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죽음이라는 자연현상에 대한 풍경화, <극장전>
2005-07-06
글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극장전>이 포착한 인물의 초상이 의미하는 것 - 허문영과 정성일의 글에 대한 정한석의 보론

이 글은 영화 <극장전>에 관한 평이자, 그 영화에 관해 묶여 있는 두 고서에 대한 보론이다. 나는 <씨네21>에 실린 <극장전>에 관한 허문영(505호 전영객잔)과 정성일의 글(507호 전영객잔) 두편을 정성일의 제안처럼 느슨하게 묶인 두개의 고서로 보기로 했다. 그래서 마치 선배감독 이형수의 영화를 보고 나와 영향을 받은 동수가 행위를 반복하고 흉내내면서 혹은 차이를 만들면서 완성되는 영화 <극장전>의 그것처럼 이 글을 끌고 가려고 한다. 나로서 그들의 글을 참조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들이 먼저 제시한 몇몇 견해가 매우 흥미로운 탁견이며, 내가 미처 진전시키지 못한 몇 가지 질문들을 훨씬 더 정교한 방식으로 포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극장전>의 영화 속 영화와 영화 속 현실의 행위들이 반드시 일치하지 않듯이, 반복과 흉내 속에 차이화의 시도가 있음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감독의 말대로 영화보기

“<극장전>은 두개의 독립된 이야기로 되어 있습니다. 독립된 이야기들이면서 앞의 이야기는 두 번째 이야기 속에서 주인공 남자가 관람한 영화가 됩니다. 우린 어떤 영화를 ‘잘 보고 나왔을’ 경우, 그 영화가 주는 어떤 영향 속에서 짧게는 몇분, 길게는 며칠을 지내본 경험이 있습니다. 이 영화가 그런 우리의 경험을 다시 쳐다보는 과정이 되었으면 합니다.” 홍상수는 보도자료에 실린 감독의 의도를 이렇게 시작하며 썼다. 거의 모든 인터뷰에서도 이렇게 말했다. 물론 이 말이 의례적인 언급처럼 보일 수는 있다. 그렇게 보이는 것뿐 아니라, 실제로 그런 것일 수 있다. 그래서 <극장전>에 대한 평들은 홍상수가 말한 그 ‘영향’을 놓고 보는 방식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자칫 잘못하면 그의 공식적인 말에 잡혀 바보가 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기꺼이 그 바보가 되기를 자청하면서, 즉 <극장전>의 인물들이 그 영향관계에 어떻게 잡혀 있는지 보면서 시작하려고 한다. 같은 지점을 다른 방식으로 통과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 상투적 언어를 새로운 이미지의 층으로 뚫고나가는 것, 지극히 평범한 내용(가령 텔레비전 드라마와 한치도 다를 바 없는 불륜에 대해 그동안 말해온 것처럼)을 다루되 형식이 다를 때 어떻게 전체가 다른지를 보여주는 것이 홍상수의 영화이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고 나온 사람이 그 영화에 영향을 받는다는 이 말은 너무 뻔해서 지나치기 쉽지만, 너무 뻔한 것을 지나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바로 홍상수의 영화다. 그렇게 함으로써 아무도 그것에 대해 뻔하다고 말하지 못한다.

따라하고, 따라하고, 따라한다

‘영향의 연쇄’는 홍상수의 전체 필모그래피를 관통하고자 허문영이 통찰한 ‘지속의 실패’의 작은 변형쯤으로 이 영화에 있다. 인물들은 끊임없이 무언가에 영향을 받음으로써, 혹은 최초의 영향에 대한 잔영을 비틀어 이어가거나 경험함으로써 자신의 정체를 지속시키는 것에 방해가 되는 상황을 맞거나 초래한다. 그러면서 인물들은 실패하지만, 영화는 도리어 앞으로만 나아간다. <극장전>은 크게 영화 속 영화와 영화 속 현실이라는 이중의 틀로 붙어 있지만, 영향의 연쇄는 그에 상관없이 불규칙적으로 일어나며, 최초의 경험은 반복적으로 변형된 일부가 되어 나타난다.

