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리포트]
영화, 일상으로의 초대, 아시아 감독 3인전
2000-03-07
글 : 허문영 (영화평론가)
3월10일부터 아트선재센터서

‘일상과 이탈’이란 간판을 달고 이시이 소고, 차이밍량, 홍상수 등 세 아시아 감독의 영화상영회와 감독초청 포럼이 3월10일부터 12일까지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린다. 세 감독은 고전적 극영화의 계율을 벗어던지고 파격적 스타일로 일상의 리얼리티를 예민하게 포착함으로써 국제평단의 이목을 끌고 있다. 행사 동안 매일 한 감독의 주요작품이 상영되며 이어 감독과의 대화 및 패널들이 참가하는 포럼이 벌어진다. 마지막날엔 세 감독이 한데 모인 자리에서 그들의 영화세계를 비교·토론하는 연합포럼이 예정돼 있다. 이번 행사는 그동안 다소 모호한 상태로 남용됐던 일상성의 미학이란 용어를 재정립하고, 그를 통해 촉망받는 세 아시아 감독의 성취를 정확히 평가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으로 보인다.

홍상수, 일상으로의 초대

<강원도의 힘>

영화에서 일상성이란, 널리 퍼져 있는 생각과 달리, 예술영화의 표지가 아니라 모든 영화가 타고나는 것이다. 그것은 제도나 기관, 권력자 혹은 저항세력처럼 사회적 권력을 기준으로 세상을 그리는 옛 역사학과 달리, 영화가 개인이 영위하는 생활의 구체적 계기를 담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며 이 점은 소설이 가진 유전인자와 동일하다. 마르크 페로가 <역사와 영화>에서 말했듯, ‘역사의 고아’였던 일상생활사를 역사 연구의 중심주제로 올려놓은 아날학파가 영화를 역사적 정보의 광맥으로 취급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리의 영화담론에서 대개 일상성의 미학이란 이름으로 묶이는 미덕은, 따지고 보면 소재가 아니라 형식을 지칭한다. 체험을 통해 누구나 알고 있듯이, 사람들의 실제 생활은 정통 드라마의 극적 구조와 무관하다. 어떤 행동에도 심리적 동기가 불분명하며, 한 사건이 진행되는 과정도 기승전결의 구조를 따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매끈한 자기완결적 이야기 문법을 확립한 고전기 할리우드 스타일의 영화가 ‘환영주의’라는 비판을 받으면서도 여전히 대중의 압도적 지지를 얻는 이유는 그를 통해 모호하고 다중적인 일상으로부터 일종의 해방감을 맛보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 반대편에 다수 대중의 지지를 포기하면서도 실제 삶의 모순과 혼돈을 고집스럽게 드러내는 소수가 끈질기게 있어왔다. 이들은 1960년을 전후로 프랑스 뉴웨이브처럼 조직적 반기를 들며, 때론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처럼 독자적 세계를 형성하며, 모더니즘 영화의 계보를 이어왔다.

한국에서 갑자기 일상성의 미학이란 용어가 유행한 것은 1996년 홍상수 감독의 등장 이후다. 한국영화계가 고전기 할리우드의 문법을 이젠 세련되게 구사하게 된 것에 자족하고 있을 무렵, 홍상수는 난데없이 그를 맹공하는 영화를 들고 나왔다. 그의 타깃이 기존 영화의 비일상성이 아니라 ‘환영주의’라는 사실은 분명했다. 홍상수의 영화보다 훨씬 더 사소하고 일상적인 것들을 붙들고 있는 주류 영화들도 많았다. 홍상수는 똑같이 일상적인 것들을 동원했지만, 그것의 전면적 재구성을 통해 관습적 드라마의 형식에 갇혀 있는 의식의 각질을 집요하게 가격했던 것이다. 그의 영화에 붙여진 일상성의 미학이란 용어에는 얼마간의 오해가 있었던 셈이다.

삼인 삼색, 다른 눈의 사나이들

<꿈의 미로>

그럼에도 일상성의 미학이 의미있다면, 그것이 제3세계 영화인으로서의 자의식에 연관돼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기실 홍상수 영화의 ‘일상성’이 충격적이었던 것은, 영화의 예술성을 사회비판성이나 역사의식과 동일시해온 비평계 혹은 한국 지식인사회의 관성 때문이었다. 제1세계와 제2세계의 부산물이나 피해자로 자기를 위치지우는 전도된 사고를 벗어나기 위해선 가장 사소한 것에서부터 주체로서의 자기가 어떻게 구성되고 있는지를 고통스럽게 응시해야 하는데, 이 필요성이 일상성에 대한 천착을 낳게 된다. “사소한 것에 매몰되지 않기 위해선 정치적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로빈 우드의 신념을 역으로 실천하는 것은 적어도 한국에선 80년대식 정치주의의 반지성적 요소를 해독하는 데 필수적인 과정이었다.

홍상수를 포함한 아시아의 세 감독에게서 일상성의 의미를 탐색하는 것도 이런 맥락일 것이다. 홍상수는 브레송처럼 내러티브 지우기를 시도하지만 영적 고양을 지향한 브레송과는 반대로 텅 빈 삶의 한가운데 자기를 가둬버린다. 대만의 차이밍량은 홍상수와 달리 이야기와 캐릭터의 효과를 버리지 않으면서 일상의 끔찍한 상처와 고름을 전시한다. 일본의 이시이 소고는 1세계적 권태와 3세계적 공포가 착종된 일본사회 특유의 혼돈을 느린 미스터리와 판타지로 포착한다. 각기 다른 방식이지만, 이들은 모두 주변화된 일상의 중심부를 영화적 관습과 정면 충돌하며 통과하는 중이다. 세 감독의 길지 않은 필모그래피는 이들이 일상의 현상학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전망으로 비약할 것이란 기대를 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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