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객잔]
간절히, 살아 있음을 느끼고 싶을 때, <마더>
2005-07-06
글 : 김소영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
식물 같은 노년기의 실존적 욕망 그린 <마더>

살아 있음을 느끼고 싶다는 간절함을 갖게 될 때 , 무엇을 할 것인가? <마더>의 메이(앤 레이드)는 대런(대니얼 크레이그)에게 여분의 방(스페어룸)으로 함께 올라가겠냐고 묻는다. 60대 후반의 메이는 30대의 대런 앞에서 옷을 벗으며 자신의 몸에 대해 묻는다. “무엇이 보여? 형태없는 덩어리?” 메이와 대런은 성관계를 갖게 된다. 그들은 만족스럽게 느낀다. 평소에 사람이 들지 않는 이 간소한 스페어룸에는 미풍이 불어오고, 메이는 “아, 너무나 더워”라고 말하며 찬물에 얼굴을 씻는다. 세면기 아래 놓인 카메라가 포착하는 물방울들은 정결하고 아름답다. 나무랄 데 없는 장면이다.

그러나 바로 이 관계가 있기 전 만들어져 있는 많은 관계들과 상황들이, 이 장면을 불편하게 혹은 더 심하게는 불가능한 것으로 보이게 한다. 우선, 대런의 여자친구 폴라는 메이의 딸이다. 또 메이는 남편을 얼마 전에 잃어 상중이다. 애도의 시점인 것이다. 그리고 위의 여분의 방은 아들 집에 있는 것이며, 거기서 메이는 임시로 거처하고 있다. 남편의 유품이 남아 있는 북잉글랜드의 집을 떠나, 런던 아들의 집에 머물고 있으나, 아들은 형식적이며 며느리는 차갑고 손자들은 멀다. 남편을 잃고, 노년의 시간, 그리고 애도의 시간에 접어든 메이에게 자식들이 거는 기대는 많지 않다. 까다롭게 굴지 말고 조용히 지내라는 것이다.

살아 있음을 느끼는 데 필요한 것들

남편과 함께 런던의 자식들 집을 방문했다가, 남편의 급작스런 죽음을 맞고 런던에서 자신이 살던 북잉글랜드 지역으로 내려온 메이는, 아들을 따라 다시 런던으로 올라간다. 혼자 남은 집안의 죽음과 같은 적막을 못 견디는 까닭이다. 아들 집과 딸 집을 번갈아가며 방문하던 메이는 예의 아들의 친구이며 딸의 남자친구인 대런을 알게 된다.

흥미로운 것은 메이가 대런에게 흥미를 갖게 되는 계기다. 딸 폴라는, 결혼한 상태이고 아들이 있는 대런과 불안정한 혼외관계를 갖고 있다. 메이는 폴라가 데이트를 하러 나가도록 자신이 아이를 돌보아주겠다고 자원한 뒤, 평범하고 자애로운 할머니처럼 손자와 함께 잘 놀아준다. 그러다가, 잠결에 소리를 듣고 깨어나, 딸과 대런의 섹스장면을 보게 된다. 그리고 딸이 절박하게 대런에게 사랑을 갈구하는 호소를 듣게 된다. 다음날 메이는 중산층 어머니답게 폴라에게 이 관계의 부적절함을 지적한다. 거기에는 어느 정도 계급적 하대도 있다. 그러자 폴라는 대런이 비록 노동자이긴 하지만, 얼마나 마음이 따뜻하고 반할 만한 사람인가를 설명한다. 아내와의 관계가 소원하지만 자폐증인 아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혼하지 않는 것일 뿐이라고도 한다.

이 두 가지를 계기로 해 메이는 대런에게 관심을 갖게 된다. 흥미롭게도 딸과 그와의 섹스와 딸의 그에 대한 사랑의 언어가 메이를 그 남자에게로 데려간 것이다. 그래서 직접적으로는 딸이 메이와 대런의 관계를 중재하고 촉발한 것이며, 좀더 심층적으로는 ‘살아 있음’을 느끼고 싶다는, 삶의 후반기에 있는 메이의 욕망이 대런의 육체와 따뜻함에 이끌린 것이다. 대런은 이 영화의 구성상 필연적으로 여자의 남자이며, 매력적으로 보이게끔 되어 있는 사람이다. 즉흥적이고 제멋대로이고 바람둥이지만 시와 미술에도 관심을 보이고, 부드럽고 동시에 자신이 필요한 것을 끝내는 직설적으로 요구한다. 반면,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는 아버지며, 여자들과의 여러 관계들을 잘도 관리한다. 이제 메이의 입장에서 다시 한번 묻기로 하자. 살아 있음을 느끼는 데 필요한 것이 무엇이 있을까?

메이에게는 그녀를 극도의 궁핍으로는 몰아가지 않을 연금이 있고, 자식들이 있으며, 긴 세월 남편이 주도권을 잡고 있던 가정이 있었다. 메이는 대런과 스페어룸으로 가기 전 남편이 살아 있을 때 자신이 가졌던 혼외관계에 대해 언급한다. 대런은 묻는다. “좋았나요?” 메이는 물론이었다며 야반도주하려고 했지만 가족들에게 일대 소동이 일어날 것 같아 참았다고 말한다.

