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도시는 이처럼 황량하고 음울한 것인가. 우리는 ‘교통 사고처럼’ 이렇게 느닷없이 만나고 헤어지는가. 어차피 우리네 삶이 근원적으로 외롭고 불안정한 것이라지만 광기로 버텨내야 할 만큼 공포스럽단 말인가. 사는 것이 때로는 익숙하게, 때로는 낯설게 거듭되는 의식과 무의식, 현실과 기억의 착각으로 끊임없이 빨려들어가는 ‘구멍’ 속 같은 것일까. 이곳은, 사랑이란 어디에도 없는 마음의 연옥인가.
‘나’라는 중년 남자, 직업은 외과의사, 평온하게 살 것 같은 인텔리다. 하지만 ‘나’는 매일 술을 마시고 밤거리를 배회하다 난잡한 파티에도 따라간다. 끝을 알 수 없는 쾌락에 탐닉하며 고립 무원의 소외감을 이겨보려 한다. 존재의 불안에서 비롯된 공포는 미치지 않고는 견딜 재간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수술을 하다가 메스를 떨어뜨릴 정도로 손을 떤다. 외과의사에게 손떨림 증세가 있다는 것은 치명적인 일이다. 알코올 중독 탓인가, 위기의식이 들지만 이혼소송 때문에 법정에 나가야 한다.
‘나’는 차를 몰며 사무실로 배달된 카세트 테이프를 듣는다. 선영의 목소리다. ‘나는 선생님을 사랑했지만, 선생님은 나를 단지 섹스 상대로만 여겼고 그래서 떠났노라…’고 운명처럼 만나 욕정을 불사르던 선영이 떠난 이유를 ‘나’는 그제야 알았다. 판사 앞에서 아내와 한바탕 신경전을 벌이고 나와 엄마, 아빠 중에서 누구와 살고 싶냐고 딸에게 묻는다. “혼자 살고 싶어.” 딸의 대답은 싸늘하다. 사는 게 불안하고, 돌파구가 전혀 보이지 않는 암담한 현실은 알코올의 힘으로 의식을 흐리거나 마비시키지 않고는 살아내기가 어려워 보인다. ‘나’의 음울함은 알코올과 섹스의 쾌락으로 가릴 뿐 냉소로 가득하다.
영화는 1999년 12월 어느 하루, 낯선 별장에서 아침을 맞은 ‘나’가 다음날 아침 한강에서 추락한 자동차 안에서 발견될 때까지 만 하루의 행적이다. 사이사이 카세트 테이프로 듣는 선영의 회상을 통해 ‘나’의 기억을 더듬는다. ‘나’의 하루가 현실이라면 카세트 테이프로 재생되는 기억은 ‘대과거’인 셈이다. ‘나’는 기억을 더듬으며 임포텐츠 환자가 비로소 제기능을 찾은 듯 한동안 잊었던 선영을 찾아나선다.
수술한 환자가 위급하다는 연락을 받고 병원으로 달려가던 중 민방위훈련에 걸려 제지당한다. 차를 버리고 어둠 속을 달려 병원에 도착했을 때 이미 환자는 숨져 있었다. 밤거리를 헤매다 찾은 술집은 어젯밤에 왔던 곳이며, 좀전에 지나쳐온 교통 사고 현장이 다시 눈 앞에 보인다. 단순한 착각이 아니라 의식과 무의식, 현실과 기억이 뒤엉킨 부조리다.
낯설고 폭력적인 서울이라는 도시 공간과 현대인들의 음울한 정서를 담은 <구멍>의 이미지는 다분히 탐미적이다. 영화의 주인공만큼이나 감독의 지독한 냉소가 흠씬 묻어난다. 또 ‘나’가 영화를 시종 주도하고 선영이 주요 배역인 정도로 등장인물이 많지 않은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단단한 캐릭터를 앞세우지 않고 이미지를 축적하는 데 주력한 것은 성공한 전략으로 보인다. 게다가 의식의 흐름을 쫓아가면서 시간과 공간을 짜임새 있게 구성하고, 이를 화면으로 옮겨내는 솜씨는 얼치기 신인감독들과는 격이 다르다. 하지만 <구멍>의 이미지나 내용이 그리 새롭지는 않다. 하지만 유행이나 경향에 휩쓸리지 않고, 정통적인 형식과 기법을 기둥삼아, ‘지난한’ 과정을 거쳐 감독 자신의 목소리를 담으려 했다는 점은 큰 미덕이다.
