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피에르 로셰가 칠순을 넘긴 나이에 발표한 첫 번째 소설 <쥴 앤 짐>은 안타깝게도 주목받지 못했다. 몇년 뒤 할인서적 코너에 꽂혀 있던 <쥴 앤 짐>은 프랑수아 트뤼포의 눈에 띄게 된다. 두 사람은 서신을 교환했고, 트뤼포는 <쥴 앤 짐>을 영화화하고 싶다는 말을 전했다(하지만 로셰는 <쥴 앤 짐>이 만들어지기 전에 숨을 거둔다). 트뤼포는 로셰의 소설을 사랑했다. 그는 1962년에 <쥴 앤 짐>을, 1971년엔 로셰의 두 번째 소설이자 <쥴 앤 짐>의 관계를 뒤집어놓은 <두 영국 소녀>를 영화로 만들었으니, 칠순 노인의 젊은 시절 사랑 이야기는 트뤼포의 터치에 의해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 트뤼포 작품 중에서도 유달리 격렬한 감정의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두 작품의 시작은 그랬다.
얼마 전 에른스트 루비치 회고전에서 <삶의 설계>를 보는 순간 <쥴 앤 짐>이 떠올랐다. 예술가인 두 남자가 사랑했던 한 여자, 그들이 오랜 세월 나누는 사랑 이야기. 하지만 미리암 홉킨스와 잔 모로의 분위기가 다른 만큼, <쥴 앤 짐>은 고전적이고 낭만적인 러브스토리인 <삶의 설계>에 관계와 삶에 관한 성찰과 씁쓸함을 더했다. 1912년의 파리, 오스트리아인 쥘과 프랑스인 짐은 이상적인 여자 카트린을 만나자마자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20여년 동안 파리와 1차대전과 라인강과 센강을 오가며 사랑을 나누는 그들에게 하나의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다. <쥴 앤 짐>은 달려가는 세 사람 혹은 자전거신만으로 기억되는 낭만적인 소품이 아니라, 삶과 예술, 관계, 죽음, 향수 그리고 온갖 영감이 머릿속에서 뒤섞여 흔들리고 폭발하는 경험이다. <쥴 앤 짐>은 가을날에 기억하는 봄날의 햇살과 같은 영화다. 그리고 그 햇살이 언제나 따스한 생명력을 지닐 수 있는 건 영화의 특출한 감성과 스타일- 로셰의 원작과 조르주 들르뤼 음악의 촉촉한 감수성과 트뤼포와 장 그뤼오의 간략한 대사와 라울 쿠타르의 날렵한 영상이 만들어낸 부조화의 조화- 에 힘입은 바 크다. 카트린의 마지막 대사에 이어 질주하는 차와 세 사람의 얼굴이 교차편집되는 영화의 끝부분은 그 절정이다.
<쥴 앤 짐> DVD는 프랑스 MK2사 마스터의 특성을 따르고 있다. 섬세함보다는 부드러운 영상과 원음이 강조된 본편 외에 영화 소개, 40년의 세월을 간직한 잔 모로의 감동적인 음성해설, 트뤼포가 말하는 원작과 원작자, 트뤼포가 선별한 장면해설, 트뤼포 영화 예고편 모음 등 풍부한 부록을 자랑한다. 다만 싱크가 간혹 맞지 않아 거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