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음은 ‘킬리언’이다. 미국식으로 ‘실리언’이면 편하겠는데, 까다롭게도 아일랜드식 발음을 따라 그는 ‘킬리언 머피’로 불린다. 랠프 파인즈가 아닌 레이프 파인즈도 그랬다. 미국식 영어에 익숙한 사람들은 종종 발음에 부주의하고, 영국 배우들은 교정의 번거로움을 감수해야 한다. 아일랜드 남부의 소도시 코크 출생인 킬리언 머피(29)도 대니 보일의 좀비영화 <28일후…>의 주연으로 밀려들기 시작한 미국 매체들과의 인터뷰를 치르며 한동안 그렇게 했다. 지겹지만 까다롭게 넘어가곤 한 것이 또 있다. 아일랜드 출신으로 할리우드에 입성한 배우, 라는 꼬리표다. 킬리언 머피는 앤서니 밍겔라의 <콜드 마운틴>과 피터 웨버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거쳐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과 작가 데이비드 고이어가 성공적으로 완성한 <배트맨> 시리즈의 프리퀄 <배트맨 비긴즈>에서 (행동거지가 너무나 사악해 기억해두지 않을 수 없는) 악역 스캐어크로로 출연했다. “콜린 파렐처럼 할리우드 진출에 성공하셨군요.” “아일랜드식 악센트를 버리느라 힘들었겠어요.” 많은 기자들이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그의 대답은 이랬다. “콜린 파렐과 저는 고향만 빼면 똑같은 게 하나도 없습니다. 미국식 악센트를 구사하는 것도 별로 어렵지 않아요. 저도 어렸을 때부터 TV 많이 봤거든요? TV 앞에 딱 붙어서 <맥가이버> <A팀> 같은 드라마를 매일 보고 살았습니다.”
많은 영국계 배우들이 그러하듯, 킬리언 머피는 그 나라 연극의 뿌리 깊은 전통하에서 연극인의 자긍심을 먼저 배웠다. 그는 더블린에서 최고의 명성과 역사를 자랑하는 드루이드극단 출신이고, 지금도 연극계 지인들에게서 가장 큰 조언과 힘을 얻는다. 본래는 “돈도 잘 벌고 성실한 직업, 변호사”의 꿈을 가진 코크대 법대생이었다. 연기는 취미였다. 그의 삶을 바꾼 것은 천재작가 엔다 월시가 쓴 희곡 <디스코 픽스>(Disco Pigs, 1996)다. 비정상적인 옆집 소녀에게 정신나갈 정도로 빠져버린 주인공 소년 역을 따내려고 킬리언 머피는 연출자 펫 키어넌을 지겹게 쫓아다니며 “당신이 왜 나를 써야 하는가”에 대한 장광설을 늘어놓았다. 취미활동치고 지나친 열정을 저도 모르게 쏟았더니, 상연 뒤 열광적인 호평이 쏟아졌다.
킬리언 머피는 5년 뒤 커스틴 셰리던 감독의 동명영화에서도 주연을 했다. “똑같은 역할을 두번 해도 다 잘한다”고 칭찬들이 또 빗발쳤다. 그즈음 그는 이미 영국 연극/영화계의 똘똘한 유망주였다. 연기를 한다 치면 팬티 차림으로 무대를 누비다가도, 정신병원 안에서 스스로 상처를 보듬고 꿈을 키우는 젊은이의 초상도 아름답게 그려냈다(<세상 끝에서>(2000)). J. M. 사인이 쓴 희곡 <서부의 플레이보이>(The Playboy of the Western World)는 믹 랠리라는 배우가 곧 주인공 크리스티 마혼으로 치환될 만큼 초연의 인상이 진한 작품이었는데, 연출자 게리 하인즈는 <디스코 픽스>의 소년을 10년 가까이 눈여겨봐두었다가 2004년 새로운 크리스티 마혼 역으로 불러들였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배트맨 역을 뽑는 오디션장에서 발 킬머가 입었던 배트맨 슈트 속의 킬리언 머피를 보고 “크리스천 베일처럼 조용하지만 그 속에 더 많은 것들이 움직일 것 같은 배우”라고 생각해서 그를 그냥 돌려보내지 않았다. “그의 눈은 세상에서 가장 독특하다. 그 눈을 잡아내려고, 스캐어크로의 클로즈업을 찍을 때도 어떻게든 안경을 벗길 구실을 만드느라 애썼다.”(스캐어크로는 평소 안경을 쓴다)
킬리언 머피는 (커리어 성격의 차이라는 점에서) 콜린 파렐처럼 되려고 할리우드에 간 것이 아니다. “커버에 실린 내 이름만으로 잡지를 팔아줄 수 있을 만큼” 스타가 되기에는 카메라가 끔찍하게 싫고, 존경해오던 필립 세이무어 호프먼을 뉴욕행 비행기 안에서 조우했을 때는 마치 몇년간 쫓아다닌 스토커처럼 그의 주변을 어슬렁거리다 “저기, 제가요, 당신 연기를 진짜 좋아하거든요. 당신 영화들은 다 좋아해요”라고 힘들게 말하고는 얼굴이 발갛게 되어 도망친 기억도 있다(그의 칭찬을 들은 호프먼도 얼굴을 붉혔다 한다). 내성적이다보니 얼굴이 붉어졌지만, 기회를 놓치기 싫은 자존심에 말을 걸었다. 고집스럽고 예민한 채식주의자이며 자신에게 들어오는 시나리오는 “아무리 허접한 것이라도” 죄다 읽어본다는 까다로운 킬리언 머피는 웨스 크레이븐의 호러 <레드 아이>, 닐 조던의 신작 <토성에서의 아침>, 켄 로치의 신작 <보리를 흔드는 바람> 등을 차기작으로 직접 선택했다. <보리…>에서는 1차대전 시기의 아일랜드 독립군을, <토성…>에서는 트랜스젠더 창녀를 연기한다. 프랑스어 교사 어머니와 장학사 아버지 밑에서 평범히 자라 스물여덟에 가정을 꾸렸을 만큼 사생활은 안정적이지만, 연기만큼은 적어도 스스로 한계가 없다고 믿는다. 그것은 영웅 배트맨이 아니라 열등감에 휩싸인 악역 스캐어크로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 도달한, 연기수업 한번 받은 적 없이 차갑게 얼어붙은 얼굴과 왜소한 체격을 갖고 연극무대를 누벼온 아일랜드 연극인의 자존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