예컨대 영화 속 영화의 주인공 상원은 자살 시도의 이유를 19년 동안 의사소통 부재를 겪어온 어머니와의 관계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온전히 그 이유 때문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다. 그가 영실과 만나기까지 비어 있는 시간을 때우기 위해 본 연극의 영향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다른 작품이 아닌 <어머니>라는 연극을 보러들어가는 것이 상원의 말을 뒷받침하지만, 영화 속 영화의 연극에서 마지막 장면을 장식한 “어머니”라는 외침은 대구가 되어 급기야 옥상 위에 올라가 “엄마, 엄마”라고 부르는 상원의 흉내로 이어진다. 또는 그 영화 속의 상원의 모습을 보고 나온 동수는 동창의 아내가 딸을 걱정하는 모정을 보고서는 선뜻 목도리를 벗어준다. 하지만, 차 안에서 담배를 못 피우게 하자 “어머니가 준 것”이라는 이유로 목도리를 다시 뺏어간다. 아마도 모정의 그림자가 상원과 동수에게 끼치는 영향은 여기까지 일 것이다. 이후에 최영실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상원과 영실, 동수와 영실 사이에서의 가장 중요한 영향의 연쇄는 말할 것도 없이 섹스이다. 상원의 섹스 실패는 자연스럽게 <생활의 발견>의 경수를 떠올리게 하면서 우리를 홍상수의 전작 영향권 안으로 끌어들이고, 그 영화의 주인공이었던 김상경이 연기하는 동수는 그가 본 영화 속 영화의 주인공 상원의 말을 비틀어 반년쯤만 살다가 죽으면 진짜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헤프게 말한다. 어쨌거나 상원은 영실과의 섹스에 실패하고, 동수는 영실과의 재회 신청에 실패한다. 가령 영실은 남산(타워)과 같은 존재다. 동창회 자리까지 이어지는 남산(타워)의 영향 아래 그들이 잡혀 있듯이, 영실의 존재도 그들을 영향 아래 둔다.

한편, 동수의 행동과 말에 따르면 이 영향의 연쇄는 이미 선배감독 이형수와의 관계 속에 있던 것이다. 중국집에서 점잖은 동창은 말한다. “그러고보니 너하고 형수 형하고 친하긴 친했다. 서로 닮은 게 많잖아. 쿨한 척하는 것도 그렇고, 여자 좋아하는 것도 그렇고, 이번에 하려던 영화도 비슷하지 않아?”(그러고보니 동수는 이형수와 같은 영화감독이 직업인데도 우리는 그가 어떤 영화를 만들고 싶어하는 사람인지 모른다) 동수는 그 순간의 화제를 갈비찜 이야기로 피해버린다. 그러나 횟집에서는 영실에게 고백한다. “제가 그 형한테 영향 진짜 많이 받았거든요. 근데 자꾸 눈치를 주는 거예요. 자기한테 영향받은 걸 인정하라고. 그게 뭐야.” 영향을 받은 걸 인정하면서도 화를 낸다. 하지만 이렇게도 말한다. “여관 간 거, 죽기 전에 눈내린 거, 말보루 사려다 못 피운 거, 약 한알씩 나눈 거, 그거 다 내 얘기예요”라고. 자신도 이형수에게 영향을 준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말보루 레드는 참 좋았는데, 그게 다 자기 얘기구나”라고 영실이 물으니, 대강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얼버무린다. 영향을 주었더라도 전부는 아닌 것이다. 그런데 영실이 다시 묻는다. “근데 지금 그게 그렇게 중요해요?” 영실은 사람이 죽어가는 앞에서 너의 경험으로 그 영화에 일부 영향을 주고받은 게 그렇게 중요하냐고 질책한다.

끝내 사지에 처한 이형수를 보고 나온 동수는 말보루 레드의 빈갑을 던지면서 생각을 많이 하면 담배도 끊을 수 있다고 다짐한다. 이미 정성일이 ‘인연의 매듭’이라고 지적했듯, <극장전>에서의 ‘담배’는 영향의 연속체 중 가장 끈질긴 것이다. 이형수 영화 속의 대사 “괜히 담배를 피우고 싶어 담배 한갑을 샀다”에서 시작된 담배의 잔영은 인물들에게 반복적으로 영향을 끼쳐왔는데, 동수는 지금 거기에서 벗어나겠다고 말하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이건 기대할 만한 결심의 순간이 아니다. 무엇보다 그것이 실행될 조짐이 보이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동수가 그 결심을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으로 하기 때문’이다. 마치 <생활의 발견>의 경수가 선영의 집 앞에서 뒤돌아나가는 것과 비슷한 마지막 장면의 앵글 안에서 <극장전>의 동수는 자신의 처음이자 마지막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으로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즉, 담배를 끊겠다는 그 결심이 자기가 받은 모든 영향 관계에서 벗어나보겠다는 내용이라면, 그가 취한 형식은 잘못된 선택이다. 동수는 온전히 이형수의 영화에서 상원의 형식으로만 쓰인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을 결심의 자세로 취함으로써 그 마지막 순간에도 자신이 본 영화, 그리고 선배 이형수의 인물 상원에 다시 겹치고 만다. 홍상수의 말처럼 “한면으로는 서로 다른 사람처럼 보이는 두 남자(혹은 그 이미지들이)가 하나의 이미지로 영화 마지막에 위태롭게 겹쳐지는 걸 바라보게 되는 과정”이다.

