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공포의 외인구단>에 대해서 나는 전혀 모르고 있을 때였다. 어리둥절한 내 모습에 전영록은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아니 다른 사람도 아니고 대 이장호 감독님께서 외인구단을 모르시다니, 한국영화 볼짱 다 봤네요. 그 유명한 외인구단을… 아마 요즘 애들 치고 안 읽은 애들 없을 걸요.”
농담인가 진담인가? 나는 전영록이 떠벌려 과장하는가 싶었다. 마침 영화아카데미 1기 출신인 김소영이 눈에 띄었다. 지금은 한국영상원의 교수가 되었지만 당시엔 영화아카데미 1기를 막 수료하고 미국으로 유학가기 전이었다. 내가 만화 <공포의 외인구단>에 대해 묻자, 그녀 역시 아주 유명한 만화여서 요즘 아이들은 물론 대학생들도 거의 안 본 사람이 없다고 덧붙였다. 무안했다. 내가 이렇게 세상을 모르고 살았나? 이렇게 현실에 어두웠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TV 출연을 끝내고 사무실에 돌아오자마자 조감독들에게 물어 보았다. 그들 역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나만 모르고 있었다니…, 아니 그럼 그렇게 재미있고 유명한 만화데 왜 영화 만들자고 권유한 놈이 한명도 없었단 말인가! 나는 당장 청계천에 가서 <공포의 외인구단>을 사오라고 호통을 치고 원작자의 신상과 연락처를 수배하라고 지시했다. 잠시후 20권이나 되는 만화 <공포의 외인구단>이 내 앞에 놓여졌다, 나는 앉은 자리에서 읽기 시작했다. 도대체 어떤 만화이기에 나만 모르고 모두 알고 있단 말인가. 절반쯤 읽을 무렵, 정말 보통 만화가 아니구나! 이렇게 재미있는 만화를 만약 누군가 다른 영화인이 읽는다면… 라는 생각이 들자 도저히 그대로 침착하게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나는 당장 서둘러 원작자인 이현세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음날 그를 만난 곳은 신촌의 어느 카페였다. 아주 잘생긴 청년이었다. 훤칠한 키에 어떤 미남배우보다도 더 시원시원했고 경상도 사투리가 잘 어울리는 매력적인 사나이였다. 생긴 것처럼 성격도 탁 틔여 어렵지 않게 영화 만드는 데 합의를 했고 원작료로 250만원을 제시했다. 돈은 크게 문제를 삼는 것 같지 않았다. 오케이였다. 외인구단은 그렇게 모든 일이 시원시원하게 이루어졌다. 각색을 지상학씨에게 맡겼다. 그제야 가수 전영록에게서 우연찮게 큰 기획 하나를 선물받았구나 하는 실감이 왔다.
한편 신인 여배우 이보희가 모든 것을 바쳐 헌신적으로 표현한 영화 <무릎과 무릎 사이>는 예상대로 빅 히트를 쳤다. 나는 다시 영화관 앞의 긴 줄을 볼 수 있었다. 그동안 소외당했던 영화판이어서 나에겐 더욱 감회가 컸다.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다시 내 영화에 관객이 밀려온다는 현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이태원 사장과 나는 단성사 매표구가 바로 내려다보이는 찻집 창가에 앉아 싱글벙글 웃었고 이장호 사단 모두는 매일 극장 앞으로 출근했다. 지금은 돌아가신 아버지 역시 극장 안에 보조 의자 하나를 마련해서 매회마다 빠지지 않고 영화를 지켜보았다. <무릎과 무릎 사이>에 뭐가 있느냐는 농담이 유행되었다. 나는 이제껏 만져 보지 못한 큰 액수의 돈을 벌게 되었다. 자고 나면 또 돈이 쌓이고, 매일 매일 돈이 모인다는 느낌이 신기했다. 아마도 이런 맛에 기를 쓰고 영화를 제작하는 모양이었다. 이태원 사장과 그의 흥행사단은 나에게 또 하나의 에로틱한 기획을 하라고 종용했다. 외인구단도 좋지만 이 기세를 꺾지 말고 계속 이보희의 관능을 관객에게 보여주라는 압력이었다. 그럴 때 문득 떠오른 생각이 한을 풀지 못한 <어우동>의 기획이었다. 그 얘기를 꺼내자 모두 입을 맞춘 듯 대 찬성이었다. <어우동>의 영화 판권을 갖고 있는 김원두 사장을 만나 조심스럽게 의사를 타진했더니 기꺼이 주겠다고 했다. 이태원 사장과 김원두 사장이 만나 그 자리에서 기획을 팔고 사는 흥정이 까다롭지 않게 이루어졌다. 희곡 작가 이현화씨에게 각색을 의뢰했다. 워낙 까다롭기로 소문이 난 사람이어서 아무 주문도 하지 않았다. 과연 예상대로 원작을 무시하고 오리지널 시나리오로 만든다는 조건에서 각색을 수락하겠다고 했다. 고등학교 선배이기도 한 이현화씨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 시나리오가 완성이 되었고 나는 영화계 입문 뒤 처음으로 만족한 시나리오를 받아 보았다. 그때의 감동이 아직도 신선하게 잊혀지지 않는다. 전혀 시대극의 느낌을 주지 않았고 마치 피를 본 상어처럼 싱싱한 시나리오였다. 의욕이 절로 넘쳤다. 재미있는 것은 그 무렵 다른 영화사에서도 같은 소재를 <어을우동>이라는 제명으로 기획을 발표했는데 나는 조금도 걱정되지 않았다. 그 만큼 이현화씨의 시나리오는 나에게 자신감을 주었다. 오히려 언론을 통해 화제가 되어 경쟁적으로 만드는 일은 홍보도 되고 유리한 점이 많다고 생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