어머니와 딸의 질투, 그 터부의 영역

이 영화에서 가장 복잡한 관계는 그러나 메이와 대런 사이에서 발생한다기보다는 메이와 딸 폴라 사이에서 일어난다. 위에서 어머니의 대런에 대한 욕망을 촉발한 것은 딸 폴라였다고 말했듯이, 이 영화에서는 어머니와 딸의 규범적 역할이 뒤집히거나 꼬인 방식으로 전개된다. 폴라는 현재 싱글 마더이며 기혼인 남자와 만나고 있고, 작가로서의 성공도 미지수인 상태다. 게다가 심리치료를 받고 있는 것이 어머니의 유년 시절의 방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 남편이 벌어다주는 돈으로 편안하게 살던 어머니가 딸에게 무엇인가 성취할 수 있다는 확신을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폴라는 메이를 부를 때 엄마, 어머니로 꼭 두번씩 호칭하는데 그들 사이의 소원함과 동시에 친밀함을 원하는 이 양가적 감정은 이 영화에서 가장 정교하게 세공되었어야 하는 부분이다. 교외 지역에서 남편의 월급을 받으면서 평범한 가정주부로 평생을 살았던 어머니와 런던의 지하 플랫에서 아들을 혼자 키우면서 생계를 꾸릴 뿐만 아니라 작가 지망생이기도 한 딸 사이의 간극은 사실 메이와 대런 사이의 약 30년의 나이 차만큼이나 큰 것이다. 딸은 어머니/엄마의 편안했던 삶을 부러워하면서 자신의 삶의 궁핍을 한탄한다. 어머니 메이도 딸의 남자친구를 대상으로 선택하는 과정을 보면 자신과는 달리 삶을 다소 위험스럽게 살아가는 딸에 대한 동경이 있다. 형제들이나 자매들간의 치명적 경쟁관계에 대한 서사들은 많지만, 사실 한 남자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어머니와 딸 사이의 경쟁, 질투, 소원함에 대한 이야기는 모성성에 대한 숭고한 신화 때문에 터부의 영역이다.

딸이 지도하는 작가 워크숍 가서 메이는 이제까지 차마 이야기하지 못했던 어머니로서의 책임을 방기하고 싶어 먼 술집으로 나들이를 갔던 경험에 관한 에세이를 써서 딸 앞에서 발표한다. 딸은 말을 잃는다. 그리고 딸은 어머니가 자신의 남자친구와 섹스를 했다는 것을 알고는 자신이 이제까지 썼던 글들을 불태워버리고 가망없는 작가로서의 꿈을 포기하겠다고 말한다. 화해에 이르지 못할 이 둘의 관계는 이 영화에서 가장 다루기 까다로운 부분이고, <노팅힐>을 만들었던 로저 미셸의 능력 그 한참 밖에 있다. <마더>의 작가인 하니프 쿠레이시의 또 다른 소설 <정사>를 가지고 동명의 영화를 만들었던 파트리스 셰로 감독이었다면 어땠을까 하고 바라게 된다.

스케치북에 재현된 실제와 환상

<정사>에서는 15분여에 이르는 남성 성기, 여성 음모, 실제 삽입 등이 홍보용 흥분제로 사용된 데 비해, 영화 <마더>에서는 위의 부분들이 대단히 흥미롭게도 어머니 메이의 삽화로 재현된다. 나는 이 부분이 영화에서 가장 치명적인 매혹, 재현의 성 정치학을 보여줄 수 있는 장면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가정법을 쓰는 이유는 물론 이 영화가 그 방향을 가리키고 소개만 하고 있기 때문이다. 폴라는 우연히 어머니의 스케치북에서 대런의 초상과 누드를 보게 되는데, 거기에는 삽입 성교를 제외한 다양한 체위의 성관계가 비교적 그래픽하게 묘사되고 있다. 그것을 본 폴라는 “어머니가 대런을 받아들이고 있어”라고 말하고 아들은 ‘설마, 어머니의 환상이겠지’라고 반응하다가 곧 폴라의 말을 긍정한다. 난, 이 두개의 진술이 모두 진실을 가리키고 있다고 생각한다. 메이는 대런과 실제 성행위를 할 뿐만 아니라 그를 자신의 환상적 무대에 세우고, 또 그것을 스케치북에 그려낸다. 실제와 환상이 뒤얽혀 스케치북에 재현된 것이다. 이 영화에서 응시와 시선을 보내 그 대상물을 어떠한 재현물로 옮기는 사람은 두말할 필요없이 어머니다. 사실, 삶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녀는 짧게 불타오른다. 너무나 덥다고 얼굴에 차가운 물을 끼얹어야 할 만큼만. 딸의 분노를 사, 바로 그 얼굴에 따귀를 맞지만, 그건 살아 있다고 느낀 순간에 대한 만큼의 매질이다. 딸은 어떻게 하고? 젊은 그녀는 이제 치료를 끝내고 어머니에 대한 원망을 끝낸 뒤 자신의 삶을 살아갈 것이다. 어쩌겠는가? 생각해보니 “젊은 너야 앞으로도 기회가 많으니…”라는 말은 어머니들이 딸에게 건네는 레퍼토리 중의 하나다. 그러나 그 누가 알 수 있으랴! 거기엔 젊은 남자친구도 포함될 수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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