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사 영화 <캐샨>이 개봉됨에 따라 작품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들 중에는 스타일리시한 영상에 익숙한 신세대들 보다는 20여 년 전 원작 만화영화를 보면서 자라온 386세대들이 더 많을 것이다. “단 하나뿐인 목숨을 바쳐 새로 태어난 불사신 캐샨”이라는 주제가가 아직도 많은 이들의 기억에 남아 있지만, 방영된 지 오랜 세월이 지난만큼 애니메이션 자체에 대한 자료는 그리 많지 않은 편이다.
기초적인 설정과 캐릭터만 빌려 새롭게 바뀐 영화판을 보기에 앞서 원작에 대한 복습을 하는 차원에서 애니메이션 작품 <신조인간 캐샨>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오리지널 <캐샨>은 이런 작품
<독수리 5형제(일본명: 과학닌자대 갓챠맨)> <이상한 나라의 폴> <개구리 왕눈이> 등으로 1970년대 명작들을 선보였던 ‘타츠노코 프로덕션’은, <공각기동대>의 오시이 마모루 등 훗날 일본의 영상업계를 이끌어갈 크리에이터들의 산실로서 지금까지도 명성을 날리는 일본의 애니메이션 제작사다.
그곳에서 1973년에 제작한 <신조인간 캐샨>은 SF 액션 애니메이션의 대표작으로 디스토피아적인 미래세계를 다룬, 당시로서는 독특한 분위기의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타츠노코가 ‘메르헨(동화) 노선’으로 제작한 <해치의 대모험> <개구리 왕눈이>의 후속 시리즈로 공개되어 세간의 주목을 받았는데, 이는 당시 앞서 방영됐던 <독수리 5형제>가 기대 이상의 시청률로 인해 1년 더 연장 방영되면서 <캐샨>의 방영 시기가 미뤄진 결과라고 한다.
작품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공해가 만연된 미래사회. 로봇 공학의 권위자 아즈마 박사는 공해처리용 안드로이드를 개발한다. 하지만 번개를 맞아 회로가 비정상적으로 바뀐 안드로이드 BK-1은 스스로를 브라이킹 보스라고 칭하고 박사의 연구소를 본거지로 한 안드로 군단을 결성한다. 로봇의 독립을 선언하고 인류에게 선전포고를 한 것이다.
연구소에서 쫓겨난 아즈마 박사와 그의 아들 테츠야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좋은 뜻으로 안드로이드를 개발했지만 결과적으로 인류에게 위협을 끼치는 존재를 탄생시킨 그들에게 사람들의 비난이 쏟아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한편 안드로 군단에게 쫓기던 테츠야의 연인 루나는 아즈마 집안의 애견 럭키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한다. 하지만 그 와중에 럭키는 심각한 부상을 입는다. 아즈마 박사는 죽어가는 럭키를 되살리기 위해 럭키의 뇌를 이식한 개 형태의 안드로이드 ‘프렌더’를 만든다.
그런데 그러한 안드로이드 기술을 본 테츠야는 부친의 오명을 씻고 안드로 군단을 물리치기 위해 스스로 안드로이드가 되겠다고 자청한다. 때마침 브라이킹 보스는 자신을 창조해낸 아즈마 박사야말로 최대의 위협이라고 보고 박사가 숨은 곳을 습격한다. 위기의 순간 등장한 하얀 복장의 안드로이드. 그가 바로 테츠야의 새로운 모습 ‘신조인간 캐샨’이었던 것이다.
강력한 힘을 가진 캐샨이었지만 몰려드는 적들을 모두 감당하지 못하고 아즈마 박사와 테츠야의 모친 미도리는 안드로 군단에게 납치되고 만다. 이에 캐샨은 양친을 되찾고 인류를 구하기 위해 프렌더, 루나와 함께 길을 나선다. 허나 그들이 상대해야하는 것은 안드로 군단뿐만이 아니었다. 스스로가 안드로이드이기 때문에 자신에게 돌팔매질하는 민중들의 따가운 시선도 감내해야하는 괴로운 여정인 것이다.
