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연애라는 게임의 법칙, <연애의 목적>
2005-07-06
글 : 남재일 (문화평론가)
사회권력이 남녀관계에 작용하는 화학방정식을 보여주다

내가 본 국산 연애영화는 늘 두 부류 중 하나였다. 첫 번째 부류는 사랑에 대한 상투적 판타지밖에 없는 영화다. 여기에는 암컷과 수컷의 운명, 남과 여의 사회적 현실, 남성과 여성의 정치적 갈등 같은 관계의 점액질은 말끔히 탈지돼 있다. 난폭한 리비도는 사랑이라는 무구한 의존증을 길잡이 삼아 언제나 맹목적 호의의 포즈를 취하며 방긋 웃는다. 이 미소 뒤에 무엇이 있는지 자라나는 세대한테 굳이 말할 필요가 없노라고, 언젠가 쿤데라가 말했다. 연애의 속셈과 결과는 모르는 게 약이라고.

두 번째 부류는 이 가정을 위반한다. 연애도 알고 하는 게 힘이라고. 그리하여 죽은 판타지밖에 없는 영화의 결핍을 지혜롭게 악용한다. 연애의 속셈은 ‘맛있는 섹스’이며 결과는 ‘결혼은 미친 짓이다’라고. 이들 부류에서 즉물적이고 파편적인 욕망의 기표들은 적의 무지를 동맹군 삼아 점령군처럼 당당하게 행진한다. 연애의 대차대조표를 아무리 작성해봐도 남는 게 이거밖에 더 있더냐고. 여기에는 수정 불가능한 내 욕망의 표적만 있고 나 아닌 것이 되고자 하는 꿈은 없다. 그리하여 성적 교환의 기계적 균형이 정서적 교감의 화학적 우연을 대체하면서 사랑의 방법론으로 제시되기도 한다.

나는 첫 번째 부류는 짜증나고 두 번째 부류는 허탈하다. 하지만 공허하긴 매 한가지다. ‘사랑은 없다’는 선언은 ‘사랑은 모든 걸 초월한다’는 말만큼 썰렁하다. 사실 그 두 말은 같은 동전의 양면이다. 사랑이 모든 걸 초월한다고 믿고 의존하는 소녀는 상처받고 돌아서면 ‘사랑은 없다’고 탄식하는 작부가 된다. 작부는 각별한 소신이 없는 한 그 즉물적 퍼포먼스가 신물이 나 다시 숭고한 사랑의 이미지로 귀환하게 마련이다. 그러니 두 부류는 결과적으로 일종의 ‘적대적 공생’ 관계에 있다. 적대적 공생은 내가 존재하기 위해 적의 존재를 필수로 하는 관계이다. 첫 번째 부류가 생산하는 사랑에 관한 판타지는 부정해야 할 즉물적 현실을 두 번째 부류의 파편화된 욕망의 이미지 속에서 찾아낸다. 두 번째 부류는 욕망의 이미지를 전진 배치하는데 걸림돌이 되는 사랑의 관념을 부정하는 데 맞춤한 명분을 첫 번째 부류에서 발견한다. 두 번째 부류는 첫 번째 부류가 사랑에 관한 지배적 이데올로기를 손쉽게 재생산하는 데 협조한다. 그 대가로 두 번째 부류는 파편적 욕망의 상업화를 정당화시켜주는 명분을 첫 번째 부류에서 제공받는다. 장님과 앉은뱅이의 궁합, 그들이 동침하면서 만들어내는 소리, 그러니까 이 두 부류의 영화가 손잡고 전하는 사랑에 관한 궁극적 전언은 이런 게 아닐까?

“남이 묻거든 사랑은 숭고하다고 말해라. 그리고 남는 시간엔 ‘맛있는 섹스’를 찾아다녀라. 어차피 인생은 남는 시간이 더 많다.”

