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쿨한 영웅, 실속있는 노력파, <배트맨 비긴즈>의 크리스천 베일
2005-06-27
글 : 옥혜령 (LA 통신원)

참으로 평범하다. 청바지에 평범한 티셔츠, 검정색 작은 어깨 가방 하나, 짧은 머리에 그다지 크지 않지만 단단한 체격의 크리스천 베일이 포시즌호텔의 스위트룸으로 걸어들어온 순간의 첫 느낌이다. <아메리칸 싸이코>에서의 우습게도 광기어린 여피 이미지가 너무 생생한 터라 섬광 같은 아우라를 기대했건만, 그렇지도 않다. 신세대 배트맨다운 신비감과 박력을 보여주려나 했지만, 참 조용하다. 인터뷰 장에서 흔히 접하는 배우들의 세련되고 약간은 닳은 말솜씨나 인사치레마저 생략이다. 그러나 한 문장짜리 질문에 한 문단으로 답하는 그의 ‘배트맨론’만은 참으로 실속있다. 실속있는 배우인 듯하다.

-이번 배트맨은 뭐가 새로운가.

=새로운 게 뭐냐고? 모든 것. 이번 영화는 배트맨의 기원에 관한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다. <배트맨>은 신화적인 슈퍼 영웅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는 인간의 복잡한 심리물이기도 하다. 배트맨의 어두운 면을 그려내자면 끝이 없을 거다. 만약 슈퍼 영웅들을 한방에 모아놓는다면 다른 영웅들이 이 수상한 자가 무슨 짓을 하지나 않을까 의심할 것이다. 한마디로 예측할 수 없는 인물. 지금까지 내가 본 모든 악동들 중에서 가장 쿨한 캐릭터다.

-쿨한 배트맨을 연기하는 게 어렵지 않았나.

=배트맨은 위험한 인물이다. 비극적인 가족사로 인해 정당한 복수의 동기를 가졌지만, 극단적인 폭력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그 복수의 열망에 저항한다. 게다가 자신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므로 매사를 극단적으로 보기도 한다. 그래서 항상 자기 자신과 싸운다. 자기가 순수하게 정의를 추구하는 선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도 아니까. 그런데 이런 배트맨 캐릭터가 제대로 그려진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새로운 배트맨을 그려내는 데 아무런 부담감도 느끼지 않았다. 007 시리즈의 제임스 본드를 연기하라면 제대로 할 자신이 없다. 숀 코너리가 워낙 완벽하게 본드를 해냈으니까. 배트맨은 내가 창조하는 기분으로 작업할 수가 있었다.

-듣고보니 위험 인물인데, 왜 배트맨이 영웅인가.

=결과적으로 정의 구현에 이바지하니까. 언제나 법의 테두리 안에서 일하는 건 아니지만, 엄격한 윤리적 기준을 가지고 있다. 자신의 역할이 어디까지여야 하는지 생각하고, 지나치지 않도록 자제할 줄 알 뿐더러, 공권력을 도와주는 정도에서 그친다. 영웅이 되고 싶은 개인적인 소망에서 이 모든 일들을 하는 건 아닌지, 아버지가 남긴 가치관을 지켜야 한다는 원래 목적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복수를 그 자체로 즐기고 있는 건 아닌지, 끊임없이 의식한다. 사실, 배트맨은 그걸 즐기고 있거든. 그렇지만, 자신이 즐기고 있다는 걸 인정하면서 자신을 조절하려 투쟁한다는 점이 선악의 경계가 분명한 다른 영웅들보다 흥미롭다.

-그런 캐릭터를 유난히 좋아하나.

=인간이 다 그런 것 아닌가.

-그래서 배트맨을 연기하는 게 재미있었나.

=물론. 원래 나쁜 놈들이 더 멋있는 법인데, 여기 멋있는 악당들 틈에서, 그들과 일견 비슷하고, 그들보다 월등한 악당이 될 수도 있는데, 기를 쓰고 선한 일을 하려는 주인공이 있다. 능력도 있고 돈도 있고. 그런데도 살인불가라는 신념을 지키느라 절제하는 주인공이라니. 재미없을 리가 없지 않은가. 배트맨은 순진했던 것 같다. 한 몇년 배트맨 노릇을 하면서, 복수도 하고 악당들 쓸어버리고 나면 그만둘 생각이었겠지. 보통 사람으로 돌아가 행복하게 살고, 해피엔딩. 그런데, 점점 배트맨 노릇을 하는 게 멈출 수 없는 필요악이 돼버린 걸 깨닫는 거다. 고담시에는 문젯거리들이 끊이지 않으니까.

-블록버스터영화의 주인공이 되는 건 어땠나.

=이번 영화를 저예산으로 만들 계획도 있었던 것으로 아는데, 그렇다면 이전 영화들과는 다르게 갈 수 있겠구나 싶었다. 그런데, 블록버스터로 만들어진다는 이야기를 듣고 절망했다. 그러다가 크리스토퍼 놀란이 감독을 할 거라는 이야기를 듣고 안심이 됐다. 크리스도 나처럼 사탕발림으로 배트맨을 만들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건 분명했다. 하지만 이 영화가 지금까지 내가 작업해온, 도전적이고 실험적인 영화들의 연장선상에 있지 않다는 것도 느꼈다. 어쨌든 스튜디오의 대작이니까. 그리고 내가 캐스팅된 뒤에, 일각에서 이번 영화가 또 다른 실패작이 되지 않을까 우려했었다는 것도 안다. 고민하지는 않았다. 내가 뭘 할 수 있었을까? 진정한 연기자라면 외부 조건이나 스테레오 타입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똑같은 상황에서 똑같은 캐릭터만 연기하는 배우는 되고 싶지 않다.

-어떻게 배트맨을 준비했나.

=7개월 촬영. 10개월 준비 과정이었다. 몸만들기, 킥복싱, 가라테 등 액션 연습, 와이어 연습 등. 배트맨은 거친 캐릭터다. 사실 미친놈이다. 27년 동안 마음속에 분노를 담고 준비하다니. 그래서 그 광기어린 트레이닝을 받아온 캐릭터에 어울리는 독특한 액션신을 만들었다. 배트맨이 싸울 때는 물러서지 않고 한방에 내리친다. 마음속의 분노를 내려치는 것이다. 그리고 배트맨은 슈퍼맨이 아니니까, 인간의 한계를 넘지 않는 액션을 보여준다. 와이어 말고는 특수효과를 사용하지 않았다. 이제 사람들을 놀라게 할 특수효과도 없지 않나.

-배트맨의 스타일도 새로워졌는지.

=배트맨의 패션과 장비는 철저하게 실용적인 스타일이다. 옷을 입으면, 내가 배트맨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웃음) 그래서, 배트맨 의상을 입었을 때는 목소리도 바꾸어 연기했다. 다른 페르소나니까. (전 작품 때문에 몸무게도 엄청나게 늘렸다던데?) 한 20파운드쯤? 의사들이 다 말리는 일이었지만, 가끔 위험한 줄 알면서도 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 다시는 안 하겠지만.

사진제공 워너브러더스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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