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품창고의 할아버지가 될 생각이 없다면 소품팀장은 꿈꾸지 말아라.” <형사 Dualist>를 포함하여 8편의 영화의 크레딧에 소품팀장으로 이름을 올린 권진모(29)씨가 팀원들에게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다. 그에 의하면 “10년을 일해도 장인이 될 수 없고, 미술감독이며 감독 밑에서 자기 뜻도 못 펼치는” 직책이 바로 소품팀장이다. 영화제작에 있어 소품이 차지하는 위치에 대한 엄청난 철학까지는 아니어도, 자기만의 뚜렷한 소신이 있지 않을까 싶었지만, 권진모씨는 단호했다. 영화판에 발을 들여놓은 이래, 단 한순간도 소품팀장을 꿈꿔본 적이 없다는 그의 목표는 미술감독. 강보현, 김진종, 박준, 이민혁, 배진경, 조기원씨 등 그의 소품팀원들 역시 미래의 감독, 미술감독, 프로듀서들이다.
그러나 충무로에서도 사연이 많기로 소문난 권진모씨가 처음부터 영화를 목표로 했던 것은 아니다. 대입 100일 전부터 오렌지와 바나나만을 그려대면서 실기를 준비한 끝에 마산대학교 미대에 진학했지만, 졸업을 앞둔 그에게는 아무런 일자리도 주어지지 않았다. 무작정 상경해 KBS 공개홀을 찾아간 그는 즉석에서 계약직으로 조명부에 고용됐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별관 스튜디오로 ‘퇴출’되어 미술팀에서 일하게 된 그는 “드라마를 위해 매번 똑같은 세팅만을 반복하는 것이 지겨워졌다”. 그래서 다시 무작정 귀향하던 길에 <씨네21>을 구입한 그는, 우연히 촬영현장 기사를 접했다. 그리고는 “이런 일이 있었구나”라는 생각에 도착 즉시 서울행 버스를 잡아타고 조명감독협회를 찾아가기에 이른 것. 왜 하필 조명감독협회냐고? 촬영감독협회와 감독협회까지 차례로 돌아볼 작정이었는데 가장 가까운 곳이 조명감독협회였다니, 그의 인생사에 유난히 ‘우연히’와 ‘무작정’이라는 단어가 자꾸만 튀어나오는 이유를 알겠다. 미술에서 방송으로, 조명에서 다시 미술로. 무작정 달려들다보니 우연히 맞닥뜨리게 된 모든 것들에 최선을 다한 것이, 권진모씨가 여태껏 영화 경력을 쌓아온 비결이다.
우여곡절 끝에 관계를 맺게 된 영화판, 시작은 어쩌다보니 조명팀이었다지만, 앞뒤 상황을 알게 된 그가 2년 뒤 미술팀이 아닌, 소품팀에 들어간 건 또 무슨 이유였을까. “당시 미술감독이라는 스탭이 따로 있는 영화가 별로 없었다. 감독님이 의자를 필요하다고 하면, 어떤 의자냐고 물어보고, 빨간색이라고 하면, 빨간색 의자를 구해서 갖다주면 끝인 식으로 소품팀이 전부였다.” 권진모씨가 처음으로 소품팀 스탭으로 일한 영화는 <인정사정 볼 것 없다>. “모니터도 볼 수 없는” 소품팀 막내로, 화면에선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만한 “저 멀리 낚시꾼이 들고 있는 낚싯대 하나까지” 챙겨가면서 고생했지만, 미술에 유달리 꼼꼼한 이명세 감독 밑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던 작품이다. 그로부터 6년 뒤, 이명세 감독을 다시 만난 <형사>에선, 미술감독으로 데뷔를 꿈꿔볼 만한 경력이 쌓이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는 다시 고개를 젓는다. “슬픈눈이 기생집에서 호사스런 음식상을 받는 장면이 있었다. 딴에는 괜찮은 음식을 장만한답시고 약과며 전병을 내놨는데, 감독님께서 다시 준비하라고 하시면서 나는 생각도 못했던 그 시대의 화려한 음식들을 설명해주셨다. 미술감독은 조선시대의 음식까지 다 알아야 하는데, 난 모르는 게 너무 많다. 아직 멀었다.”
권진모씨가 생각하는 소품팀 최고의 덕목은 “언제나 감독의 입장에서 물건을 구하는 능력”. 그가 가장 존경하는 미술감독은 의상, 요리, 인테리어 등 무려 4개 분야를 섭렵한 정구호(<텔미썸딩> <정사>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등)씨다. 많이 알수록 연출의 의도를 파악하고 보완할 수 있는 건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형사>의 촬영기간 동안 여러 가지 희귀한 소품들을 싼값에 빌릴 수 있었던 것이 가장 기뻤다는 그는, 앞으로 미술감독으로 데뷔를 한다면 자기가 미처 모르는 것을 일깨워주는 감독, 미술적으로 이해와 지원을 아끼지 않는 제작사를 만나고 싶다고 말한다. 영화 한편을 마친 뒤라 스케줄이 다소 널널하지 않을까 싶지만, 그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그의 소품팀에서 연출을 지망하는 동생에게 영화에 대해서 배워야 하고, 음식부터 의상, 미술에 대해 공부하려면 책도 많이 읽어야 한다. 이를 위해 친구들에게 문화상품권을 두둑하게 ‘뺏어놓았다’며 의기양양해하는 그의 눈이, 장난기를 가득 담고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