이를테면, <극장전>은 사람 사이의 관계가 됐건 영화라는 환영과의 관계가 됐건, 자신을 둘러싼 모든 영향 관계를 벗어나겠다고 마음먹은 남자가 결국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이야기다. 특히 동수는 생각을 많이 해서 죽지 않고 오래 살겠다고 다짐하는데, <극장전>은 죽음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결심하게 된 남자가 결국 그걸 못하게 될 거라는 예시 결말의 이야기다. 혹여 생각을 많이 해서 담배를 끊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동수는 죽음의 영향에 대고 결심했기 때문에 달라지지 못하며, 달라질 것이 없기 때문에 아무것도 말한 게 없는 것이 된다.

죽음을 둘러싼 괴이한 혹은 우스운 만남

홍상수의 영화에서 ‘죽음’과 연관된 자들은 많았다. 그냥 많았다고 말할 수 없다. 다양한 방식으로 많았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의 효섭과 민재 그리고 민수처럼 살해당하거나 살인하는 자들이 있었고, <강원도의 힘>의 상권처럼 스쳐지나간 살인과 연계된 자들이 있었고, <강원도의 힘>의 경찰과 <생활의 발견>의 경수처럼 자살하고 싶다는 제스처를 취한 자들이 있었고,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의 헌준처럼 잘못했으니 죽여달라는 자들이 있었다. 이들의 심정이 모두 죽음을 미루고 싶은 동수와 이형수의 마음과 같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죽지 않고 오래 살겠다고, 죽고 싶지 않다고 결심하거나 애원하는 홍상수의 인물들은 여섯 번째 영화 <극장전>에서 비로소 처음 등장한 것이다.

이미 횟집에서 동수의 말을 들은 우리는 상원을 사이에 둔 동수와 이형수간의 복잡한 영향 관계를 알고 있다. 예컨대 홍상수는 이형수의 회고전에 붙은 포스터에서 영화 속 영화의 주인공 상원의 얼굴을 크게 먼저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형수가 그 영화에 직접 출연했었다는 영실의 대사를 통해, 그리고 둘이 애인 사이였냐고 물어보는 동수의 질문에 의해 틀림없이 이형수라는 영화감독은 이기우가 연기한 상원일 거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그러나 병원에 갔을 때 그곳에 누워 있는 이형수는 이미 영화 속 영화에서 등장한 ‘소년의 아는 아저씨’(엔딩 크레딧에는 김명수 역에 ‘소년의 아는 아저씨’로 쓰여 있다)다. 우리로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홍상수로서는 관객의 예상을 미루게 하고 싶었던 인물을 거기서 만나게 되는 것이다. 동수와 상원과 이형수의 서로 비추는 거울에 대한 관계는 정성일의 통찰이 이미 지적한 바이기도 하다.

그런데 나는 사실 <극장전>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과연 이형수라는 인물이 등장하기는 할 것인가에 대해 의심을 가졌었다. 병원에 있다는 이형수는 혹시 <생활의 발견>에서 부산에 있다는 아버지의 역할 정도가 아닐까 의심했었다. 명숙에 이어 선영을 만나게 되는 경수의 여행길에서 아버지가 구실이 되는 것처럼 선배 영화감독이라는 이형수도 동수와 영실을 만나게는 하지만 등장은 하지 않는 매개 정도가 되지 않을까 예상했었다(여기서 나는 정성일이 말하는 대타자로서의 아버지를 심화하여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아버지를 만나는 과정이 꼭 있어야 한다면 그건 이미 병실에서 동수가 대체 아버지 이형수를 만나면서 이뤄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홍상수의 영화에 아버지의 자리가 중요하게 배정된다는 정성일의 생각에는 아직까지 느낌이 잘 통하지 않는 편이다).

