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캔들이 낳은 아이, 대박일까? 쪽박일까?
“사랑에 빠지지 않고 그런 척 연기해선 안 된다.” <클레오파트라>(1963)에서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진짜’ 사랑에 빠진 리처드 버튼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당시 각자 가정이 있던 두 주연배우는 현장에서 눈이 맞았고, 둘의 불륜(당사자에겐 로맨스!) 사실이 흥행에 악영향을 끼칠까 전전긍긍하던 스튜디오의 단속에도 불구하고 테라스에서 키스를 하고 함께 식사를 하는 광경을 노출했다. 설상가상으로 제작비가 천정부지로 솟구치면서, 제작비를 환수하는 미션을 달성하는 것조차 힘겨워졌고, 영화는 우려한 대로 흥행에 실패하고 말았다. 제작사인 이십세기 폭스사는 파산 직전까지 내몰리는 신세가 되었다. 이들의 스캔들이 정말 흥행에 독이 되었던 것일까. 이후 수십년 동안 암묵적으로 주연배우들의 연애를 금기시했던 할리우드에 최근 들어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20년 만의 흉작으로 먹구름이 드리웠던 미국 극장가에 간만에 흥행의 단비가 내렸는데, 이것이 주연배우들의 ‘스캔들’ 덕이라는 분석이 쏟아져나오고 있다. 브래드 피트와 안젤리나 졸리의 사랑이 싹튼 계기로 알려진 <미스터 & 미세스 스미스>, 그리고 톰 크루즈가 이성을 잃을 정도로 빠져 있다는 케이티 홈즈의 <배트맨 비긴즈>를 둘러싼 이야기들이다.
스캔들-남녀상열지사
“할리우드에 로맨스는 죽지 않았다. 이렇게 새로운 수익 모델이 되어 나타나지 않았나.” <뉴욕타임스>의 냉소적인 논평이 아니더라도, 이들의 스캔들이 엄청난 홍보효과를 불러들였다는 증거는 사방에 차고 넘친다. <미스터 & 미세스 스미스>의 경우, 개봉에 앞서 열린 시사회 반응은 뜨뜻미지근했다. 여름 블록버스터로서 기본은 한다는 정도. 그런데 첫 주말 사흘 동안 5030만달러를 벌어들이는 선전을 펼쳤다. (이는 브래드 피트의 <트로이>(4680만달러)와 안젤리나 졸리의 <툼레이더>(4770만달러)를 넘어, 각자의 출연작 중에서도 최고 기록이 됐다). 촬영 초반부터 불꽃이 튀었다는 브래드 피트와 안젤리나 졸리는 촬영장 안팎으로 어마어마한 파파라치 군단을 몰고 다녔고, 이들의 친밀한 한때를 포착한 사진은 각종 타블로이드와 인터넷으로 흘러나왔다. 이 난리 속에서 애인 같던 아내 제니퍼 애니스톤과 갈라선 브래드 피트, 그리고 ‘상대 배우 킬러’로 낙인찍힌 안젤리나 졸리는 열애설을 부인했고, 이들이 위증을 하고 있다는 확신으로 몸이 달아오른 관객은 ‘진상’을 확인하기 위해 극장으로 달려갔다.
당사자들은 아니라는데도, 온 세상이 합심해 ‘맞는데 뭘 그러냐’고 밀어붙이는 피트-졸리 커플이 있는가 하면, 당사자들은 맞는다는데도, ‘아닌 거 다 안다’는 의혹의 눈초리에 시달리는 커플도 있다. 지난 4월 로마의 한 공식석상에 처음으로 케이티 홈즈를 대동하고 나타난 톰 크루즈는 새 연인에 대한 사랑을 지나치게 과시하는 바람에 계약연애설이 불거지는 등의 부작용을 빚고 있다. 연인을 공개하고 구애하고 청혼하는 과정들이 영화 개봉에 임박해 짜맞춘 것처럼 이뤄진데다, 결정적으로 <오프라 윈프리 쇼>에 출연해 “나는 사랑에 빠졌다”고 소파 위에서 폴짝거리던 모습이 ‘연기치고도 아주 서툰 연기’로 비쳤다는 것이다. 이에 미국의 거의 모든 언론이 “그저 홍보용 사랑일 뿐”이라거나 “톰 크루즈, 미친 거야?”라는 식의 악의적인 논평을 쏟아내고 있다. 어쨌거나 이들의 로맨스 논란으로 인해 케이티 홈즈의 <배트맨 비긴즈>와 톰 크루즈의 <우주전쟁>이 더 자주 언급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스캔들의 막강한 홍보 효과를 실감하는 이즈음이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
스타의 사생활을 영화 홍보에 활용하는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리처드 버튼, 험프리 보가트와 로렌 바콜처럼 영화를 찍다가 자연스럽게 사랑에 빠진 커플들의 이야기는 당시 타블로이드에 심심찮게 오르내린 ‘사건’이었다. <클레오파트라>처럼 흥행 참패로 이어진 불운한 케이스도 있었지만, 당시 대부분의 스튜디오는 긍정적인 효과를 기대하며 주연배우들의 연애사에 적극적으로 관여했다. 스타 반열에 오르기 전의 내털리 우드는 스튜디오의 주선으로 상대배우와 데이트를 나가기도 했고, 남성적 매력이 물씬 풍겼던 록 허드슨은 활동 당시 동성애 취향을 철저히 비밀에 부쳐야 했다. “친밀한 우정”으로 포장됐지만, 공공연한 연인 사이였던 캐서린 헵번과 스펜서 트레이시가 9편의 영화에 나란히 출연한 것은 스튜디오가 이 페미니스트 여배우와 독실한 가톨릭 유부남의 ‘이룰 수 없는 사랑’이 스크린에서나마 꽃피길 기대한 팬들의 열망을 읽어냈기 때문이다.