이건 사랑을 숭고의 그늘 아래서 이루어지는 성적 교환과 경제적 M&A로 보는 통념을 속어로 동어반복하는데 지나지 않다. 여기에는 사랑에 대한 제도의 명령과 즉물적인 욕망만 도드라질 뿐 ‘개인의 꿈’이 없다. 내가 기대하는 ‘연애영화’는 집단적 현실과는 다른 개인의 꿈을 보여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연애는 어차피 집단적 현실에서 탈주하고 싶다는 욕구, 개인의 자리로 돌아가고 싶다는 욕구, 돌아가서는 나 아닌 다른 그 무엇이 되어보고 싶다는 욕구, 바로 집단적 정체성과 자기동일성에 대한 파괴욕구니까. 영화는 그 욕구에 대해 판타지를 제공해야 하니까. 그래서 나는 좋은 연애영화는 집단의 현실로 들어가 개인의 꿈으로 나오는 영화, 집단적으로 인식하고 개인적으로 해결하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예컨대, 사랑을 지배로 돌려놓는 집단적 가부장 권력에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면서도 무구한 육체에서 개인화 된 남성의 가능성을 찾으려는 제인 캠피언의 ‘파아노’나 ‘인더컷’ 같은 영화. 이런 점에서 <연애의 목적>은 내가 기대하는 연애영화의 컨셉과 딱 맞는 영화 같았다.

연애전쟁 3라운드, 진정한 승자는?

아무런 사전 정보가 없었던 나는 처음에 연애를 쿨한 소비로 몰아가는 그렇고 그런 맞춤형 영화이거니 생각했다. 그런데 시작부터가 이상했다. 전혀 팬시하지 않게 고교 선생과 교생실습 받으러 온 여대생이 사랑의 당사자로 등장한다. 어! 선생과 여제자의 로맨스를 다루는 고전적인 첫 번째 부류의 연애영화인가? 그런데 아무래도 그건 아닌 것 같다. 이 선생, 젊은 여자만 보면 ‘앞에 총’ 하고 육박전을 벌인다. 간혹 선생이라는 사회적 지위를 들이밀며 적을 무장해제하려는 심리전까지 펼친다. 한마디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맛있는 섹스’를 탐하는 짐승이다. 그런데 자칭 ‘내숭 떠는 것보다는 솔직한 게 좋다’고 확신하는 정직남이다. 학교 선생의 태도가 이쯤되면 사랑은 없으니 욕망의 표적을 응시하라는 ‘두 번째 부류’의 영화 같기도 하다. 그런데 여자가 맞장구를 쳐주지 않는다. 이 여자, ‘사랑하면’이라는 단어에 무지 집착한다. 이 단어, ‘첫 번째 부류’의 영화에서 남자가 여자의 문을 여는 만능키가 아닌가. 이 여자 여기에 한번 빈집털이를 당하고도 정신 못 차린다. 남자가 털어간 건 몸밖에 없는데 자신은 마음을 털렸다고 생각해서 신고도 못한다. 이 여자 아무래도 껍데기밖에 없는 사랑에 대한 상투적 환상에 중독된 여자 아냐! 그런데 그런 여자의 태도치고는 남자의 돌격을 대하는 태도가 묘하다. 거부인지 앙탈인지 모호하다. 왜 모든 접촉을 성적 신호로 여기는 이 짐승의 머리를 쓰다듬어 달려들게 하고 5초 동안 삽입한 다음에야 난리를 피우는 거지?! 그런데 더 이상한 건 이 여자, 처음부터 이 짐승과 자고 싶었단다. 물론 잤다. 그러고나서 그 남자와의 점심 식사를 함께하기 위해 도시락을 준비하는 여자. 이게 뭔가? 겨우 솔직함으로 무장하고 조금 더 뻔뻔스럽게 저질러대는 남자와 조금 더 앙큼한 여자의 합궁의 연대기라니! 그건 각자의 성계급이 부여받은 배역의 속어적 동어반복이 아닌가! 여기까지가 1피리어드다. 전적은 ‘난타전 끝에 수컷의 TKO’. 전략은 ‘사랑하면’이란 키를 버리고 망치도 아닌 주먹으로 문을 부순 소년의 백병전.