이처럼 캐샨은 자신의 숙적인 안드로 군단과 자신을 증오하는 인간들, 양쪽에서 모두 외면당하는 고독한 히어로다. 여러 주인공이 협력해서 적과 싸우는 타츠노코의 다른 작품 <독수리 5형제>와는 달리 혈혈단신으로 악과 맞선다는 무거운 내용이 당시 어린 시청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으며 지금까지 명작으로 기억되는 가장 큰 이유로 꼽히고 있다.
캐샨을 돕는 조역들 또한 화제였다. 납치된 캐샨의 모친 미도리는 백조 형태의 안드로이드가 되어 안드로 군단의 비밀정보를 아들에게 전해주며, 캐샨의 애견이었던 안드로이드 프렌더는 강력한 손톱과 이빨 그리고 입에서 불을 뿜으며 그를 지켜준다.
특히 자동차, 제트기, 잠수함 등 필요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도 변신할 수 있는 프렌더는 당시 아이들의 인기를 독차지하여 주인공 캐샨 이상의 인기를 얻기도 했다.
한편 <신조인간 캐샨>이 다른 히어로 애니메이션과 달랐던 특징 중 하나는 바로 공해문제를 다뤘다는 점이다. 당시 일본의 고도성장과 맞물린 산업공해 문제는 아이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데, 공장폐수로 인한 이타이이타이병 등 피해사례가 접수되고, 고교생들이 광화학 스모그로 두통에 시달리는 등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기 시작했다.
1971년도 일본의 특촬영화 <고지라 대 헤도라>에서는 산업공해로 발생한 괴물을 등장하는 등 공해문제가 영화의 소재로도 쓰이게 되었으며, 이후 등장한 <신조인간 캐샨>에서 안드로 군단이 탄생한 배경에 공해문제가 나온 것은 당시 사회상을 반영함과 동시에 자연을 거스르는 인간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를 담은 것이라 할 수 있다(리메이크된 영화판에서는 공해 대신 최근 화두가 되고 있는 국가간의 전쟁을 소재로 하고 있다).
<신조인간 캐샨>의 또 다른 의의는 당시 참여한 스탭들의 화려한 면면이다. <개구리 왕눈이> <타임보칸> 등 타츠노코의 명작들을 감독했던 사사가와 히로시를 비롯해, 캐릭터 디자인에 아마노 요시타카(파이널 판타지), 연출에 토미노 요시유키(기동전사 건담) 등 유수의 스탭들이 참여했으며, 이들이 창조한 디스토피아적인 작품의 분위기는 훗날 여러 다른 SF 애니메이션들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또한 지난 1993년에는 타츠노코 창립 30주년 기념작으로 4부작 <캐샨> OVA(오리지널 비디오 애니메이션)이 제작되기도 했다. 신세대에 맞춰 새로운 감각으로 제작되었는데, 특히 캐릭터 디자인과 작화감독에 <카이트>로 유명한 우메즈 야스오미가 참여해 미형 캐릭터의 진수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완성됐다. 다만 원작과의 이질감 탓에 올드팬의 환영을 받지는 못했다.
DVD로 만날 수 있는 <캐샨>
<캐샨>의 영화화에 맞춰 지난 2004년 1월에는 마침내 오리지널 <신조인간 캐샨>의 DVD 박스세트가 일본에서 발매됐다. 총 9장의 디스크 35화의 시리즈를 모두 담았으며, 방영되지 않았던 영상 자료와 설정 자료집 등 부가영상이 수록됐다.
특히 30년이 지난 작품임에도 최신 디지털 화상 처리 기술로 화질을 향상시켰다고 소개하고 있는데, 고전 애니메이션을 이처럼 새롭게 발굴해 상품화시키는 그들의 능력은 우리가 본받아야할 점이 아닌가 싶다.
국내에서는 올 하반기에 실사판 <캐샨>이 출시될 예정. 제작사에 따르면 ‘얼티밋 에디션’으로 출시된 일본판과 마찬가지로 호화 사양에 풍성한 부록들을 담아 선보일 전망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올드팬들로서는 오리지널 <캐샨>의 발매가 더욱 손꼽아 기다려지지 않을까 싶다. 국내 DVD 시장 여건 상 고전 장편 애니메이션의 출시가 어렵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의견이지만 아무쪼록 영화판이 좋은 반응을 얻어 애니메이션도 국내 소개될 수 있기를 희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