그러고보니 나는 영화가 다 끝나고 나서 이상한 점 하나를 본다. 다름 아니라 엔딩 크레딧에 이형수의 이름이 빠져 있다는 점이다. ‘소년의 아는 아저씨/김명수’라는 영화 속 영화의 배역과 그 배우의 연결은 있는데 김명수가 연기한 또 하나의 배역 이형수의 이름이 빠져 있다. 배우 김명수가 소년의 아는 아저씨이자 이형수로 일인이역했음은 영화를 본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다. 그런데 왜 이형수의 이름은 여기서 빠져야 했던 것일까? 엔딩 크레딧의 기입 상태로만 보면 이형수의 존재는 처음부터 없었거나 영화가 끝나자 사라진 것이다. 혹은 등장은 하지만 이름과 존재는 기입하고 싶지 않은 인물인 것이다. 왜 이형수는 누락됐을까? 이 질문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나는 여기서 엔딩 크레딧상의 이형수의 누락이라는 근거로 복잡한 역할 구성의 질문을 다시 이을 생각이 없다. 정말 실수(?)면 어쩌겠는가? 그보다는 이형수의 등장을 둘러싼 또 다른 점을 주시한다.

그러니까 재차 돌아가 생각해보면 병실에 들어가기 전까지 우리의 예상에는 동수와 상원만 있었다. 때문에 소년의 아는 아저씨 역의 김명수가 별안간 등장하는 병실장면은 <극장전>을 난해한 기운으로 휩싸이게 하는 정점이 된다. 다시 등장할 것이라고 예고한 상원이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가지를 말할 수 있다. 이를테면 홍상수는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의 결말부 형식, 즉 잘 나가던 대구를 깨고 한쪽으로 새어버린, 그래서 사람들을 의아하게 만들었던 그 방식을 <극장전>의 결말부에 뒤틀어 사용하고 있다. 병실에 있어야 할 이형수의 존재에 예상치로 가까웠던 상원, 즉 이기우가 아니라 소년의 아는 아저씨 김명수가 누워 있는 것은 헌준의 숏으로 시작한 영화가 갑자기 그의 실종과 함께 문호의 이야기로 끝나는 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선화를 사이에 둔 헌준과 문호의 대구를 일순간에 무너뜨렸던 것과도 같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가 헌준을 영화의 중도에서 ‘실종’시킴으로써 기이한 느낌을 심어줬다면, <극장전>은 가까운 예상에 있지 못했던 인물인 소년의 아는 아저씨를 돌연 ‘재등장’시킴으로써(동시에 예고된 상원의 등장을 실종시킴으로써),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가 대구의 구조를 깨고 단선의 구조로 나아갔듯, 대구의 구조를 깨고 복수의 구조로 들어가는 효과를 부여한다. 그러므로 헌준의 실종과 소년의 아는 아저씨의 예상치 않은 재등장(또는 예상을 벗어난 상원의 실종)은 같은 것이다. <극장전>은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의 중요한 형식 일부를 취하면서 인물들의 주체를 죽음 앞에서 헷갈리게 하고 있다.

<극장전>의 인물들은 이렇게 복수의 구조를 통해 소름 끼칠 영원불변의 실체인 죽음 가까이까지 근접한다. 으스스한 영화가 된다. 그런데 의아한 것은 이렇게 죽음의 실체 가까이 갔는데도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이 <극장전>을 무지무지 웃기는 희극이라고 말한다는 점이다. 미스터리한 반응이다. 하지만 지금 이 영화가 웃기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욕하자는 것이 아니다. 나도 곳곳에서 웃었고, 영화를 만든 홍상수도 죽음을 둘러싼 이 괴이한 만남을 희극이라고 인정한다. 말하자면, <극장전>의 기괴한 웃음은 어디에서 오는가, 하는 것이 나의 궁금증 중 하나이다. 생각해보면 <극장전>이라는 영화가 죽음이라는 실체를 상대로 농을 거는 장면은 없다. 그 안에 살고 있는 인물들조차 죽음에 대해 언제나 진지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자. 단지 영향의 연쇄를 따라 죽음까지 다가가도록 이어주는데, 그것이 희극처럼 보이는 것이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죽음의 영향 아래 진지하게 사로잡힌 이들의 이야기가 희극으로 표현된다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가능한 일인가?

