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늙지 않는 욕망의 아름다움, <마더>
2005-06-21
글 : 김지미 (영화평론가)
늙지 않는 욕망의 아름다움.

가족에 관한 영화 가운데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아무래도 ‘엄마’ 혹은 ‘어머니’에 관한 영화들일 것이다. 가장 최근에도 ‘엄마’라는 제목으로 두편의 한국영화가 나왔다. 한 영화는 ‘어머니’에 관한 모든 감동적인 에피소드들을 모아 감동의 도가니탕을 기획하면서 어머니를 가족 화합과 자식 사랑의 화신으로 만들어버렸고, 다른 영화인 다큐멘터리는 사회가 ‘어머니’라는 이름에 부여한 책임감으로부터 자유로운 어머니의 실체를 포착하기 위한 시도를 감행했다. 이 두 영화는 어머니에 대한 우리 사회의 극단적인 두 흐름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실제의 어머니들은 아마도 이 두축 사이 어딘가에서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있으리라.

로저 미셸의 <마더>는 거칠게 말하면 후자에 속하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영화는 런던 교외에 사는 노부부가 런던에 사는 딸과 아들 내외 그리고 손자들을 보기 위해 상경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남편과 함께였을 때 어머니 메이는 언제나 바쁜 아들 내외와 여전히 미래가 불안정한 딸을 걱정스런 눈으로 바라본다. 그러나 남편이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게 되면서 그녀는 불안정한 존재가 되고, 아들은 어쩔 수 없이 그녀를 자신의 집에 머무르게 한다. 그녀와의 동거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아들 내외를 피해 딸의 집을 찾은 메이는 이혼녀인 딸의 아이를 봐주는 일을 맡게 된다. 그러면서 아들의 친구이자, 아들 집에서 목수 일을 하고 있는 대런 때문에 자신의 딸이 애를 태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연애가 도통 마음대로 풀리지 않는 딸은 그 관계를 걱정스러워하는 엄마에게, 오히려 대런의 마음을 잘 파악해 달라는 메신저의 역할을 맡긴다.

사랑에 빠진 이들이 저지르기 쉬운 실수 중의 한 가지는 자신의 연애사를 타인과 상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상담자가 큐피드 역할까지 해주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상담자가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이든 심지어 자신과 혈연관계에 있는 사람이든, 자신이 보낸 메신저가 그 대상과 사랑에 빠질 수 있는 가능성은 언제나 존재한다. 우리는 숱한 영화를 통해 가장 친한 친구(<서프라이즈> <개와 고양이에 관한 진실>) 혹은 언니(<정사>)가 애인을 가로채는 것을 보아왔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그 목록에 육순을 넘긴, 세명의 손자를 둔 어머니를 추가한다.

하지만 여기서 ‘딸의 남자를 사랑하다’라는 메인 카피를 참조할 필요가 있다. 엄마는 딸의 남자‘와’ 사랑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딸의 남자‘를’ 사랑할 뿐인 것이다. 이 영화는 이러한 관계에 대해 관객이 상상할 수 있는 여러 가지 클리셰를 피해나간다. 메이는 딸의 남자를 유혹할 수 있을 정도로 관능미를 풍기는 여인도, 매력적인 외모의 소유자도 아니다. 그리고 이 영화에는 흔히 연상녀와 연하남의 사랑이 시작되는데 필수적인, 연상녀의 죄책감과 연하남의 공격적인 대시도 없다. 그렇다고 젊은 남자가 나이든 여자의 돈을 노리고 등쳐먹는 이야기로 빠지지도 않는다. 대런이 메이에게 접근하는- 정확하게 말하면, 그녀의 요구를 들어주는- 이유가 오로지 돈 때문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딸과 엄마는 ‘모호한 욕망의 대상’인 대런을 두고 묘한 삼각관계에 빠지지만 어느 누구도 그 관계를 섣불리 깨뜨리고 사랑에 온 몸을 던질 수 없다(마지막에 딸이 내린, 웃음이 절로 나는 명쾌한 결론이 있지만, 그것을 확인하는 기쁨을 미리 깨뜨리고 싶지는 않다).

<걸리버 여행기>에서 날아다니는 섬 라퓨타 제국에 갔을 때 걸리버는 인간의 소망인 영생에 관한 끔찍한 현시(顯示)를 본다. 태어날 때부터 미간에 빨간 점을 가진 이들은 영원히 죽지 않는데, 그것은 축복이라기보다는 저주에 가깝다. 그들의 점은 영원한 삶을 말해주는 것일 뿐, 영원한 젊음을 보장해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노인의 모습이 되어서도 그들 안에 있는 욕망은 늙지 않는다. 오히려 어린아이처럼 자신의 욕망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존재가 된다. 공자는 마흔이 넘으면 어떤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는 ‘불혹’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처럼 동서를 막론하고 나이듦과 욕망은 반비례해야 한다는 것이 불문율처럼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욕망은 나이드는 것과는 무관하게 존재하고, 오히려 채워지지 않는 것에 대한 결핍감은 살아온 세월만큼 강하게 자리잡는지도 모른다.