당시엔 스타배우들도 스튜디오의 영향권 안에 있었기에 이런 전략이 가능했다. 소속 스타들의 사생활을 통제하고, 그들의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지키는 것이 수월했기 때문이다. 이후 스타들의 파워가 막강해지고, 매체 환경이 달라지면서, 스튜디오가 스캔들의 수위를 조절하는 것이 불가능해졌고, 그만큼 위험 부담이 높아지게 된 것이다. 스타들의 스캔들이 흥행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입장을 견지하는 한 박스오피스 전문가는 이런 환경의 변화를 주목하고 있다. “대중은 언론에 과다노출된 커플들에 진력을 내고 영화에도 무관심하게 반응하게 마련이다. 과거 캐서린 헵번과 스펜서 트레이시 커플, 로렌 바콜과 험프리 보가트 커플은 흥행도 잘 시켰다. 당시엔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보도하는 지금과 같은 미디어 환경이 아니었다.” 스캔들의 덕을 보려면,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하되, 상상력을 펼칠 여지는 남겨두어야 한다는 것이, 온고지신, 어제의 교훈이다.
룰스 오브 인게이지먼트
그간 촬영장에서 눈이 맞은 스타 커플은 숱하게 많았다. 그런데 왜 지금 새삼스럽게 스캔들이 문제가 되는 걸까. 왜 갑자기 스캔들이 흥행에 득이 된다고 단정하며, 톰 크루즈의 로맨스를 ‘전략’이라고 매도하는 걸까. 이런 배경에는 20년 만의 흉년이라는 예고대로, 15주 연속 하락세를 보이던 올 여름 미국 극장가의 위기의식이 자리하고 있다. 1985년 이래 전년 대비 성적이 하락한 것은 올해가 처음으로, 기대작이었던 <킹덤 오브 헤븐> <마다가스카> <신데렐라 맨>이 모두 실망스런 성적으로 데뷔한 바 있다. 나흘 동안 1억달러 이상을 벌어들인 <스타워즈 에피소드3: 시스의 복수>조차 그주 박스오피스 평균을 높이지 못했다는 사실은 커다란 충격이 되었다. 궁지에 몰린 이해 당사자들이 ‘스캔들 제조’라는 긴급 조치를 고안해냈을 거라는 가설, 언론과 스튜디오가 손을 맞잡고 주연배우들의 로맨스를 부각시켰을 거라는 가설은, 이런 절박한 상황으로 인해 설득력을 얻는다.
이들의 연애가 실제 상황이든 계약 이행이든, 중요한 것은 자연스럽게 보여서, 진짜로 믿게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톰 크루즈가 지금 여론의 몰매를 맞고 있는 것은, (진짜 연애라면) 자제하지 못했거나, (가짜 연애라면) 제대로 연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방송에 나와 소파 위에서 뛰고, 연인 앞에 무릎을 꿇고, 에펠탑에서 청혼한 지 두 시간 만에 기자회견을 소집하고, 연인의 출연작 프리미어에 주인공인 양 요란스레 등장하는 행동으로 거부감을 사고 있다. <피플>과 <US위클리>에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60% 이상이 그의 로맨스가 개봉작 홍보를 위해 급조된 것으로 믿는다고 답했고, <엔터테인먼트 위클리>의 설문에선 61%가 톰 크루즈를 싫어하게 됐다고 답했다. 드림웍스는 이런 여론을 의식한 듯 <우주전쟁>의 정킷 행사의 규모를 줄여 일부 매체에만 허용하기로 했고, 워너브러더스는 <배트맨 비긴즈>의 속편 계약에서 케이티 홈즈를 배제한 것으로 알려졌다. <배트맨 비긴즈>나 <우주전쟁>은 요란한 홍보가 아니더라도, 관객이 많이 들 작품들이었다. 신인급이던 케이티 홈즈는 잃을 게 없지만, 반듯하게 커리어를 닦아온 톰 크루즈에겐 수습해야 할 문제가 널려 있다.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아까운 것들
스튜디오 시대를 지나 <미스터 & 미세스 스미스>를 만나기 전까지, 스타 커플 영화의 흥행은 비관적이었다. 작품의 함량에 따라 다르지만, 득이냐 실이냐를 따지자면, 실패 사례가 많기 때문이다. 사랑에 빠진 연인들의 ‘닭살 행각’을 지켜보는 재미는 잠깐이다. 스타 커플에 싫증이 나는 건, 원치 않아도 그들에 대한 정보를 접하게 되는 시점부터다. 연인에 취하고, 세상의 관심에 취해서, 기념 사진 남기듯 작품을 나누는 스타 커플에, 대중은 관심을 두지 않는다. 대표적인 예가 벤 애플렉과 제니퍼 로페즈다. 이들은 연인으로 맺어지고 나서, <질리>와 <저지 걸>에 연달아 출연해 쓴맛을 보았고, 심야 토크쇼의 농담거리로 전락했다. <저지 걸>의 케빈 스미스는 “내게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그들의 실패한 로맨스와 실패한 전작의 그림자가 너무나 컸다”고 당시의 고충을 털어놓았다. 파파라치 군단을 이끌고 호화 쇼핑을 즐기는 이들의 데이트 소식에 질식할 것 같던 순간, 영화가 도착했고, 당연히 어느 누구도 관심을 보이지 않게 된 것이다.
