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을 탄다. 뉴욕의 지하철은 마치 m&m 쵸콜렛 봉지 속 같다. 지하철 한 구석에 쓰레기자루처럼 웅크리고 자고 있는 ‘검은색’ 남자는 조잡한 비닐 백을 주렁주렁 든 ‘노란색’ 중국 아줌마들의 수다에도 불구하고 코까지 골고, 이제 겨우 스무 살이 넘은 듯한 어린 남미부부의 팔 다리엔 끊임없이 뭔가를 해달라고 칭얼대는 ‘진갈색’ 아이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책을 읽는 소녀는 자신의 피부처럼 ‘하얀’ 아이팟 이어폰으로 귀를 막은 채 그 소음으로부터 멀어져 있고, 묘한 체취를 풍기는 ‘구리빛’ 인도남자는 움푹 패인 큰 눈을 굴리며 건너편 여자의 미니스커트를 훑고 있다. 그렇게 저마다 다른 피부색을 가진 인종들로 알알이 차있는 그 지하철로 들어서면, 나는 그저 또 다른 색을 가진 쵸코알 중 한 개가 된다. 노란색 피부를 가진 검은 머리 동양 여자애. 중국인인지, 일본인인지, 알게 뭐야, 그냥 너는 ‘옐로우 아시안’일 뿐이야. 지하철역을 빠져 나와 건널목 앞에 서니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던 한 아저씨가 나를 보고 소리친다. “헤이, 차이니스 걸! 곤니찌와”(이런! 중국어 공부나 하세요)
항구가 고향인 사람들은 외지인들에게 익숙하다. 부산이 고향인 나로서는 어린 시절부터 시내에 나가면 일본 사람들을 서울 사람만큼 자주 보았고(아니 서울 사람들이 더 신기했다!), 금발머리 파란 눈의 외국인도, 검은 피부의 아저씨도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그런 환경에서 자라나서인지 살면서 스스로를 인종차별주의자라고 생각해 본 적은 한번도 없었다. 게다가 길에서 만나는 미국사람들보다는 식당에서 묘한 사투리를 섞어 쓰는 연변 아주머니들에게 한마디라도 더 붙이려고 했고, TV나 신문에서 동남아 노동자들에게 행해지는 불공평한 처우에 늘 분개하곤 했으니까. 하지만 뉴욕에 와서 ‘마이너리티 황인종’이 되고 난 이후부터 스스로가 ‘잠재적 인종차별주의자’였음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대부분 한국인들이 주인인 뉴욕의 네일샵에서 내부적으로 쓰이는 암호 같은 말이 있다. 바로 ‘우순이’ ‘짜순이’ ‘꽁순이’란 단어다. 팁을 두둑하게 주는 사람이 ‘우순이’고, 안주고 가긴 뭐해서 겨우 1달러 정도 놓고 가는 손님이 ‘짜순이’ 이며, 팁 없이 조용히 사라지는 사람이 바로’ 꽁순이’다. 물론 팁 문화가 없는 곳의 사람들이 듣는다면 손님을 가지고 뭔 저런 구분을 하나 하겠지만 이곳 서비스업계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의 수입원 대부분이 월급이 아니라 팁이다 보니, 팁을 잘 주는 손님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구분하고 그에 따라 서비스가 달라지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특히 단골손님이 많은 네일샵에선 고정고객의 파악이 한달이면 가능하다. 그러니까 ‘우순이’와 ‘꽁순이’는 이제 그림자만 보아도 알 수 있을 정도라는 것이다.
어쨌든 이곳에서 이런 저런 손님들과 만나면서 깨닫게 된 건 (당연히 개인마다의 차이가 있지만) 인종에 따라 ‘우순이’와 ‘짜순이’가 나뉘어진다는 사실이었다. 특히 팁 없는 세상에서 온 동양 사람들은 100이면 98이 ‘꽁순이’에 가깝고, 미국인이라고 해도 흑인과 인도계 여자들은 팁에 야박하다는 통계학적인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그렇게 나도 모르게 검은 여자들이 들어오면 “아, 이런 오늘은 왜 이렇게 짜순이만 걸리냐!”하는 탄식이 터져 나왔다. 어느 순간부터 손님들의 피부색으로 서비스의 질을 결정하는 상태에 이른 것이다. 처음엔 내 속에 숨어 있던 이 치사한 본성을 보고 참 민망한 기분이 들었지만, 대한민국에서 한국인으로 태어나서 그 땅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았던 내가 거뜬히 가질 수 있었던 여유를, ‘미국’이란 나라에 ‘동양인’으로 떠돌고 있는 나는 도저히 가질래야 가질 수 없었던 것이다.
