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비밀에 싸인 허니문 레이디, <신혼여행>의 정선경
2000-03-14
글 : 이영진
사진 : 정진환

신혼여행이 누구에게나 달콤한 판타지인 건 아니다. 미처 말 못한 비밀을 갖고 있는 이들에게 신혼여행은 자신들의 순도를 확인받기 위한 필사적 의식이다. 제주도로 떠나기 전 말 못할 사연은 반드시 뭍에 묻어두어야 한다는 철칙을 모를 만큼 <신혼여행>의 7쌍이 어리숙하진 않다. 첫날을 무사히 보낸 이들, 둘째날 밤 안도감에 취하지만 누군가 호텔 앞 바닷가에 어물쩍 비밀을 토해놓고, 새벽 밀물은 그 자리에 한 남자의 시체를 뱉어놓는다. 영락없이 살인용의자로 몰리는 신혼부부들의 ‘끔찍한’ 신혼여행을 ‘코믹 설탕’과 ‘스릴러 크림’으로 발라놓은 영화 <신혼여행>. 여기서 모든 사건의 비밀을 쥐고 있는 신비한 여인이 정선경이라면 믿어질까. <신혼여행>에서 정선경은 비로소 선머슴이나 뒷골목 여인의 거친 이미지를 벗고, 고요한 기품과 미스터리한 매력의 ‘귀족적’ 연기를 선사한다. “평범하지만 섬뜩한 사랑을 하는 여자예요. 집착도 사랑임을 보여주는 그런 인물이고. 저에게 실제로 그런 사랑을 할 수 있겠냐고 물으면 자신없지만 적어도 영화 속에선 가능하죠.” 99년 여름에 촬영을 시작했던 <신혼여행>은 출연자들이 많은데다 비 내리는 날이 많아 힘이 곱절로 들었던 영화다.

‘다시 하라면 못할 것 같다는’ 장선우 감독의 <너에게 나를 보낸다>로 데뷔한 때가 1994년. 이후 정선경은 <돈을 갖고 튀어라> <개같은 날의 오후> <그들만의 세상> <3인조> <지상만가> <신혼여행>까지 8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첫 작품을 제외하곤 모두 신인감독과의 작업이다. 1997년 <지상만가> 이후 TV드라마에만 출연해왔던 정선경은 시나리오가 맘에 들어 <신혼여행>의 청혼을 받아들였지만, 2년 동안의 공백 때문인지 무척 떨렸다. “짧은 수명을 요구하는 현실에서 여배우가 영화만 할 순 없어요. 오래 활동할 수 있다는 점에서 TV드라마가 좋기도 하고. 또 드라마에서 안 보이면 영화 캐스팅도 어렵잖아요. 앞으로도 드라마와 영화를 함께 병행할 생각이에요.” “호흡이 길지 못해요. 쉽게 넘어가려 한다는 지적도 많이 받고. 창피하기도 하지만 받아들여야죠.” 선배들의 충고 때문에 ‘내 판이다’ 싶어 신나게 놀았던, 무작정 휩쓸려 다녔던 때와 달리 한결 신중해졌단다.

“요즘은 고운 색만 눈에 들어와요.” 짙은 색의 옷을 즐겨 입었지만 이젠 화사한 색이 좋다. 보석도 하나둘 눈에 띄기 시작하는 걸 보니 이제 결혼할 나이가 됐나 보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다. 자신이 ‘오래된 배우’로 사람들에게 여겨질 거라 생각하면, 명절 때마다 TV에서 몇번씩 채널을 바꿔가며 재탕되는 자신의 영화들이 싫다. 얼마 전 정선경은 <그들만의 세상>에서 함께 작업했던 임종재 감독으로부터 연락받고 서울지검에 <거짓말> 사법처리 반대의견서를 제출하러 나서기도 했다. “장선우 감독님은 존경하지만 사실 <나쁜 영화> 이후부턴 안 봤어요. 너무 한쪽으로 치닫는 것 같아 싫었거든요. 물론 이건 관객 입장이고 사법처리 문제는 다른 거죠.” 웨딩드레스를 입고서 “사진 남았으면 우리 다같이 한장 찍는 게 어때요” 하는 정선경, 관객이 ‘믿고 찾아주는’ 배우가 되길 소망한다.

구설수/ 만만해 뵈지 않는다는 말을 아직까지 듣곤 해요. 처음엔 정말 힘들었어요. 심할 때는 주위에서 버릇없다는 말까지 나왔고. 실없어 보이는 게 싫어서 그랬던 건데. 대신 스캔들에 시달린 적 없어 편한 점도 있어요.

앞으로/ 딱히 정해놓은 건 없어요. 매번 할 때마다 조금이라도 다른 인물, 다른 장르, 다른 시도를 해보고 싶어요. 집중력은 좋은 편이라 배우는 것도 많을 것 같아요.

의상협찬 ROSA SPOSA Wedding, on & 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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