일상의 디테일이 아닌 영화적 표현단위의 반복

<극장전>이 웃기다는 인정(또는 반응)과 <극장전>이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는 (허문영의) 지적은 일면 같은 말이다. 두 말의 관계는 이 영화의 ‘희극성’을 들여다보게 한다. 가령, 두 번째 영화인 <강원도의 힘>까지 관객과 평자들은 홍상수의 영화 속에서 일상의 정서를 보았다. 그의 영화를 일상의 저열함이라는 주제론적 시각으로 따라잡는 것이 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때문에 그때 홍상수의 영화는 차라리 비루한 비극의 전통에 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적어도 <오! 수정> 전까지 홍상수의 영화를 그런 일상의 정서와 연결시킬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영화적 형식의 ‘표현 단위’들을 현실에 대한 디테일의 채집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그것들은 디테일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반복 회귀하는 단위들임이 드러났고, 그렇게 보는 편이 나은 듯하다.

가령 내가 자주 마주치는 홍상수의 표현 단위들 중 <극장전>에서 역시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보는 것과 메모하는 것’이다. 보는 것은 영향을 받는 것의 한 방식이고, 메모하는 것(또는 그 메모를 읽지 못하는 것)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한 방식이다. 연극을 보는, 영화를 보는, 남산타워를 보는, 그리고 길거리에서 문득 영실을 보는 상원과 동수는 멀뚱히 서서 백두산의 천지가 담긴 액자를 보는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의 효섭, 설악산 안내 표지판을 보고 서 있는 <강원도의 힘>의 상권, 춘천과 경주에서 오리배를 보는 <생활의 발견>의 경수, 중국집 창 너머로 같은 여자를 보는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의 문호와 헌준과도 같다. 이를테면 영실은 가보지 못한 백두산의 천지이고, 올라가도 잘 모르겠는 설악산이고, 춘천과 경주 아무 데서나 보이는 오리배이고, 저 멀리 서서 번갈아 기억 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낯선 여자이고, 오다가다 마주치는 남산타워이다. 이때 영실은 잡히지 않는 자연의 일부로서 초상이기보다는 (이차적) 풍경이다.

반면 메모하는 것은 이미 많은 것이 엇갈리고 실패했음을 가리키는 징조의 행위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에서 보경이 효섭에게 남긴 메모는 끝내 효섭이 아닌 옆집 여자가 읽는다. <강원도의 힘>에서 상권이 쓴 “조금만 더 긴 호흡으로 기다리자”는 메모는 정확하지 않지만 지숙에 의해 지워진다. 더러는 <생활의 발견>의 경수가 선영의 남편을 벌하려고 쓴 메모는 제대로 전달자에게 가지 않고 길가에 버려진다. 명숙이 경수에게 남긴 메모는 남의 손에 넘어가거나 실패를 예고하는 선영의 메모로 회귀한다. 그중에 명숙이 남겨놓은 메시지(억지로 대입하자면 음성 메모쯤 되겠다)도 끝내 들을 수 없다. <극장전>에서 상원이 “죽기 전에 모든 걸 다 쓰려고”한 메모의 내용도 알 수가 없다.

일례로 보는 것과 메모하는 것을 들었지만, 홍상수가 말하는 조각들이란 감정을 조직하는 디테일보다는 영화의 형식을 완성하는 표현 단위들에 더 가까운 듯하다. 때문에 <극장전>에서 홍상수가 우리의 경험을 다시 한번 쳐다보자고 말할 때, 그것은 일상의 디테일을 통한 세밀화를 그려보자는 것이 아니라 그 경험을 구성하는 영화적 단위들의 불규칙한 반복 출현이 가져오는 느낌을 경험해보자는 말일 것이다. 그런데 그 반복 출현하는 것들이 일상의 감정적 디테일이 아니라 바로 순수한 영화적 표현 단위이기 때문에(혹은 그 면이 강화되어 있기 때문에) 영화 속 인물의 어떤 감정 이해를 바탕으로 전체의 주제를 잡아내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게 됐다. 과연 <극장전>의 주제를 말할 자신이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 것인가?

<극장전>의 진정한 희극성

주제론을 펼치기 어려운 이유는 우선 이 인물들이 어떤 자들인지 도대체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일례로 영실과 자살을 시도한 뒤 상원이 간호사에게 구는 태도는 참 어이가 없다. 동수와 영실의 관계도, 동수와 이형수의 관계도 뭔가 석연치 않다. 특히 홍상수가 말하듯 “이상적인 인간의 행위”에 못 미치는 띄엄띄엄한 인물 동수는 더욱 미스터리다.

