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연애의 목적>의 조 선생 역 이대연
2005-07-01
글 : 이종도
사진 : 이혜정
“빈구석이 많은 게 배우로서의 내 자산이지”

이대연은 물 흐르듯 스크린에서 흘러나와 관객 속으로 스며드는 사람이다. 충만하기보다는 비어 있고, 폭발하기보다는 침묵하는 연기는 단번에 뇌리에 꽂히지 않는다. 의사인가 하면(<장화, 홍련>) 형사이고(<복수는 나의 것>) 교사이기도 하다(<연애의 목적>). 믿음직스런 얼굴 뒤편으로 그는 여자를 팔아넘기거나(<나쁜 남자>) 깊은 상처를 안겼다(<여자, 정혜>). 조용하게 만인의 삶을 묵묵히 연기하던 그가 요즘 바빠졌다. 연극 <아트>에서 문방구점 주인으로 질펀한 수다를 쏟아내 사랑을 한몸에 받더니, <댄서의 순정>에서 우스꽝스러운 출입국관리소 직원으로 큰 비중을 차지했고, <연애의 목적>에선 그보다 더 큰 역할인 조 선생 역을 맡아 눈길을 끌었다.

평안도가 고향인 부모님 밑에서 자란 소년은 ‘귀남이’였다. 딸 둘을 낳고 늦게 얻은 아들이었다. 강원도에서 태어났지만 부모님은 일찌감치 초등학교 때부터 소년을 서울로 유학보냈다. 위장편입까지 시켜 강남의 고등학교에 들어간 소년은 어려서부터 점잖고 어른스럽다는 소리가 콤플렉스였다. 모범생 소년은 자신의 모범생 같은 면모가 싫었다. ‘위악적인 포즈’로 시작한 게 연극이었고 연세대 극예술연구회에서 연극을 시작, 1988년부터 극단 신시 연우무대 차이무 등에서 연극을 했다. 연극반 친구들은 그가 배우가 되리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지만 이대연은 우상이었던 김갑수를 우러러보며 연극을 했고, 술로 무대 위에서 버텼다.

그는 13년 동안 즐겨 피우던 담배가 단종이 되어 아쉽다고 했다. 인생에는 대체 불가능한 것들이 여럿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종이 되어 더이상 피울 수 없는 담배. 더이상 세상에 없는 사랑하는 사람(몇년 전 죽음이 그의 아내를 거두어갔다). 어느 누구도 그 아니면 분위기가 나지 않을 법한 그런 연기.

-연극 <아트>, 영화 <연애의 목적> <댄서의 순정>, 그리고 TV드라마까지 장르를 넘나들며 아주 바쁘게 일하고 있다. 역할도 점점 커지고 있다. 거의 주연을 위협하는 수준이랄까.

=아이, 무슨. 날 찾아주는 사람이 많은 건 즐겁고 감사한 일이지. 그리고 재미있어. 이런저런 일을 할 수 있다는 게. 정말 개성 강하고 자기 걸 똑 부러지게 하는 사람 보면 부럽다. 난 그런 게 없다. 생긴 것도 그렇고 저 사람만이 할 수 있다, 이런 게 없어. 그게 콤플렉스인데. 물론 양면성도 있는데, 뒤집어보면 쓰임새가 넓다는 면에서 보면, 덜 차 있으니까 그걸 재료로 다른 걸 만들 수 있다고 판단할 수 있고, 그런 여지가 배우로서의 자산이기도 해. 대학 졸업하고 극단에 처음 들어갔을 때 김갑수 형 보면 부러웠는데. 무대에 서면 후광이 있다고. 흉내내보려 했는데 내 것이 아니니까 불편해. 티도 나고.

-배우 오지혜는 양아치스러운 모습이 눈곱만큼도 없다고 했는데, 연극판 분위기는 그럴 수 있다고 해도 영화와 드라마의 분위기는 끼나 오버나 자기 홍보 같은 게 요구되는 거 아닌가. 조금 더 냉엄한 곳에서 살아남아야 한다고 할까. 생존뿐만 아니라 본디 그 바닥에 있는 이들 못지않게 활약을 펼치는 것 같다.