<마더>는 나이든 어머니의 사랑과 욕망을 이야기하면서 그것에 돌을 던지거나 서툴게 미화하지 않는다. 이 영화는 미술관에서 아름다운 육체의 조상을 보면서 자신의 ‘늙고 볼품없는 몸뚱아리’에 숨어 있던 성적 욕망을 재발견하고, 묘지를 산책하면서 죽음의 냄새를 느끼는 ‘어머니’ 메이의 혼란과 떨림을 관조적인 시선으로 담아낸다. 그리고 그녀가 혹은 그녀의 가족들이 느끼는 답답한 심사가 온통 벽으로 마스킹된 미장센을 통해 시각적으로 표출된다. 메이의 사랑은 새로운 삶의 위한 축복도, 자신의 나이를 잊게 만드는 열락의 축제를 위한 열쇠도 아니며 나이든 여자의 방종과 주책도 아니다. <마더>는 나이든 사랑에는 어김없이 끼어드는 가족과 체면, 그리고 경제적 문제 등을 다 아우르면서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서 결론을 내리는 것을 유보한다. 그것이 이 영화가 가진 최고의 미덕이다.

밀란 쿤데라는 ‘정체성’에서 나이든 여성에게 오래된 사랑이 던지는 투명해진 시선에 대해서 말한다. 나이든 여성을 살아 있는 존재로 만드는 것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투사되는 익숙한 시선이 아니라 ‘천박하고 음탕한 익명의 시선, 호감이나 취사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니고 사랑도 예의도 없이, 필연적으로, 숙명적으로 그녀의 육체에 쏟아지는 시선’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어머니의 육체를 가족들의 ‘사랑’이라는 이름 안에 가둠으로써 그녀의 존재를 투명하게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이 영화를 보고 난 뒤 어머니를 여성으로 만드는, 그녀의 육체를 아름다운 것으로 만드는 시선을 우리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차단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하게 되었다.

주인공 메이 역의 앤 레이드

푸근한 할머니 혹은 순수한 소녀

이 영화의 크레딧을 보면 익숙한, 그러나 어울리지 않는 두명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다. 한명은 <노팅힐>로 유명한 감독 로저 미셸이고 다른 한명은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와 <정사>(Intimacy)로 이름을 알린 작가 하니프 쿠레이시이다. 로맨틱코미디인 <노팅힐>에서 풍기는 동화 같은 사랑의 달콤함과 <정사>의 사랑을 믿지 않는 익명의 두 남녀가 펼치는 드라이한 섹스가 한 화면에서 어울리기는 쉽지 않을 듯해 보였다. 하지만 <마더>에서 육십을 넘은 메이의 사랑을 그리면서 두 사람의 장기는 절묘한 공명을 이룬다. 하니프 쿠레이시의 시나리오는 메이의 사랑을 현실 속에 단단히 붙들어 매어놓는다. 반면에 로저 미셸의 매끄러운 연출력은 그 사랑을 그림 같은 화면 속에 안착하게 만들어 충격 효과를 완화시키고 어머니의 ‘육체적’ 사랑이라는 입에 쓴 약에 당의(糖衣)를 입힌다.

이 영화에서 가장 빛나는 헤로인은 아무래도 메이 역을 맡은 앤 레이드인데, 그녀는 이 작품으로 2004년 영국비평가협회가 주는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또한 그녀는 이 영화에서 수십년의 연기 경력 동안 한번도 하지 않았던 누드 연기를 펼쳐보였다. 카메라 앞에서 나체가 되는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나이의 절반 정도인 대니얼 크레이그와 정사신을 펼친 그녀의 용기에 모든 이들이 탄사를 보냈다고 한다. 감독인 로저 미셸은 앤 레이드를 메이 역에 캐스팅하게 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녀는 굉장히 모호한 느낌을 줘요. 스물셋으로도 보였다가 예순셋으로도 보였다가 하죠.” 실제로 그녀는 <마더> 안에서도 그녀가 마주보고 있는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 자신의 얼굴을 푸근한 할머니에서 순수한 소녀의 얼굴로까지 자유자재로 바꾸는 놀라운 연기를 선보인다. 앤 레이드 스스로는 나이듦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마치 신의 장난 같아요. 귀도 안 들리고 눈도 잘 안 보이고 무릎이 나가도 등도 휘고 했지만, 성적 욕망은 그대로 있는 거죠. 아주 잔인한 장난 아닌가요?”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