나는 촬영장을 며칠 구경한 뒤 기사를 쓴 적이 있는데, 당시 현장에서는 분명 인물들의 감정이 팽팽하게 살아 있다고 느꼈었다(<씨네21> 491호 기획 ‘홍상수 감독의 <극장전> 현장스케치’). 지금은 일부러 좀 과잉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최영실이 갈빗집에서 노래를 부르는 장면도 그때는 정말 침울하기만 했다. 아마 나는 그때 무언가 착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즉, 인물들의 캐릭터를 인물들의 정서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여기서 그들이 어떤 감정상태인지 모르게 되어 있다는 말을 그들의 캐릭터가 부재하다는 말과 동의로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 김상경이 연기한 동수의 캐릭터는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괴이한 캐릭터다. 오히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오! 수정> 이후 홍상수의 인물들은 캐릭터는 명확하지만, 그 정서를 알아맞히기는 힘든 인물들이 되어가고 있다.

줌렌즈의 무차별한 활용 역시 이점에서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역시 나는 같은 기사에서 감정과 심리를 너무 확연히 대변하여 촌스러운 퇴물이 되어버린 줌의 저 남용이 인물들의 섬세한 감정을 해치지 않을까 걱정했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들이 다칠 만한 감정을 보여준 바 없으므로 줌의 사용 역시 시종일관 쓰여도 큰 탈이 없었던 것 같다. 오히려 잡히지 않고 미끌거리는 인물들의 감정상태가 줌의 사용을 자유롭게 한 것일 수 있다.

요약하자면, 그 웃음은 어떤 과정에 의해 생기는 것인가? 인물들이 우리로 하여금 웃을 수 있도록 어떠한 정서적 유도를 하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출몰하는 영화적 표현 단위들만을 따라가다보면 거기에서 ‘희극성’이 출현한다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극장전>에서의 웃음은 홍상수의 말처럼 자신이 영화 속 인물들을 물끄러미 “쳐다볼 때” 생긴다. 그 인물들의 심리로 들어가 가치평가하거나 의미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지각과 감각만으로 그들의 외양적 존재를 포착할 때 생긴다. 바꿔 말하자면, 우리는(관객은) 영화의 인물을 쳐다보다가 문득 그들과의 정서적 회로가 끊기는 경험, 즉 결락의 상태를 경험한다. 인물들이 엉뚱하고 이상하다는 표현은 그런 경험을 묘사하는 우리의 일상어이다. 그리고 잠깐잠깐 동안의 짧고 반복적인 그 결락에 대한 반응이 <극장전>의 희극성이다. 그 순간 그들의 정서를 읽어내지 못해 생기는 결락, 그것에 기인한 웃음이다. 이것이 정말 <극장전>의 희극성일 것이다.

<극장전>, 인물들의 초상화 혹은 죽음에 대한 풍경화

오로지 순수한 ‘지각과 감각’만이 사고 체계 논리의 자명성을 벗어난다. 반대로, 지각과 감각을 앞세워 표현했을 때 논리적인 사고 체계로 그 대상을 잡는 것은 불투명하다. 불투명하다는 것은 결락의 경험과 유사한 것이다. ‘동수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웃기는 놈이다’, 라고 그것에 대해 우리는 흔히 표현하는 것이다. 하지만 생활자 홍상수는 빤히 쳐다보면서 생기는 그 결락도 영화가 가질 수 있는 솔직한 시선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심지어는 영화로 죽음까지도 그렇게 한번 물끄러미 쳐다본다.

죽음의 영향은 모두에게 공정하다. 죽음은 벗어날 수 없는 자연현상이다. 지각되고 감각되는 끝은 자연뿐이다. 그리고 이 영화가 죽음의 영향 아래 놓인다는 것은 벗어날 수 없는 자연현상의 법칙 아래 맴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홍상수가 감각과 지각을 선택하는 것은 세상에 살아남기 위한 방법이다. 그것은 마치 현상학자들이 말하듯이 세상에 있기 위해서다. 동수가 세상에 오래 남아 있기 위한 것처럼. 그래서 나는 세잔과 홍상수 사이에 공유된다고 말해지는 그것이 지각과 감각의 믿음에 대한 추앙일 것이라고 느낀다.

<극장전>에서 섹스의 허무와 사랑의 허구는 이 죽음 전에 흐르는 현상적인 조각들이다. 홍상수는 <극장전>을 통해 인물들의 초상화를 그린 것처럼 했지만, 그 초상화는 죽음이라는 자연을 포착하기 위해 풍경과 정물처럼 그려진 인물들로 가득 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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