=그보다는 배우로서의 부족함에 대한 고민이 힘들지. 남들 다 하는 건데. 연극이 힘들다지만 총각 때야 무슨 돈이 드우? 극단에서 밥사주고 재워주고 술사주는데. 결혼한 다음에 힘들기야 했지. 그래도 사는 지혜가 다 생기니까. 재주도 없는 놈이 개기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해. 분명히 접어두고 가는 부분이 있어. 다 갖추고 할 수는 없으니까. 방송은 그때그때 튀지 않게 가면 되던데. 방송이 아무래도 생활 안정에 도움을 주지. 영화는 하다가도 제의가 한참 안 들어오는데, 내가 1995년 <내일로 흐르는 강>이 데뷔작인데 그뒤로 영화들이 많이 안 들어왔다고. 방송은 상대적으로 안정적이지.

-연극 <아트>의 성공도 그렇고 요즘 출연작도 그렇고, 조금 주책맞다고 할까, 코미디쪽에서 더 강한 호소력을 얻는 것 같다. 느물거리고 능청맞고 만만하고, 좀더 자기를 내려놓는다고 할까.

=특별히 의도하는 건 아닌데, 그런 쓰임새로 쓸 수 있다고 본 게 아닐까. 그래도 <댄서의 순정>은 아쉬워. 무척 재미있는 역인데 중간에 그 역이 증발되잖아. 관리소 직원끼리 사랑도 싹트고, 둘이서 주인공들의 사랑을 마음속으로 응원도 하고, 몰래 찍은 사진 가운데 예쁘게 나온 걸 선물로 주기도 하는데 아쉽게 잘렸지. 잘려서 아쉬운 게 아니라 캐릭터가 완결성을 갖추지 못하고 증발된 것이 아쉽지, 뭐.

-그런데 그게 ‘망가지면 된다’는 얘기는 아닌 것 같고, 리얼리즘적인 또는 서민적인 코미디 연기가 제격이라는 게 더 맞는 얘기 같다.

=난 좋은 시나리오라는 도약대가 없으면 잘 못하는 배우라서. 그런 게 없어도 코미디를 잘하는 배우들이 부러운데, 나는 도약대가 없으면 그렇게 못 가. 도약대가 있으면 더 뒤집어지게 할 수 있을걸. 그런 재능을 가진 배우들이 있고 나는 그렇지를 못하고. 그런 웃기는 걸 찾아내는 게 배우로서 괜찮은 재미인데 요즘 영화들은 너무 구체적이고 떠먹여주는 설정을 하는 데 익숙해져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점잖게 생긴 자기 모습을 배반한다고나 할까. 의사 차림도 잘 어울리지만, 거꾸로 <올드보이>의 걸인처럼 가는 게 먹힌다고 할까.

=여름에 개봉할 <광식이 동생 광태>에 한신 나오는 거지만 의사로 재미있게 찍었어. 주인공이 술을 마시면 필름이 끊기는 현상 때문에 나를 찾아오지. 그런데 의사도 환자 못지않아. 선문답으로 대화를 주고받는데 재미있어. 이렇게 쓰인 장면이 있으면, 야, 이거다 싶은 게 있어. 그럼 기분 좋지. 글이란 게 다양한 사람을 보는 재미일 텐데 그걸 끄집어낼 수 있는 글이 많았으면 해. 그게 짚고 뛰어넘어가는 도약대거든. 그런 구다리(장면) 하나가 매력을 느끼게 하는 거니까.

-그런데 몇년 전만 해도 <나쁜 남자>에서 서원을 윤락가에 넘겼던 중년 사내나 <달마야 놀자>의 비열한 조폭, <박하사탕>에서 설경구 뒤통수를 치는 동업자, 연극 <보이체크>에서의 주정뱅이 중대장이 더 어울렸거나, 본인도 그런 연기를 해왔다. 또는 박기용 감독 <낙타(들)> 때처럼 나이들어가는 자신의 인생에 낯설어 하는 중년 연기를 하던가.