최근 개봉한 저 예산영화 <크래쉬>(Crash)는 수많은 인종들이 섞여 살아가는 미국사회의 지옥도를 압축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각기 다른 피부색을 가진 수많은 등장인물들이 묘하게 서로 충동하고 얽혀 들어가는 이 영화는 ‘인종차별’에 대한 <숏 컷>이자 <매그놀리아>이자 <아모레스 페로스>인 셈이다. 세계 곳곳에서 흘러 들어온 이민자들로 형성된 이 미국이란 나라는 탄생부터 현재까지 끊임없이 ‘인종차별’이라는 풀리지 않는 숙제를 떠안고 갈 수밖에 없는 구조다. 모국을 떠나온 수많은 마이너리티들이 주인 없는 땅의 주인이 되기 위해 흘렸던 피와 땀이야 말로 이 땅을 만들어왔던 재료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처음 영화를 보고 나와서는 이들의 인위적인 ‘충돌’이나 안이한 ‘화해’가 당황스러웠지만, 곰곰이 생각을 해 볼수록 영화에서 보여진 모든 사건들과 그 해결들이 차별로 가득 찬 이 미국사회를 향한 더 큰 조롱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손한 백인경찰 맷 딜런이 흑인여자를 살려내기 위해 불 속으로 뛰어들었던 용기도, 백인 상류층의 거만한 여자 샌드라 불럭이 남미계 가정부를 안고 “당신은 내 유일한 친구예요” 라고 울먹이는 순간도 사실 이곳 사정을 안다면 너무 거짓말 같은 판타지다. 마침내 영화는 자동차 접촉사고를 낸 흑인여자와 동양남자가 소리를 지르며 싸우는 순간에서 끝이 나는데 그제서야 영화는 모든 백일몽에서 깨어 다시 현실로 돌아오는 듯 느껴진다. ‘지금까진 행복했지? 하지만 꿈 깨! 이게 바로 현실이야.’ 라고. ‘따뜻한 화해 따윈 없어, 결국엔 거리에서 고함치며 싸워야 해.’ 라고.
피부색이 다른 사람들, 그들 서로는 이해하고 감싸고 동정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그들은 어설프게 손을 잡아 줄 순 있지만, 같은 고통을 느낄 수는 없는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르게 때문이다. 이 사회에서 다른 역사를 가지고 다른 한을 가지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영화는 인종차별에 대한 사회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는 동시에 서로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한 공간에서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영화처럼 보였다. 비단 얼굴 색을 떠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싫어한다. 어쩌면 무서워한다. 그래서 그 차이를 권력이나 무력으로 극복하려 해왔는지도 모르겠다. 유태인에 대한 학대도 독일인들의 두려움이 낳는 것이고, 흑인에 대한 경멸도 백인의 불안이 만든 것일 테다.
나 역시 한 때 나와 ‘다른’ 사람들이 싫었고, 그들이 나보다 더 큰 목소리를 내는 것이 무서웠다. 그래서 그들을 ‘틀리다’ 고 규정지었고, 부정하려 했었다. 그러다 결국 내 스스로 마이너가 되어 눌려지는 쓴 경험을 맛보기는 했지만,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는지 “좋은 게 좋은 것”이 라는 충고도 여전히 받아들이기 힘들고, 대다수의 뜻에 맞추어 ‘노르스름 푸르딩딩’ 한 색깔로는 죽어도 못 변할 것만 같다. 밀가루처럼 하얀 얼굴로 세계평화를 외치던 마이클 잭슨보다, 까만 얼굴로 ‘빌리 진’을 외치던 그 시절의 마이클이 훨씬 그다웠다고 믿고 있다. 에미넴의 재능이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그의 DNA에는 랩의 염색체가 없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우리에게 얼굴색을 바꿀 방법도, 의지도, 능력도 없다면 나와 다른 이들에게 동정을 베풀 여유도, 권력도 없다면, 이 색을 지키면서도 행복할 방법은 하나뿐이다. 바로 싸우는 것이다. 침묵하고 있는 이들은 밟혀서 땅속에 묻힌다. 그리고 점점 희미해져 간다. 대신 그 싸움은 나와 다른 인간들을 밟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내 색을 잃지 않기 위한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최소한의 투쟁마저 포기한다면 그때는 사라져도 할말이 없다. 그것이 평생 시비는 580번 걸지언정 진짜 싸움은 늘 피해왔던 비겁했던 한 사람이 이곳에서 깨달은 삶의 진리다. 값싼 동정을 얻을 순 있겠지만, 대신 싸워줄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