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 남자가 스튜디오 앞을 서성거렸다. 남자는 혼자 뒷짐을 진 채, 별 중요해 뵈지 않는 게시판의 글귀들을 꽤나 집중해서 읽고 있는 듯했다. 사무실로 들어가는 길에 다시 힐끗 보았지만 남자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선 채 뒷모습 이상은 허락해주지 않았다. 그저 그 남자의 목, 목도리로 둘둘 감은 목인데도, 참 길구나 했다. 반 시간 뒤, 긴 목의 남자는 우리에게 앞모습을 허락했다. 이성재(31). 약속시간보다 일찍 도착해 잠겨진 스튜디오 앞에서 홀로 30분을 기다린 그는 그 흔한 매니저 한명 대동하지 않은 채, 조금의 원망도 섞이지 않은 선한 눈인사를 건넬 뿐이었다. 그게 그 하루의 시작이었다.
‘누군가를 저렇게 아프게 바라볼 수 있을까’, TV드라마 <거짓말>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일생 처음 찾아온 사랑 앞에 번민하던 이성재의 눈빛을 차마 잊지 못할 테다. “언제나 영화를 귀착지라고 생각했어요. <거짓말>을 끝내고 나니 시나리오가 제 손에 쥐어지더군요.” <미술관 옆 동물원>을 지나 <자귀모>를 다독이고 <주유소 습격사건>을 신나게 해치우고 <플란다스의 개>를 땀나도록 쫓았다. 그렇게 3년, 휴가나온 군인에서 시간강사까지 이성재가 4편의 각기 다른 필모그래피를 쌓아가는 동안, 우리는 <거짓말>의 눈빛을 못내 그리워해왔는지도 모르겠다. “<플란다스의 개>를 끝내고 정서적으로 풍부한 영화를 하고 싶어졌어요. 가슴에 눈물이 차오를 수 있을 만큼 슬픈 영화요. 그때 <하루>의 시나리오를 받았어요. 뭘 더 망설였겠어요.”
<하루>는 아이 외에는 세상에서 더 바랄 게 없는 착한 부부의 이야기다. 그러나 일생 동안 바랐던 아이는 크리스마스, 손 위에 내려와 순식간에 녹아버리는 눈처럼 하루의 만남을 끝으로 부부 곁을 떠난다. “시나리오를 읽고 이 깊은 사랑을, 아이를 가질 수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들려줘야 한다는 의무감이 들었어요. 예전엔 제 만족으로 영화를 했거든요. 이젠 서서히 관객을 생각하게 돼요. 영화를 하는 사람의 책임감 같은 거, 요즘엔 그런 걸 느껴요.” 처음 시나리오에서 석윤(이성재)은 그저 한없이 따뜻하기만한 인물이었다. 진원(고소영)의 모성애가 전체 극을 이끌어가다보니 석윤은 자칫 밋밋한 인물에 그치기 쉬웠던 것. 하지만 이성재는 석윤 안에서 다양한 스펙트럼을 끄집어냈다. “석윤 안에는 <거짓말>의 준희도 있고, <미술관…>의 철수도 있고, <플란다스…>의 윤주도 있어요. 철없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고, 하지만 아내에 대한 사랑을 늘 품고 있는 착한 남자죠.”
일찍이 결혼해 두딸의 아빠이기도 한 이성재는 인터뷰 동안 때론 아저씨처럼 유연하기도 했고, 때론 소년처럼 부끄러워하기도 했고, 때론 연인처럼 두눈 가득 촉촉함을 머금기도 했다. 그 속의 수많은 그가 켜켜이 다중노출로 겹쳐지던 그 하루. 하루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님을 알았다.
헤어스타일
대학 1학년 때, 맘먹고 파마를 했는데 하루도 안 가서 스포츠로 깎아버렸어요. 쉬는 동안 문득 다시 파마를 해보고 싶어서 했어요. 촬영 전 감독님께 “머리는 어떻게 할까요” 했더니, “지금 머리 좋은데” 하셔서 그냥 놔뒀어요. 첫신 촬영 때문에 다시 잘랐는데, 아쉽네요.
캐릭터
따뜻한 남자 역이 싫은 건 아니지만 끔찍하거나 잔인한 역도 해보고 싶어요. <프라이멀 피어>의 에드워드 노튼처럼 다중인격의 캐릭터도 욕심이 나죠. 하지만 아직은 내 캐릭터만 빛나는 영화보다는 전체적인 느낌이 좋은 영화가 좋아요.
올해 바라는 것
“일년에 한 가지씩만 해라”고 말하던 군대고참이 있었어요. 30년을 살면 30가지 소원을 이룰 수 있는 게 아니냐고. 2월부터 촬영에 들어가는 <신라의 달밤>에서는 멋진 깡패보스로 나오거든요. 잘해내고 싶어요. 무리하게 욕심내기보다는 Step By Step! 한발한발 나아가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