼, 직선적 이야기나 주인공 한두명의 사랑과 갈등, 우정 등에 머물지 않는다. 이야기들의 흩어짐과 모임, 속도의 장엄함, 젊은 육체의 순간적 상승과 하강, 감정의 유출, 육체적 떨림, 또 이 모든 것이 펼쳐지는 도시와 한강의 수려한 경관에 카메라가 어떻게 반응하고 다가가고 있는가를 보는 편이 더 매혹적이다.
그라인드, 하위문화에 대한 논평 혹은 형식화
<태풍태양>에서 내 마음을 빼앗은 것은 그라인드다. 인라인월드(inlineworld.net)라는 동호회에 들러보니 그라인드는 “대리석의 모서리 부분, 커브, 레일을 인라인의 H블록 바닥 부분으로 타고 내려오는 것”이라고 한다. 인라인 스케이터들이 거리와 광장과 지하철의 계단 등지에서 경계와 모서리와 주변부 지점을 아슬아슬하게 타고 질주하거나 굴러떨어지거나 되돌아오거나, 튀어오르는 장면들은 말 그대로 사회의 주변부에 속한 소수자들이, 그 주변에서 어떻게 생존하고 의미를 만들어 존재하는가에 대한 보고서다. 인라인 스케이터들은 도시와 거리의 주변에서 바로 그 가장자리 공간을 특화해 육체와 속도, 흥분과 위험의 황홀경을 만들어낸다. <고양이를 부탁해>에서 살짝 주변부로 밀려나 있는 여자친구들의 삶을 인천의 철거 지역을 비롯한 도시 공간 이곳저곳에 배열해 여성(소녀)주의적 민속지를 그려나가던 방식은 <태풍태양>에 와서 바로 가장자리 그 좁다란 표면 위에서 튀어오르고 튕겨져나가는 청년들의 몸의 향연으로 바뀐다. 주변 공간을 익스트림하게 활용하는 인라인 스케이트의 그라인드 테크닉 자체가 경계에 놓인 하위문화에 대한 논평이자 형식화인 것이다. 주변 공간에 작용하는 자연적, 사회적 힘의 배열을 몸과 인라인 스케이트로 바꾸어버리는 것이다. 원심력, 구심력, 중력과 같은 힘들을 활용하고 겨뤄내고 하는 것만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위계화된 힘, 정상적이라고 불리는 힘들을 이 공간 안에서 순간적으로 밀어내고 뒤집어내는 셈이다.
인라인 스케이트에서 마음에 드는 것은 ‘앨리웁 애시드 투 솔’ 같은 테크닉에서 사용하는 솔 같은 용어인데, 원래는 영혼(soul)이 아니라 발바닥(sole)이었겠으나, 번역과 이해 과정에서 발바닥을 활용한 기법이 ‘영혼의 어그레시브 스케이팅’ 등으로 한국 인라인 스케이터들에게 수용되는 것이 흥미롭다. 솔(발바닥)로 솔(영혼)에 이르는 몸의 진성성이 느껴져서 좋다.
야심없는 청춘의 야심만만한 성장담
맨몸, 맨손으로 벽이나 여러 장애물을 곡예를 하듯 뛰어넘는, 아프리카어로 초인이라는 뜻의 야마카시라는 익스트림 스포츠를 다룬 동명의 <야마카시>(2001)라는 영화도, 파리 뒷골목의 일곱명의 청년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들이 도시 빌딩들의 사이와 구멍들을 빠져나가고 하는 것 등을 보는 것 역시 주변적 삶이 터득하게 된 협상의 묘미 같은 것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영화가 이들의 사회적 존재를 인준받는 쪽으로 방향을 트는데다, 스포츠보다는 거의 스턴트적 묘기로 달려가고, 익스트림 스포츠가 사회적응력 테스트로 변해가서 재미가 없어진다. <태풍태양>은 스포츠영화가 곧잘 빠져드는 승리를 통한 사회적 승인으로 나아가지도 않고, 개인적 스포츠 영웅의 탄생을 경축하지도 않는다. 다만, 동아리라는 유사가족 속에서 성인식을 치른 청년 소요의 청춘의 소요를 신중하고 격정적으로 다루어낸다. 변영주 감독은 <발레교습소>에서 고3 입시 뒤 대학 입학까지의 그 시기, 삶에 실질적 도움이 전혀 되지 않는 무엇인가에 매달리는 소년들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하는데, 변영주 감독의 그 마음과 <태풍태양>은 상당히 잘 통한다. <발레교습소>가 부모에게 느끼는 외상과 동아리의 문제를 동시에 껴안았다면, <태풍태양>은 부모를 해외로 도피시킨 뒤, 동세대 사이의 동거와 갈등과 협상과 성장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부모없는 세상에서도 그들은 성큼 자라버린 것이다. 그들 사이의 돌봄 속에서 Aggressive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