=어떻게 보면 내가 빈구석이 많잖아. 내가 악역에 잘 어울린다는 생각은 없고 진짜 같은 악역을 해보고 싶은 마음은 있지. 남들이 생각하는 건 아마도 빈구석에서 찾을 수 있는 수더분하고 털털하고, 그렇다고 마냥 사람 좋은 건 아니고. 저거다, 싶은 구석이 하나만 있으면 사람이 다 설명이 되거든. 배우들이 보물 찾기를 하는데 줍고 따갈 게 많아야 억지를 안 부리지. <아트> 같은 건 써 있는 대로 정직하게만 해도 됐어. 그런 게 잘 쓴 글이지.

=이번 <연애의 목적> 비중은 영화계 입문 이후 가장 큰 것 같다. <낙타(들)>에서 주연을 맡기는 했지만 말이다.

=비중이 크기는 해도 홍과 유림 얘긴데 그냥 변죽만 울려선 안 될 것 같고, 그렇다고 역할의 극중 개입이 크지는 않으니 고민이 많았지. 나오는 빈도에 비해 개입하는 건 적거든. 그냥 왔다갔다하면 죽음이고, 그렇다고 돌출연기도 할 수 없고. 포장마차에서 유림의 따귀를 때리는 장면은 중요하다고 생각했어. 유림에게 따지지도 못하면서 기껏 한다는 말이 희정이가 내 가족 같다는 얘기거든. 그렇게밖에 표현을 못하는 거지. 한 장면으로 조 선생이 어떤 사람인가가 설명이 되면 다른 건 괜찮아. 결정적 한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나이 차이가 열다섯은 넘어뵈는데, 서로 반말을 해대는 유림과의 관계가 흥미로웠다. 최근 한국영화 가운데 돋보이는 개성적인 상하관계다. 친구처럼 ‘씨발’이라고 욕도 하고 말이다.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했고, 분명히 그런 애들을 좋아하는 중년 남자들이 있다니까. 오히려 엉겨붙는 애들. 기 센 후배 놈에게 죽어가는 게 재미있어. 나쁘지 않아. 그런데 해일이 처음에 깍듯하더니 끝날 때 보니까 깍듯하지도 않더만. (웃음)

-하지만 유림과의 차이는 뚜렷해서, 결국 눈치없이 굴다가 욕도 먹고, 그리고 양다리 걸친 유림에게 연애 똑바로 하라고 뺨도 때린다. 이렇게 하기가 쉬웠을까.

=마지막 한구석은 서로 안 건드리는 관계였다고 생각해. 나로선 희정과의 관계가 보기 좋았던 것 같고. 자연인 이대연은 때리거나 하지는 않을 것 같아. 붙잡고 이야기를 했겠지. 마음 한구석에선 부러워하기도 하고. 그럴 수 있지. 내가 못 그래서 그렇지. 유림이가 그렇게 밖으로 쏟아내니까 속보이기는 해도 시원하기는 하지.

-학교 홈페이지나 보라고 말한 뒤엔 조 선생 대사가 없다. 그뒤로 조 선생에 대한 행방은 아무도 알 수가 없다. 그럴 때 비애감 같은 건 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증발된다는 생각은 없었어. 개입할 수 있는 구석이 두 장면이었는데 마지막은 유림과 홍에게 남겨둬야 할 것 같더라고. 그렇다면 나는 페이드 아웃.

-이 영화의 생각에 공감하나. 이데올로기적으로는 출연작 중에 가장 냉소적이면서도 사실적인 것 같다.

=반반이 뚝 잘라져 있지. 전혀 그러지는 못하고 한다 해도 뒤엉키고 엉망이 되니까 귀찮고 싫어서 못할 거고. 반대로 그러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 답답해하고.

-영화에서 비중이 커졌다고 해도, <아트>처럼 폭발력 있는 폭포처럼 쏟아지는 대사의 즐거움이 영화쪽에선 덜하지 않나.

=재미의 종류가 워낙 다른 거지. 영화는 연극처럼 관객과 ‘직거래’ 하는 게 없지. 대신, 이 부분이 분명 재미있을 거야, 예상한 게 맞아떨어지면 쾌감이 커.