영화를 매개로 만난 커플이 다시 작품을 찍을 때도 마찬가지다. <결혼하는 남자>에서 만난 알렉 볼드윈과 킴 베이싱어의 <겟 어웨이>, <폭풍의 질주>에서 만난 톰 크루즈와 니콜 키드먼의 <파 앤 어웨이>와 <아이즈 와이드 셧>, 연인 관계를 청산한 벤 애플렉과 기네스 팰트로의 <바운스> 등이 그 예다. 오래된 커플, 안정된 커플, 혹은 헤어진 커플이라는 실제 관계와 이미지가 영화를 압도해버리기 때문에 관객 입장에선 별 흥미와 호기심이 동하지 않는 것이다.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프루프 오브 라이프>에서 만난 러셀 크로 때문에 남편 데니스 퀘이드를 떠난 멕 라이언은 위기에 처한 남편을 구하다가 다른 남자와 눈이 맞는 극중 캐릭터와 닮은꼴이라서 빈축을 샀고, 프리미어에도 불참하는 등 사생활과 개인 감정을 먼저 내세우는 우를 범했다.
파이널 판타지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스타들의 스캔들 이후, 영화는 ‘리얼리티 쇼’의 한 토막이 되었다. <미스터 & 미세스 스미스>의 첫 시사에서 더그 라이먼 감독은 “한바탕 난리법석에 가려진 이 영화의 존재도 잊지 말아달라”고 주문했다. 서글픈 느낌마저 드는 그의 소박한 바람이 관객에게 전해졌을 것 같지는 않다. 관객의 상당수는 두 배우의 열애설이 진짜인지 확인하기 위해 영화를 보았기 때문이다. 이들이 섹스 빈도를 묻는 상담가 앞에서 히스테리를 부릴 때, 치고받고 싸우다가 뜨겁게 몸을 섞을 때, 평화봉사단 활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때, 관객의 눈에 비친 건 스미스 부부가 아니라 피트와 졸리다. 실제로 더그 라이먼은 둘의 섹스신에서 제니퍼 애니스톤의 팬들을 의식해 졸리가 너무 섹시해 보이지 않도록 애를 썼다고 전한다. 한편으로 <배트맨 비긴즈>를 보러 간 관객은 케이티 홈즈를 필요 이상으로 자주 눈여겨보았을 것이다. 톰 크루즈를 사로잡은 매력이 뭘까, 궁금해하면서.
이쯤되면 영화와 실제의 경계는 무너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어떤 스타가 영화 속에서 캐릭터를 연기하는 모습, 자연인으로서 어떤 삶을 살아가는 모습, 파파라치에게 발각되는 순간들이 서로 경계를 넘어 뒤섞여버렸다. 영화는 배우가 등장해 역할을 연기하는 가상의 세계가 아니라, 유명 스타가 살아가는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창, 또 다른 판타지의 역할을 하고 있다. <뉴욕 타임스>는 바로 지금, “스타 비즈니스가 생겨난 이래 이런 가십 문화와 대중 심리가 최고조에 이르렀다”고 분석하고 있다. 그러나 톰 크루즈 논란으로 보건대, 이미 한풀 꺾인 “타블로이드와 셀룰로이드의 시너지 효과”는 <미스터 & 미세스 스미스>의 ‘행운’을 재현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스캔들이 흥행에 도움이 되는지, 손해를 끼치는지에 대해선 뭐라 결론을 지을 수가 없다. 다만, 중요한 건 영화 그 자체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다, 라고 말하기 힘든 세상이 됐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그게 난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