<허수아비>라는 제목으로 나왔다가 <구멍>으로 제목을 바꾼 최인호의 소설이 원작이다. 지난해 부산영화제 뉴커런츠 부문에 상영돼 호평받았으며, 올해 인도영화제에서도 주목받았다. 김국형 감독은 서울예대 영화과를 나와 오랫동안 배창호 감독 등의 조감독을 했고, 촬영을 담당한 석형징도 유영길 촬영감독의 오랜 조수 출신이라 ‘정통 충무로 출신들’이 만든 작품인 셈이다.
김국형 감독 인터뷰
“부조리한 것에 관심이 많다”
-<구멍>이라는 제목의 의미는 무엇인가.
=먼저 우주적 의미의 블랙홀이 아니라 ‘의식의 구멍’ 같은 의미다. 엿보기, 나락에 빠진, 뭐 그런 의미도 있고, 여자의 성기에 대한 비유의 뜻도 있지만 그런 복합적인 의미를 근사하게 다 담아내지 못한 것 같다.
-영화에서 ‘시대에 걸맞지 않는’ 고집스런 스타일 같은 게 느껴진다.
=유행처럼 새로운 이야기, 새로운 감각과 표현에 집착하는데 거부감이 있다. 새로움에 대한 강박관념은 자칫 잘못하면 독이 될 수 있다. 나는 고전에서 ‘해법’을 찾으려는 취향이다. 새롭다는 영화도 알고보면 원형은 고전에 다 있는 것 아닌가. 과정이 고통스러워도 내 나름의 주제의식을 담은, 하고 싶은 영화를 했다고 생각한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 했고, 어떤 영화를 하고 싶은가.
=개인적으로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욕망> 같은 영화를 좋아하는데, 사람의 내면, 사람과 사람 사이, 또 사람과 사회간의 부조화를 그리고 싶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조화라는 것은 공기를 숨쉬는 것과 같아서 굳이 느끼거나 표현할 필요가 없는 것 아닌가. 부조리한 것에 관심이 많다.
-흑백 장면을 섞어 쓴 이유는, 특별히 아쉬운 게 있다면.
=큰 의미를 두어서가 아니라 내가 생각하는 도시의 이미지, 영화의 느낌은 흑백으로 해야 살 것 같았다. 원래 생각은 흑백영화로 만드는 것이었다. 주위에서 하도 말려서 포기했지만. 그래서 부분적으로나마 흑백으로 처리했고, 음화 같은 느낌과 이미지가 좋다. 아쉬운 것은, 대사를 문어체적인 뉘앙스로 갔는데 수정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제작과정에 어려움이 많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배창호 감독 조감독을 하던 91년, 최인호 선생의 소설 을 읽고 보고 마음이 끌렸다. 여러차례 준비하다가 무산되기도 했고, 몇몇 영화사에서 제목대면 누구나 알만한 영화 연출 제의도 받았지만 데뷔작으로 꼭 <구멍>을 만들고 싶었다. 다행히 영화진흥공사 판권담보로 3억원을 융자받고, 비디오판권 미리 팔고해서 제작비를 마련했다. 제작비는 6억원 정도 들었다. 그래도 본격적으로 제작에 착수해서 개봉하기까지 3년 가까이 걸렸다.
-상업성이나 흥행에 대한 고민은 없나. 앞으로도 지금 영화 스타일을 고수할 것인가.
=내 몫이라고 생각하고 지금 스타일대로 계속 해보고 싶지만 장담은 못하겠다. 내 취향이 바뀔 수도 있고, 주변 사람들은 지금처럼 하면 몇년 안에 폐인될 거라고 겁도 준다(웃음). 현실인식은 바뀔 수도 있겠지만 영화에 대한 가치관은 달라질 게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