-연극을 덜컥 해버리면, 몇달은 영화나 드라마를 하기가 어렵지 않나. 장르의 차이야 문제가 안 되겠지만 우선순위는 뭘로 하나. 개런티인가.

=그래서 갈수록 연극도 더블 캐스팅으로 하거나 공연 기간 짧은 걸로 하는데. 진짜 빤스 벗고 해야 하는 거 나오면 그거만 해야지. 그런데, 영화랑 연극을 같이 할 수 있는 방편은 찾을 수가 있어. 돈도 신경 안 쓸 수 없지.

-아직 처가에서 사나? 딸들과는 얼마나 친하게 지내나.

=누나가 서울로 올라와서 처가에서 나왔다. 너무 오래 산 거 같아서. 딸들과는 얘기 많이 하려고 노력하는데, 우리 직업이 여유 가지려면 한참 여유 가질 수 있지 않나. 방송하고 공연으로 한참 바쁘다가 이제 애들하고 열심히 놀고 있지.

-이렇게 바빠져서야 딸들과 친구가 될 수 있겠나.

=열한살 된 큰애는 벌써 나랑 얘기를 안 하려고 해. 지겨워해도 치근덕대는 거지, 유림이처럼. 아직 본격 사춘기는 아닌 것 같은데. 수다는 둘째랑 주로 떨고. 애들이 내 공연도 보고 드라마도 봐서 워낙 내 작업에 시간이 많이 드는 걸 알아.

-이렇게 바쁘게 일하게 된 건, 어떤 계기가 있는 걸까. 가령 외로움을 잊기 위해서라든지, 갑자기 자기도 모르는 비결로 큰 인기를 끌게 되었다든지, 또는 감독들과 인맥을 쌓아둔 게 효력을 발휘했다든지.

=연극만 할 때도 난 안 쉬는 사람이었어. 쉬면 못 견뎌. 남들은 충전한다는데 난 방전이야. 우울해지고. 왜 사람들 일이 없어지면 산에 가는지 알겠더라고. 바쁘려고 노력해.

-박찬욱 감독 작품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했는데 <친절한 금자씨>에도 나오나.

=진짜 잠깐 나와. 광록이 형하고 복수 삼부작에 다 나오게 됐지. 교도소장으로 두 장면 나오는데, 둘 중 하나는 나오겠지. 케이크신을 자를 순 없겠지. 금자의 케이크가 교도소에서 인정받는다는 걸 보여줘야 하니까.

-박찬욱 감독과는 어떻게 인연이 맺어졌나. 당신 연기 어디가 맘에 든다고 하나. 좋은 감독들과 꽤 많은 작업을 하는 건 운만은 아니겠지.

=<공동경비구역 JSA>에 원래 다른 친구가 하기로 한 건데 박 감독이 연극배우들에게 급히 수소문을 해서 내가 대타로 추천을 받았지. MT를 갔는데 누가 박 감독인지 모르겠더라고. 박 감독이 ‘무슨 낙하산 캐스팅인데 감독도 못 알아 봐’ 농담을 하더라. <공동경비구역…>가 300만 관객을 넘기면서는 100만 관객이 넘을 때마다 술을 마셨는데 박 감독이랑 얘기를 해보니까 자꾸 나와바리(동네)가 겹쳐. 고등학교 1년 선배더라. 글쎄, 내 복이라 생각해. 이미 결정되어 있는 거 말고 애매한 배역 있잖나. 그럴 때 내가 가장 쓰기 만만한 거지. 그런 거 아닐까, 아마도.

-2년 전 드라마 <눈사람>도 그렇고, 최근 드라마 <불새>도 그렇고, <복수는 나의 것>도 그렇고 서민적인 형사로도 잘 나온다.

=덕 본 적도 있어. 드라마 <눈사람> 할 때는 어, 경찰가족이시네요, 라며 교통경찰이 보내줬고 최근에는 반장님 하고 경례를 붙이더라. <오로라 공주>에도 한두 마디밖에 안 하지만 형사과장으로 나올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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