그런데 이 여자 알고보니 앙큼한 게 아니라 엉큼하다. 2피리어드, 전투의 양상이 첩보전과 심리전으로 바뀌면서 진가를 발휘한다. 싸움은 누군가의 음해로 시작된다. ‘유부남 킬러가 순진한 총각 선생을 유혹했다’고. 학교는 이 여자를 제도의 적으로 심판할 태세다. 이 남자, 불의에 분연히 항거해서 음해한 학생들의 엉덩이에 테러를 가한다. 하지만 제도의 법정에선 ‘누가 먼저 유혹했느냐’는 엉뚱한 오엑스문제가 제출되자 학교 선생이란 자가 그것도 못 푼다. 무지 복잡한 주관식 문제를 다짜고짜 “범인이 니 애인 맞지?”라고 묻는 학교라는 사회권력 앞에서 소년의 치기는 무용지물이다. 논술식 답변을 했다가 잘못하면 ‘말 많은 돌대가리’ 소리 듣게 생겼기 때문이다. 이 남자, 결국은 사랑을 버리고 자신을 보호해준 사회권력 속에 잔류하는 것을 선택한다. 그런데 이 광경을 가만히 지켜본 이 여자, 만만치 않다.

단 한마디 말로 자신을 배신한 남자를 응징하고 자신을 기소한 사회권력의 조악함을 조롱한다. “저 남자가 먼저 유혹 했어요.” 사회권력은 그 남자를 축출한다. 제출된 오엑스문제가 얼마나 조잡했으면, 츳츳…. 2피리어드 전적은 심리전 끝에 여자의 막판 대역전 KO. 전략은 이이제이(以夷制夷).

3피리어드. 남은 건 사회권력 금단 증상으로 우울증에 걸린 남자와 제도가 자신을 기소한 논리로 남자를 심판했다는 죄의식에 잠긴 여자. 이번엔 여자가 남자에게 먼저 시비를 건다. “정말 사랑한다”고. 이 여자 참 변태다. 사람을 병신 만들어놓고 이제 와서 사랑한다니. 그런데 그 남자 한술 더 뜬다. “널 죽여버리고 싶다”고 말하면서 거기에 넘어간다. 3피리어드 전적은 조심스런 탐색전 끝에 평화협상 무승부. 전략은 용서가 최대의 보복이다.

사회권력은 그녀를 온전한 여자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이 게임의 종합전적은 일승일무일패 무승부 같지만 사실은 여자의 대승이다. 그건 처음부터 이 게임의 전적은 여자가 프로그래밍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관찰되는 것은 수컷의 즉물적 욕망이고 고발되는 것은 그 손에 쥐어진 사회권력의 뻔뻔스러움이다. 그건 이 영화의 화자가 여자란 얘기다. 남자를 따뜻한 가부장으로 상상했다가 ‘사랑하면’에 가린 수컷의 욕망과 뻔뻔하게 휘둘러대는 사회권력에 상처받은 여자, 그렇게 당하고도 의사라는 또 다른 사회권력에 의지하고 싶은 미련을 못 버리는 여자, 이 온순한 가부장의 딸은 자신이 사회권력에 의지해 사랑하는 남자를 쳐본 다음에야, 온몸으로 그걸 느껴본 다음에야 진정으로 자상한 가부장에 대한 기대와 완전히 결별한다. 가부장의 사회권력에 대한 환멸의 힘으로 비로소 그녀는 온전한 여성이 된 것이다. 그 눈에 비친 남자는 뻔뻔하게 사회권력을 휘둘러대는 수컷에 다름 아니다. 그러니 이 여성의 눈에 뻔뻔할 바엔 귀여운 맛이라도 있는 소년이 조금 낫고, 이왕이면 사회권력을 잃은 우울한 소년이 한결 나을 수밖에. 비록 그 소년이 여자의 사랑 고백에 격렬한 히스테리를 부리지만, 이 여자는 안다. 그게 ‘사랑의 권력자’에 대한 피지배자의 앙탈 혹은 어머니에게 부리는 아들의 허세임을.

남성이 여성을 보는 시선을 그대로 남성에게 돌려놓고 그 황폐한 풍경 속에서 사랑의 가능성을 찾아보려는 영화. 나는 이게 단지 남성에 대한 은밀한 야유인지, 남성의 집단적 현실을 응시하는 수줍은 여자의 절망에 찬 사랑의 꿈인지 모르겠다. 어쨌거나 이 여자, 이 시나리오 쓴 여자, 눈은 참 신랄한데 말은 참 온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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